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30살, 늦깎이 교환학생으로 깨달은 것들(1)
핀란드 교환학생 D+47, Period 3을 마치며
원래는 교환학생을 하면서 꾸준히 글을 올리는 게 목표였으나, 역시나 천성이 게으른지라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예전 같았으면 게으른 자신을 책망했겠지만, 여유의 나라 핀란드에서 살다 보니 마음가짐도 사뭇 달라졌다. 글을 쓸 만큼 여유로운 시간이 없었다는 것은 그만큼 교환 생활을 충실히 보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련다.
그리고 실제로도 나름(!) 바빴다. 그리고 통상 외국생활을 하며 겪는다는 외로움을 느낄 일도 크게 없었다.
사실 그리 많은 친구를 사귄 것도 아니고, '뭔가를 하거나 누군가를 만나야 한다'는 무의식적인 강박에 약속을 꽉꽉 채워뒀던 한국 생활과 비교하면 사실 스케줄도 별로 없이 한량처럼 지냈다.
그럼에도 외롭지 않았던 것은 감사하게도 마음 맞는 룸메이트들(Joanne, Louise)과 룸메나 다름없는(제4의 룸메!) Amy라는 친구들을 만나 같이 요리하고 밥을 먹고 여행을 다니며 정말 가족처럼 지냈기 때문일 것이다. 고국에서 7000km 가까이 떨어진 타지에서 물리적 의미뿐만 아니라 심리적 안식처 역할을 하는 Home이 있다는 것은 크나큰 힘이 되었다.
그렇게 한량 같은 교환학생의 3분의 1이 벌써 지나갔다. 이번주로 Period 3을 마쳤기 때문이다.
내가 교환학생을 하고 있는 Aalto Univerisity는 1년이 Period 5개로 나눠져 있다. 가을학기는 Period 1, Period 2 / 봄학기는 Period 3, Period 4, Period 5으로 구성된다. 각 Period마다 듣는 과목도 다르기 때문에 수강신청 기간도 Period마다 다르다. 각 Period는 6~7주로 이뤄지며, 한 Period가 마친 뒤에는 일주일의 Evaluation Week가 있다. 보통 이 기간 시험을 보지만 시험이 없거나 Take-home exam 등으로 대체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Period 사이 1주일의 짧은 방학이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벌써 교환생활의 3분의 1이 지나갔다는 게 믿기지 않지만, 한 달 반의 생활동안 배운 점을 짧게나마 정리해보려고 한다.
1. 홀로 사는 법(장보기, 요리)과 요리의 즐거움을 배웠다.
어른의 기준은 무엇일까? 이전의 나였다면 경제력을 서슴없이 말했을 것이다. 스스로 돈을 벌어서 생활할 수 있는 사람. 물론 지금도 그 기준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교환학생을 하면서 추가된 기준이 있다면 '자기 밥 정도는 해 먹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핀란드로 오기 전의 나는 '남이 해준 밥을 먹는 사람'이었다. 한 번도 자취를 해본 적이 없다 보니 부모님(정확히는 어머니)이 차려준 밥상이 익숙했다. 물론 내가 스스로 차려먹을 때도 있었지만 요리라고 하기는 부족한 간단한 조리음식(라면, 밀키트, 간장계란밥, 초간단 파스타 등)이 전부였다. 아니면 배달음식을 시켜 먹거나 식당에서 포장해 와서 먹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부터는 외식이 잦았기 때문에 사 먹는 게 일상이었다. 손재주가 없는 나에게 항상 주방은 낯선 공간이었고 요리는 '꼭 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드는 행위였다.
그러나 외식비가 비싼 핀란드에 살다 보니(핀란드 음식이 입맛에 별로 안 맞기도 했고) 자연스레 집에서 요리를 해 먹게 됐다. 내 밥을 직접 해 먹게 되니 그전에는 안 보이던 것들이 보였다. 정말 간단해 보이는 요리더라도 어떤 것을 해먹을지 고민하는 시간과 재료 손질과 조리과정, 설거지 및 치우기까지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행위였다. 그리고 그 재료를 냉장고에 넣기 위해 장 보는 시간과 장 볼 때의 고민, 유통기한 안에 음식을 해치우기 위해 음식의 시기 및 조합을 고민하는 과정 등까지 직접 겪다 보니 '내가 정말 여태까지 편하게 살아왔구나'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됐다.
