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에 열렸어야 할 올림픽이었다. 올림픽을 해도 되느냐 마느냐로 시작한 논쟁은 올림픽에 참가할 것이냐 말 것이냐로 구체화되어 기어이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현재의 Covid19가 변이에 변이를 더할지 모른다’, ‘선수들의 위생과 건강을 보호해야 한다’, ‘선수들이 전파자가 될 수 있다’라며 시작된 출전 및 참가 반대 측의 논리는 어느새 국가의 ‘자존심’으로 까지 확장됐다. ‘선수단 출전을 보이콧해야 한다’, ‘일본에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 ‘이번에는 물러서면 안 된다’까지.
반면에서는 다른 주장이 터져 나왔다. ‘오직 이번 대회만을 바라보면서 살아온 선수들의 꿈과 목표는 어찌 되는가?’, ‘물리적 생(生)만이 삶인가, 선수들이 흘린 피, 땀, 눈물을 어찌 함부로 타인이, 정부가 무엇 이관데 재단할 수 있는가.’
ⓒ Licensors / 리우올림픽 4관왕, 시몬바일스의 이야기는 호우시절에서
좀처럼 갈피를 잡을 수도 결정할 수 없는 물음 앞에서 팽팽한 양쪽의 주장들만 풍선 부풀어 오르듯 커져갔다. 시간은 그저 흘렀고, 물음에 시원한 답을 하기도 전에 올림픽은 끝났다. 언제 그랬냐는 듯 출전에 반대하던 이들도 보름 여의 기간 동안 함께 울고 웃었다.
목숨이 걸린 것도 아닌 체육대회 앞에서도 인간의 말은 한껏 부풀어 오른다. 하물며 생명이 걸렸다면, 국가의 존망이 걸렸다면 어떻겠는가?
그 일은 400여 년 전, 조선에서 있었다.
애당초 조선은 대륙의 변방에 있는 작은 나라로 시작했다. 변방이라는 위치적 특성은 대륙의 주인을 놓고 힘을 겨루는 전쟁으로부터 어느 만치 떨어져 있을 수 있는 장점이 되기도 했다. 변방의 조선이 늘 최우선으로 고심해야 했던 것은 대륙과의 조화로운 관계 유지였다. 하여 조선은 그들의 문화와 철학을 연구하는데 집중했다. 개가도 있었다. 대륙에서 발원한 본토의 사상이 오히려 조선에서 더더욱 찬란히 빛을 발하기도 했다. 조선이 선택했던 문치주의는 비판의 여지는 있지만 국방력으로 온전히 대륙과 맞설 수 없는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면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어쩌면 그것이 왕조를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기도 했다.
대륙만을 신경 썼기에 임진년, 왜의 공세는 조선에게는 치명적이었다. 미처 예상하지도 못했고, 감지했다 해도 애써 무시했던 것이 왜였다. 갑작스러운 임진년 싸움의 전장은 조선 땅이었지만 여파는 당시 대륙의 주인이었던 명에까지 미쳤다. 이여송을 필두로 조선에 내었던 구원군을 위한 물자 수급 통에 명은 자기 앞길을 건사하지 못할 정도로 흔들렸다. 그 틈에 대륙의 주인을 노리던 여진은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명에 도전한다. 동시에 후방에서 명을 지원할지 모를 조선 역시 청의 단속 대상이 된다. 조선은 임진년 섬나라의 공격을 받은 지 채 반세기가 되지 않아 이번에는 대륙에서 새로 발흥하는 청의 공격을 받게 된다.
ⓒ 영화 '남한산성' / 이든픽쳐스
대륙 저 너머에 있던 청의 전쟁 방식은 조선과는 달랐다. 성을 뺏어내는 싸움이 아니었다.
청이 조선 땅에서 벌인 싸움의 목적은 땅을 뺏어 넓혀 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조선의 왕 인조를 향해 있었다. 인조의 조선이 명의 후방을 지원하지 못하게 하는 것.
그래서 그들의 기마병은 왕이 있는 조선의 도읍을 향해 곧장 내쳐 달렸다. 조선의 조정은 시간이 없었다. 뱃길에 오를 겨를조차 벌지 못하고 황급히 한양 동남쪽, 지금의 성남 인근 남한산성에 가서 문을 닫아버린다.
영화 『남한산성』은 조선왕조가 산성 안에서 지냈던, 아니 버텼던 약 50일의 병자호란이라는 역사적 기록에 김훈의 천재적 상상으로 그려진 소설을 토대로 그려진 작품이다. 인류의 평화를 상징하는 올림픽 출전을 두고서도 공방이 가득했는데 국가의 명운 앞에서는 어떠했으랴.
