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말하는 엄마의 목소리와 말투는 또다시 내 슬픔의 녹는점이 되고. 엄마가 악을 쓰며 소리를 지를 때의 목소리, 빈정거리고 짜증낼 때의 목소리를 싫어했으나 가장 싫은 것은 슬픔을 녹인 것 같은 목소리를 낼 때였다. 떼어낸 마음이 금방 다시 돌아가 붙어버리니까.'
김화진 장편소설 동경 中
언제 가장 힘이 나고 긍정적이냐고 묻는다면, 엄마가 앓는 소리를 할 때라고 대답할 거다. 엄마가 앓는 소리를 낼 때면 나는 평소에 안 하던 행동과 말을 하곤 한다. 그렇게 남과 비교하는 걸 싫어하면서도 엊그제 혹은 작년에 봤던 기삿거리를 늘어놓는다. 세상에는 이런 사람도 있대. 요즘 이런 문제도 많다더라. 다들 힘든가 봐. 엄마를 위로하면서 은근슬쩍 주위를 돌리는 화법이다. 시선을 안에서 밖으로 옮기면 우리의 고민은 사회의 문제가 된다. 그렇게 세상 탓을 하면서 장난스럽게 말한다.
세상이 요지경이야 ~
나는 엄마가 낙담하거나 슬퍼하는 모습을 지켜 봐줄 그릇이 못 된다. 이건 그릇의 크기 차이가 아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재질 차이라고 해야 하나. 타고난 기질(예민함)을 바꿀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나만의 방식으로 엄마를 위로하기 시작했다.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이건 엄마보다 나를 위한 위로에 가깝다. 나는 가까운 사람의 슬픔에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일 자신이 없다. 아마 양치를 하다가, 유튜브를 숏츠를 보다가, 길을 걷다가, 노래를 듣다가 엄마의 말을 떠올릴 것이다. 금세 단맛이 빠져버린 대화를 습관처럼 곱씹을 거다. 그녀의 슬픔에 내가 일조했는지. 그렇다면 어떻게 덜어낼 수 있는지 자주 고민할 게 뻔하다. 그래서 최대한 듣지 않는 쪽을 택한다. 듣지 못하는 쪽을 택한다.
시간이 흘러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가령 물기 가득 머금은 엄마의 목소리, 일 년에 한 번 들을까 말까한 아빠의 한숨, 매일같이 막걸리를 사가는 단골의 피곤한 표정, 옆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낯선이의 한탄, 눈에 보이지 않는 슬픔을 읽게 된 나. 일시적인 상태라고 말하고 싶지만, 이것들이 영원할 것 같다고 느껴질 때는 한없이 울적해진다.
사는 게 다 그렇다는 말을 들을 땐 어린 아이처럼 울고 싶다. 나는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언제쯤 모든 일 앞에서 그랬구나, 그럴 수 있지, 하면서 태연하게 넘어갈 수 있을까. 어쩌면 모두가 태연한 척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럼 어른이 된다는 건 태연한 연기를 잘하게 된다는 의미일까. 이러한 생각에 다다르면 나는 인정한다.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사람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걸. 분명한 다름이 있는데도 비슷한 부분을 찾고 맞추며 살아가니까.
그래서 오늘도 엄마를 위로한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의 불행을 운운하면서. ‘맞아. 요즘 다 힘들지. 사람들 다 숨기고 사나 보다.’ 엄마가 이렇게 말할 때면 조금 안심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위안이 될 수 있다면 나의 불행을 빌려줄 수 있다고. 흘러 흘러 지구 반대편까지 내 얘기가 전해져도 상관 없다고 말이다.
부드럽고 둥글둥글한 내 얼굴에는 그늘 지는 게 잘 보여서 종종 연기를 해야 한다. 엄마는 알까. 해맑게 웃고 있는 딸이 어떤 고민을 하고 있을지. 누워 있는 엄마를 내려다보는 날이 늘었다. 이렇게 작았었나. 아니면 작아졌나. 나보다 눈물 많고 여린 엄마는 사는 게 좀 가벼워졌을까. 30대, 40대, 50대.. 어느 시기가 되어야 나 자신과 동거동락 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그날이 머지 않아 올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