솔직히 한국에서 계속 살았더라면 갑자기 독립/결혼을 하지 않는 이상 요리를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요리의 수고로움을 느끼지 못했을 것 같다. 그러나 핀란드로 온 덕분에 내가 먹는 밥이 어떤 정성과 과정을 겪은 것인지 알게 된 것 같다!
한편으로는 요리의 즐거움도 느꼈다. 이건 완전히 혼자 살기보다는 같이 사는 사람이 있어야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인 듯하다. 바로 내가 해준 요리를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맛있게 먹어주는 것!! 얼마 전에 나 포함 친구들이 모두 골골대서 몸보신도 할 겸 닭 한 마리를 만들었는데, 그냥 사실 이거 저거 넣으면 비슷한 맛이 나겠거니 해서 만든 요리인데도 다들 너무 좋아해서 정말 뿌듯하더라.
2. '나이'라는 틀에서 한 발짝 떨어져 보았다.
나이는 한국 사회에서 정말 중요한 요소다. 일단 새로운 사람을 몇 살인지부터 파악하고, 그 나이에 따라 '친구'가 될 수 있는지가 나뉜다. 관련해서 갑자기 떠오르는 에피소드가 있다. 대학생 때 고등학교 친구랑 같이 피부과에 갔는데, 사실 그 친구는 고등학교 같은 반이었지만 나보다 한 살이 많았다. 어릴 때 외국생활을 했는데, 한국에 들어오면서 시기가 애매해 한 학년을 늦게 들어온 케이스였다. 그때 우리 둘을 같이 진료 보던 의사 선생님이 "둘이 무슨 사이예요? 성이 다른 거 보니 자매는 아닌데? "라고 물었고, 우리는 "친구"라고 답했다. 그러자 그는 "친구? 이 분이 나이가 더 많은데? 언니 아니고?"라고 물었다. 그때 나는 '우리 나이 차이가 10살, 20살이 나는 것도 아니고(이 정도 나이 차이가 나더라도 충분히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고작 1살 차이일 뿐인데,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없는 걸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 그 고작 한 살 차이로도 '빠른 년생 논쟁'이 생기는 나라가 한국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정말 그런 게 없다. 다 영어로 말하다 보니 존댓말도 없고, 이름을 부르고, 나이 가끔 물어보긴 하지만 그냥 '엇, 생각보다 너 나이가 많네!' 정말 이 정도 반응이 끝이다. 특히 교환학생들은 학사와 석사학생이 같이 그룹을 짓다 보니 나이 차이가 꽤 나는데도 친구가 되는 데는 큰 상관이 없더라. 지금 나랑 가장 친한 친구들만 보더라도 나보다 4~8살 어린 친구들이다. 종종 '만약 내가 이 아이들을 한국에서 만났더라면 이렇게 편하게 친해질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언어의 힘은 생각보다 크다. 언니/오빠/형/누나라는 호칭은 어린 사람에게는 상대방이 나보다 나이가 많다는(윗사람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연장자에게는 내가 좀 더 언니/오빠/형/누나다워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꼭 호칭이 아니더라도, 한국에서는 특정 나이대에 '나잇값'을 해야 한다는 인식이 다른 나라보다 강한 것 같다. 20대 초반은 어때야 하고, 후반은 어때야 하고, 30대는 어때야 하고... 그런 틀에 갇혀있다 보니 나이 스펙트럼이 큰 사람과는 정말 편한 사이가 되기 어려운 것 같다. 서로 불편하기도 하고.
나이에서 자유로워지다 보니 스스로를 규정짓는 행위도 줄어들었다. 한국에서는 '이제 내가 20대 후반인데, 이제 곧 서른인데, 이러는 게 맞을까?'라는 고민을 할 때가 종종 있었다. '나잇값'을 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근데 여기서는 어린애들이랑 놀아서 그런지 모르지만, 그냥 정말 대학생처럼 논다. 뭐 나이가 많으면 어때, 남들한테 피해 주는 것도 없는데 나 하고 싶은 것 하면 되지,라는 생각이다.
주변에 한국인들이 별로 없다 보니 그런 철없는 행동에 대한 사회적인 눈치도 안 보게 됐다. 그런 알게 모르게 나이가 주는 피로감이 없으니까 오히려 편하더라.
--(2)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