예조판서 김상헌은 전쟁을 불사한다. 그에게 있어 삶이란 단지 목숨의 있고 없음이 아니다. 임금이 택할 삶의 길은 죽음을 넘어서야 했다. 이조판서 최명길은 명분에 갇혀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택하는 것이 도리어 임금이 가서는 아니 될 길이라 말한다. 조선의 ‘삶의 길’에 대한 두 사람의 한 치 물러섬 없는 공방과 고민은 어느새 관객에게도 고스란히 전이된다.
ⓒ 영화 '남한산성' / 이든픽쳐스
인간의 역사는 이해할 수 없는 선택들이 줄을 이어 왔다.
도대체 왜 독일 국민은 자국에서 태어나지도 않은 이상한 선동가 한 명에 그토록 철저하게 놀아났던가, 문명국 영국인 장교는 어찌 자기 마음대로 남의 땅을 네모 반듯하게 그어대서 아프리카에 분쟁의 씨앗을 심을 수 있으며, 조선말 실권자 '흥선'은 무슨 연유로 밀려오는 시대의 흐름을 외면하고 굳이 문을 닫아 치욕의 36년을 보내게 만들었나.
답을 알고 있는 현재의 점(點)에서 돌아보면 세상에 해결 못할 고민은 없다. 그러나 타자에게 속해 있던 고민이 지금 내 삶으로 침투해 들어오면 그것은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가 되어 마음을 휘젓는다.
ⓒ 영화 '남한산성' / 이든픽쳐스
역사 수업 때 배웠던 최명길과 김상헌의 주장은 어쩌면 선조라 일컬어지는 지난 옛 사람들, 즉 타자의 고민이었다. 명길과 상헌의 주장은 그 시절 그들의 삶의 배경에서 비롯한 각자의 신념일 뿐이었고, 400년 지난 지금에서는 어떤 것이 더 그럴듯한 효용이었는지를 헤아려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김훈의 문장과 황동혁의 연출을 통해 다시 태어난 ‘남한산성’은 그 시절 조선이 당면한 고민이 그저 박제된 기록이 아닌 지금 내 삶의 고민과 닿는 선(線)이 될 수 있음을 일깨운다.
나무가 울창하게 옷을 입었다가 앙상히 헐벗기를 수백 번 반복하고 나서 전달된 이야기는, 역사를 낱개의 개별적 사건의 결과로 셈해보는 ‘득실의 기록’에서 현실의 삶에서 당면한 문제에 대한 답을 찾아보는 ‘지혜의 실재’로 다시 태어나게 했다.
영화는 호란의 전장을 그 시절 조선 땅이 아닌 ‘관객의 삶의 현재’로 끌고 와서 성공적으로 고민하게 만들었다.
몇 해전, 영화의 원작이 되는 동명 소설의 저자 김훈은 한 인터뷰에서 자신이 글을 쓰는 이유를 ‘스스로의 내면을 드러내기 위해서’라고 말한 바 있다.
‘드러낸 자신의 내면이 남에게 이해를 받으면 소통이고, 설령 그렇지 않아도 서로의 다름을 확인할 수 있는 의미가 있다’면서, 저자는 ‘인간이 반드시 서로 얼크러지고소통되어야만 훌륭한 것이 아니라 각자의 차이와 다름을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매우 고귀한 일’이라고 부연했다.
인간의 삶에서는 사뭇 서로 다른 상반된 가치와 개념들이 마치 자신만이 진리의 자리를 독점해야 한다는 듯 반복해서 충돌한다.
어린 시절, 한 글자라도 더 집어넣으라는 세상의 말에 그만한 깜냥이 아님을 이미 알면서도 이것저것 양이라도 채워보자며 스스로를 다그치기도 했다.나름 열심히 채워보려 했는데, 이제 세상은 비우라고 야단이다.
채움과 비움이 서로가 진리인 양 앞서거니 뒤서거니 나대는 통에 갈 바를 알지 못하던 여름밤, 몇 년 만에 다시 본 남한산성은 시간의 숲 속에 쌓여서 생생히 보존된 그 시절 조선 조정의 고민을, 비움과 채움 사이에 고민하는 내 삶에 ‘이음’으로 덧입혔다.
명길과 상헌의 이야기, 두 사람의 ‘삶의 길’에 대한 고민이 겹겹이 둘러싼 시간의 숲을 헤쳐 나와 고귀한 숨을 내뿜으며 ‘지금 내 삶의 길’을 다시금 고민하게 한다.
깊은 숨이 흘러나온다, 삶의 길은 어디인가.
젠장.
p.s 물론 노력을 ‘다른 친구들’만큼 성실히 했다고는 차마 못하겠다. 그저 비루한 내 몸뚱이도 마냥 편하지는 않았다는 것, 힘들기도 했다는 정도로 이해해주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