brunch

매거진 에세이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몽망 Jan 07. 2023

신앙심은 없지만 유학은 가고 싶었던 나의 이야기

과욕이 부른 지난날의 기억

    내가 처음 그 교회를 알게 된 것은 그와의 만남을 통해서였다. 그때 나는 고등학교 1학년의 신분에 맞게 학교생활에 충실하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나는 그가 운영하는 영어학원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그의 나이는 삼십 대 중반에 키는 중간, 얼굴은 잘생긴 편이었다. 그는 독수리 눈매를 닮은 쌍꺼풀이 진 큰 눈에 오뚝한 코 그리고 안경을 쓰면 지적이면서도 남자다운 인상을 주는 사람이었다. 숫기가 없는 내게 상대방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고 말하는 그의 표정에서는 자신감이 늘 빛이 났고 사람을 대하는 여유 있는 모습이 멋져 보였다. 또한 그의 말솜씨는 논리정연하면서도 재치가 있어서 듣는 사람이 경청하게끔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나는 부모님에게서는 보지 못했던 세련된 어른의 모습일 것이라는 강한 이끌림을 그에게서 느꼈다. 그리하여 그는 17살의 소년에게 처음으로 롤모델이란 것을 갖게 해 주었다. 나는 그가 수업 도중에 자투리 시간이 생기면 한국의 주입식 교육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하는 것도 좋았다. 그러면서 그는 미국 어학연수를 다녀온 이야기보따리를 재미있게 풀곤 했다. 나는 그의 이국적인 이야기에 푹 빠져들었다. 실은 나도 중학생 시절에 필리핀 어학연수를 다녀온 경험이 있었고 그 후로는 남몰래 유학의 꿈을 간직하고 있었다. 나는 유학하러 갈 수 있다면 필리핀이 아닌 미국으로 가고 싶었다. 하지만 미국 유학은 우리 집 사정상 내게 과분한 것이었다. 그래도 미국에서 학비가 가장 싼 대학교라면 부모님이 허락해주시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만은 단념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 번은 그가 강의실 모니터에 프레젠테이션까지 띄우며 어떤 미국의 대학교를 소개한 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분위기는 마치 대입 설명회 같았지만 그의 말투는 학원의 공지 사항을 전하는 것처럼 편안했으며 그 내용도 강연자의 의도에 맞게 대부분이 축약된 듯했다. 하지만 그의 설명회는 내게 무엇보다도 임팩트가 강했다. 그곳의 학생들은 비싼 학비를 반값으로 다닌다는 말이 내 귀에 똑똑히 들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순간 유학의 꿈에 대한 활로가 눈앞에서 펼쳐지는 듯한 환희에 사로잡혔다. 나는 학비 반값에 대한 정확한 해명을 듣지 않고는 참을 수 없는 마음으로 그에게 캐묻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는 그곳이 자신이 속한 특정 종교의 대학교이며 교인인 경우 학비가 반값이라고 설명했다. 그것은 난생처음 듣는 교회의 이름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관심을 보이자 그는 내게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교회에 설렁설렁 다니면서 교회의 축복을 받으면 돼”. 이 말은 나의 양심을 허물없이 어루만져 주는 말이었으며 그를 내 편이라고 전적으로 믿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끝으로 그는 자신이 이 대학의 대입 준비팀을 꾸리고 있으니 언제든지 상담받으러 오라고 덧붙였다. 나는 부모님에게 한 번도 유학에 대한 속마음을 털어놓은 적이 없었지만 이거라면 틀림없이 허락받을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차올랐다. 그러면서 미국 유학의 실마리를 잡았다는 생각에 흥분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반면에 정작 그 교회가 어떤 곳인지는 이상하리만치 관심이 없었다. 이 교회가 사람에 따라서는 개신교나 이단으로도 불린다는 것을 나중에 부모님에게서 처음 들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이 교회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다.      


