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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망 Feb 18. 2023

일본에서 적응과 체념은 같은 말이었다

in 일본살이

    한국인이 일본에 가서 산다면 다른 타국살이에 비해 배는 더 힘들겠다는 생각은 늘 있었다. 그 당시에 일본으로 취업을 준비하던 나로서는 그게 가장 큰 걱정거리였다. 뉴스를 통해 접하는 한일 양국 간의 갈등은 영원한 평행선을 달리는 국면에서 벗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특히 갈등의 구심점인 역사 문제는 한국인인 내가 일본 땅에서 적응하는 데에 큰 걸림돌이 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치만 그것 때문에 일본인 앞에서 비굴해지긴 결코 싫었다. 이러한 고민을 안고 일본에 입국하자마자 그곳에서 오랫동안 살고 있는 중학교 친구를 찾아갔다. 그는 회전 초밥을 사주면서 일본살이에 대한 실질적인 조언과 여러 현황을 들려주었다. 그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당시 양국 간에 불거진 어떤 분쟁에 대한 그의 의견이었다. 일본으로 떠나기 몇 개월 전부터 한국에서는 일본 측의 일방적이고 불공정한 무역 제재에 맞서 유례없는 일본 불매 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는 이에 대한 원인이야 어찌 되었든 이런 식으로 가면 한국이 무조건 손해라고 일갈했다. 우리가 정부 차원에서 잘 해결해야지 강 대 강으로 치달으면 결국 우리의 손해라는 것이다. 그 당시에 나는 그의 ‘우리’라는 말에 전혀 공감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가 여기에 적응하면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일본인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그가 운영하는 쉐어하우스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의 배려 덕분에 사흘 동안 그의 다른 숙박업소에서 편히 지내다가 이날 처음 쉐어하우스의 방을 보러 가는 중이었다. 그는 창밖의 지나치는 풍경의 곳곳을 마치 시골 토박이 삼촌처럼 일일이 소개해주고 싶어 했다. 또한 일본인 특유의 소심함이 묻어 나오는 말투로 자기 조카가 한국 문화에 푹 빠졌다고 이야기하며 대화를 이끌어나갔다. 그는 틀림없이 좋은 사람일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어쩌면 내 예상과는 달리 일본살이의 시작부터 순풍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러던 와중에 그의 옆자리가 확 불편해지기 시작한 이유는 대화의 흐름이 난데없이 걸림돌로 가득한 비포장도로 쪽으로 향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아직 낯선 일본인의 입에서 듣기에는 다소 부적절한 주제였다. 그는 양국이 잘 지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와 함께 자기 생각을 조심스럽게 설파하기 시작했다. 짧게 요약하자면 양국이 서로 과거의 이야기에 머물러있기보다는 미래의 이야기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이었다. 나는 내심 당황했다. 그가 어른으로서 훈계를 하는 말인지 아니면 단순히 제 생각에 동조해 주길 바라서 하는 말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듣는 이의 입장을 조금이라도 헤아린다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일본인이, 그와 나의 갑을 관계를 제쳐두고라도, 서로가 명백히 이해당사자로 갈라지는 주제에 대해 한쪽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밝히는 것은 무례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와 같은 한국인이라면 대부분이 한일 간의 역사 문제가 청산되지 않고는 미래의 이야기로 나아갈 수 없다는 입장일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선조들의 가슴속에 응어리가 진 한을 풀어드릴 수 없다. 언뜻 건설적으로 들린 그의 말속에는 과거 일본이 자행했던 역사적 업보를 회피하려는 일본인들의 혼네(속마음)가 엿보였고, 나는 그것이 불쾌했다. 하지만 이래저래 도움을 받은 처지로서 에둘러 말하는 것 이상으로 내 생각을 똑 부러지게 표현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리고 그날의 대화는 앞으로의 남은 일본살이에서 이와 같은 일이 반복되면 어떡하냐는 걱정까지 달아주었다.   

   

    그 뒤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오사카 쉐라톤 미야코 호텔의 꼭대기 층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서빙 일을 맡기로 했다. 최종 목표인 취업까지 앞으로 쭉 도전해야 할 일본에서의 첫 사회생활이었다. 걱정도 컸지만 서로의 것에 대한 존중만 잘 지켜진다면 틀림없이 타 문화의 벽을 허물 수 있다고 굳게 믿기로 했다. 근무 첫날이 돼서야 안 사실이지만 그곳은 나 같은 외국인에게는 진입장벽이 너무 높았다. 그들의 기준에서는 고급 레스토랑의 서비스 수준과 나의 현지화 수준의 격차가 못마땅했을 것이다. 낯선 현지 문화와 서툰 일본말을 붙들고 있다 보니 아무래도 주변 동료나 손님에게까지 민폐를 끼치는 일이 생겨났던 것이다. 나는 낯선 외국인의 등장에 냉담했던 그들의 태도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일본 최고의 미덕인 성실함을 존중하는 듯한 나의 모습에 그들도 조금씩 열린 마음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또한 차츰 업무의 이해도가 높아지면서 그들과의 긴밀한 공조를 통해 사이가 나날이 가까워졌다. 그중에는 나이가 70대로 보이는 일본인 노인도 나랑 같은 아르바이트직으로 일하고 있었다. 나는 그가 육체적으로 힘든 일을 도와주고 그는 나의 좋은 말벗이 되어주면서 우리는 조금씩 친해졌다. 알고 보니 그는 한국에 관심이 많았다. 그 당시에 조국 장관이 사퇴한 당일의 현안을 그의 입을 통해 알게 되어 적잖이 놀랬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가 좋았던 것 같다. 그 다음에 그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내게 한 이야기는 동해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말의 뉘앙스에는 일본해라는 바다의 명실상부한 이름을 가만두지 않고 한국이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듯한 모멸감이 엿보였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한국이 일본해를 동해라고 부르고 싶어 하며 그 이유는 틀림없이 독도 때문이렷다, 였다. 외국인의 처지에서는 양국의 민감한 문제가 서로를 순식간에 낯선 타국인으로, 내 이익을 침해하는 이해당사자로 둔갑시키는 상황이 달가울 리가 없다. 또한 한국인의 처지에서는 이같이 타협의 여지가 없는 역사 문제가 화두에 오르면 주변의 순진한 일본인들을 잠재적인 이해당사자로 끌어들이기 때문에 위협적인 것이다. 그 이후로 그에게서 여러 번이나 엇비슷한 말을 들었지만 나는 표정 관리 차원에서 떨떠름하게 웃어넘길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서 소동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반응이 그의 마음에 차지 않았던 것이 분명했다. 그 후로 그는 조울증 환자처럼 내게 버럭 짜증을 내는 일이 잦아졌다.    