    나는 살면서 어떤 신적 존재를 마음으로 떠받들고 숭배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태어나면서 세례명을 부여받고 초등학교 저학년까지 부모님을 따라 천주교 성당에 다녔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로써 증명된 것이 하나 있다면 내 마음은 신앙심이 싹트지 못하는 불모지라는 것이었다. 이런 내가 교회를 다닌다면 그건 어떤 의미에서 일까. 나는 대입 진로를 유학으로 결정하고 부모님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우리 집 경제 사정과 장학금을 졸업 전까지 내내 받기 힘든 나의 학업 성적으로는 이 같은 기회를 두 번 다시 찾기 힘들다는 것과 이 대학의 학비의 반값이면 딱 한국 대학교 수준이 된다는 것, 그리고 대학의 입학 조건으로 교회 지부에서 추천서를 받아야 하므로 교회에서 세례는 물론이고 매주 예배에 참석해야 한다는 것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나는 이 모든 것을 감내하고서라도 꼭 유학하러 가고 싶다는 뜻을 단호하게 밝혔다. 부모님은 노발대발하시며 당연히 반대하셨다. 먼저 그렇게까지 해서 유학하러 가야겠냐는 훈계조의 말을 시작으로 그곳은 정교가 아닌 개신교 혹은 이교도로 불린다는 사실을 알고는 더욱 극렬하게 반대하셨다. 부모님은 그 사람도 같은 교회 사람인데 어떻게 그 사람 말만 믿고 진로를 결정하느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내가 사람 보는 눈을 믿는다, 그는 내가 롤모델처럼 따르는 사람이다, 유학에 대한 정보도 교회적인 것은 부차적이고 먼저 나를 아끼기 때문에 알려준 것이니 큰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대답했다. 또한 부모님은 내가 혹여나 종교에 깊게 빠지지나 않을까 걱정하셨다. 나는 이것에 대해서도 근심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말했다. 나는 어릴 적에 성당에 따라다닐 때도 신을 믿지 않았다, 내가 교회에 나가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추천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내게 신앙심이란 대입을 위한 자격조건에 불과하므로 그들의 현혹에 빠질 위험은 하늘에 별 따기라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만약에 진로가 유학으로 결정이 나면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그의 팀에 합류하겠다고 말했다. 검정고시 성적만 있으면 준비가 끝나는 대로 스무 살 이전에 입학이 가능하다는 점, 고등학교 내신을 관리하는 대신 영어 공부에 시간을 더 투자할 수 있다는 점 등등을 이유로 밝혔다. 훗날 부모님은 내가 하는 말을 하나도 믿지 않았다고 하셨지만 자식의 간절한 소망만은 꺾지 못하셨다. 그렇게 나는 굳은 각오와 함께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그의 팀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는 얼마 후에 영어학원을 접고 본격적으로 유학 팀을 꾸리는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가 발휘한 수완으로 팀원들은 계속해서 늘어났고, 우리는 학교에 등교하듯 모여 유학에 필요한 스펙을 차근차근 쌓아갔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매주 참석했으며 성경 독서 모임이나 간증 모임에도 가능하면 빠지지 않았다. 처음부터 이 모든 것은 교회 지부의 목사 격인 사람에게 입학에 필요한 추천서를 받기 위한 명목으로 서로 간에 원만히 합의되었다. 다만 남들이 대입에 필요한 봉사활동 시간을 억지로 채우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비 종교인으로 그의 팀에 합류한 시점부터 내게 신앙심이란 대입에 필요한 하나의 자격조건 그 이상이 될 순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교회의 은총을 받아 학비를 할인받고 학교에 다닐 자격으로 더 높은 수준의 신앙심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영적으로 준비가 될 때까지는 누구든지 유학 준비가 기약 없이 미뤄질 수 있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서로 간에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는 총성 없는 전쟁의 시작을 선포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유학 준비가 막바지에 이르러 이런 말이 불쑥 튀어나오자 우리의 속은 배신감으로 뒤집힐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나에게만큼은 절대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신적 존재가 인간에게 시련과 고난을 내려주듯 나에게도 시험대에 올라 심판을 받는 일이 생겼다. 그때 나는 같은 팀 내에서 연애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이 사실을 눈치채고는 면학 분위기를 해친다는 이유와 함께 몇 가지 해석이 분분한 교회의 율법을 들먹이면서 헤어질 것을 권고했다. 나는 이를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내가 교회 예배를 빠뜨린 것도 아니고 심각한 규칙을 어긴 적도 없는데 왜 사생활까지 간섭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같은 이유로 몇 번이고 불려 가서 너는 준비가 덜 되었다는 이야기가 반복적으로 나오자 할 수 없이 그에게 헤어졌다는 거짓말을 슬그머니 흘렸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이게 화근이 되었다. 친구라도 믿었던 같은 팀의 모태신앙인 또래 놈이 내 말이 거짓말이라고 빼도 박도 못하게 일러바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거짓말은 교회의 규율을 어긴 것이라고 심하게 꾸짖으며 나를 팀에서 내쫓아버렸다. 나는 분한 마음을 있는 힘껏 쏟아내며 그와 감정적인 언쟁을 이어갔다. 내 입장에서는 자신을 믿고 고등학교 자퇴까지 벌이며 1년 넘게 따라와 준 사람을 저 거짓말 하나로 내쫓아낸 것에 대해 도의적으로 납득할 수가 없었다. 그와의 관계는 결국 일말의 신뢰마저 깨지는 상황까지 치닫고 말았다. 어차피 유학 준비는 대부분 마친 상태였고, 지금까지 하던 대로 교회 활동에 빠지지만 않으면 유학 준비에는 문제가 없으리라는 상황 판단을 바탕으로 나는 그에게 앞으로 혼자 준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자 그는 화를 내며 내가 아직 반성을 제대로 하지 않았고 시간을 줄 테니 사과할 준비가 되면 다시 돌아오라고 말했다. 나는 그럴 생각이 없음을 거듭 밝히자 그는 또다시 내가 교회의 율법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들먹이며 지금의 나는 영적으로 준비가 덜 되었으니 교회 지부와 대학교 입학처장에게까지 영향력을 행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가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전혀 예상치 못한 나로서는 여간 낭패가 아니었다. 나는 자퇴라는 외나무다리에 선 이후로 종착지만을 바라보며 줄곧 달려왔다. 나는 이 상황을 타개할 돌파구를 입학처장에게 그의 만행을 고발하는 식의 이메일을 보내는 것에서 찾았다. 그 결과로 교회 지부에서 이 사건에 개입하기 시작했고 결국 아까 말한 목사 격인 사람이 나서서 중재를 맡았다. 사실 중재랄 것도 없는 것이, 모든 것은 내 사과로 시작해서 내 사과로 끝나야만 했기 때문이다. 내가 고개를 푹 숙이고 죄송합니다를 연거푸 뱉어낸 다음에야 그는 더 이상 돌발행동을 하지 않는 조건으로 나를 놓아주었다. 그리고 그의 방해 없이 나는 끝내 어드미션(입학)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글을 쓰다 보니 내가 이만한 글을 짜임새 있게 다룰 실력이 못 됨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그 후 나는 그토록 원하던 유학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일 년도 못 채우고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즐거운 캠퍼스 생활을 하는 도중에 신앙심에 변화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곳 학생의 98퍼센트가 교인이었던 만큼 그곳에서의 신앙심이란 정상적인 캠퍼스 생활을 지키기 위해 내가 신앙심이 없다는 사실을 완벽하게 숨기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잘 해낼 만한 능력이 없음을 알지 못했고, 또한 오만했다. 그래서 이러한 결말을 맞았던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불륜 영화, 나만의 비하인드 스토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