  

    일본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살다 보면 별의별 이야기를 접하게 된다. 여기서 알게 된 동생은 자신이 아르바이트하면서 겪은 일을 내게 들려주었다. 그는 어느 레스토랑의 와인 바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일본인 취객이 그의 대답을 자신들의 안줏거리로 삼으려고 해서 화가 났었다고 했다. 취객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것은 독도가 누구 땅인지 대답하라 것이었다. 그는 취객을 상대로 따지고 들기도 우습게 여겨져 잠자코 있었다지만 결코 공손하게 굴진 않았다고 했다. 그는 결국 그곳을 그만뒀다고 했다. 이 밖의 여러 사연을 겪고 들으면서 나는 그것이 마치 내 일인 양 가슴이 뜨거워지고 또한 분개했다. 지난날 일제가 조선의 땅을 강제로 합병하면서 독도라는 작은 섬이 일제의 영토로 편입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일제가 패망하면서 제국주의로 인한 식민지 영토를 일체 반환하는 조약을 체결했고, 이 조약이 독도는 분쟁의 여지가 없는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의 영토임을 증명해주고 있다. 그래서 독도가 그들의 영토라는 일본 측의 주장에는 위안부나 군함도 같은 강제징용 문제와 더불어 일제의 제국주의적 역사를 부정하고 그 도덕적 책임을 회피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그들이 독도를 언급할 때마다 우리 민족이 분통을 터트리는 이유이다. 그런데 일본에서 살다 보니까 극우 성향이 아닌 평범한 일본인에게서도 한국인을 존중하지 않는 말을 예삿일처럼 듣는 일에 의아했던 적이 있었다. 한국인은 학교에서 양국의 역사에 대해 세세히 배우는 한편 자신들은 그렇지 않다는 어느 양심 있는 일본인의 고백이 떠오른다. 그는 일본인의 대다수가 특히 근현대사에서 선택적인 교과 과정의 수업을 받는다고 했다. 한 마디로 일본인들의 역사책에는 양국 역사의 많은 페이지가 공백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사람이란 자신이 모르는 것에 공감할 수 없는 법이다. 그렇기에 일본 땅에 사는 한국인으로서 우리 민족이 겪은 아픔의 역사에 공감하지 못하고 무례를 범하는 일본인을 이해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있다는 사실이 어이없기도 했다. 언젠가 한 번은 그들이 모국에 대한 눈부신 자긍심을 보여주는 말과 행동을 보며 선망의 눈빛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지난날 그들의 선조가 저지른 악행을 뉘우치고 같은 역사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회한의 의지가 담겨있지 않았다. 그래서 금방 씁쓸해졌던 기억이 남아있다.      


    그 이후 코로나가 터지면서 나는 약 1년 동안의 일본살이에 마침표를 찍고 한국으로 귀국했다. 그동안 일본살이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적응 완전 실패’로 요약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찾아갔던 친구의 ‘우리’라는 말을 떠올렸을 때 그는 뭔가 달랐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일본에 5년 넘게 살면서 한국인이 제대로 존중받지 못하는 순간을 나보다 더 많이 목격했을 것이다. 그가 일본에 처음 온 내게 해주었던 조언은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를 잊지 말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주변을 가까이하다 보면 똥물이 언젠가는 내 몸에 튀지 않겠는가. 우리 민족의 아픔을 교묘하게 우리 탓으로 떠넘기는 그들의 꿍꿍이를 곁에서 지켜보다 보면 누구라도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서서히 빨갛게 달아오를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런 상태가 해소되지 않고 지속되다 보면 그들의 자긍심 어린 모습을 목도할 때마다 그것이 내 나라의 아픔을 부정하고 그 위에 발자국을 남겨서 지탱되고 있음을 느끼지 않았을까. 일본인이 얼마나 잘났으면 그렇게 할 수 있는 걸까. 그도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일본인 집단 전체에게 도덕적인 분노가 쌓였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는 일본에서 대학교도 다니고 직장에도 있었던 만큼 일본인 사회에 더욱 밀착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그가 한 개인에게 느꼈을 모순적인 감정은, 일본인 한 사람과 일본인 집단에 대한 서로 모순되는 감정 사이에서 오는 정서적 충돌은 나보다 더 강렬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일본 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목적에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방해가 되는 걸림돌로 간주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차라리 일본이 강해서,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므로 일본의 침략과 우리 민족이 겪은 수탈과 고난의 아픔은 누구의 책임도 아니라는 일본 측의 주장이 새삼스럽게 다가왔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모순된 감정으로부터 해방되어 마음이 편해지는 쪽을 선택한 건 아니었을까. 그렇게 그가 민족의 자긍심으로부터 멀어지는 길을 걸어왔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 안타까운 마음이 뭉클 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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