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혜영 Mar 04. 2018

의 자

-낙천리 의자공원에서-


그 곳엔 의자가 있었다. 주말 오후, 방문한 낙천리의 의자공원엔 빈 의자들이 둔덕을 이루고 있었다. 꽃무늬가 그려진 둥근 의자, 하늘에 닿을 듯 촘촘히 올라간 의자탑, 넉넉하게 펼쳐진 나뭇잎 모양의 벤치가 서 있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나는 행인의 지친 발이 잠시 머물도록 의자는 잔등을 말없이 내밀었다. 나는 오랜 걸음으로 곤한 다리를 그 자리에 내려놓았다. 잠시 쉬어가도 그리 늦지는 않으리라. 잠시 짐을 내려놓고 의자에 등을 기대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없이 많은 의자들이 나를 에워싼 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겨울이 머물고 있는 탓일까? 공원 둘레를 에워싼 감귤이 정겹게 반겨주었지만, 비어 있는 의자에선 진한 외로움의 냄새가 풍겼다. 커피 한잔을 들고 1000여 개의 의자 사이를 지나 작은 의자에 앉았다.


스물 갓 넘은 겨울의 어느 날, 약속한 누군가가 오지 않는 바람에 칠 벗겨진 나무 벤치에서 세 시간 이상을 기다렸던 적이 있었다. 휴대폰은 물론, 삐삐도 없던 시대에 앉을 의자가 없었다면 차마 하지 못했을 일이었다.

세 시간 반을 훌쩍 지나 혹시나 싶어 들렀노라며 온 그 사람을 간신히 만나고 난 결국 화를 내고 말았다. 아마 마음 속으로 연모하던 사람으로 기억된다. 화를 내기 위해 그렇게 긴 시간을 기다리지는 않았을 텐데......


                                                              <출처 - 네이버 이미지>


그래서일까? 나는 ‘빈 의자’를 볼 때마다 하염없이 누군가를 기다리게 된다. 사람을 기다린다는 건, 시간이 고이는 ‘빈 의자’에 앉아 있는 일인 것 같다. 누군가 잠시 옆에 머물렀다 떠남을, 세상의 바람과 비와 눈발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 그것은 비어 있어야 또한 채울 수 있음을 깨닫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완전히 채워 버리면 더 이상 담을 수 없다.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선 마음 한 자리를 비워야 한다. 내 안에 내가 너무 많이 자리 잡아 있을 땐 아무도 사랑할 수 없을 것이다.

한 해 두 해 나이를 먹어가면서 비우기가 더 어려워지는 것 같다. 가지와 필요없는 잡풀만 무성해 시야를 가려버리는 필요없는 노목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진다.


오늘같이 볕좋은 오후면 나는 연락도 없이 무턱대고 찾아간 낯익은 장소에서 옛 친구와의 조우를 꿈꾼다. 시계와 휴대폰은 잠시 풀어둔 채 두꺼운 책 한 권 펼치고 앉아 있다 인연을 만나는 일은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설렌다.

설사 오랜 시간을 기다리고도 아무도 만나지 못한다 해도 좋을 것이다. 봄에는 따스한 햇살이, 여름에는 그늘이, 가을엔 낙엽이, 겨울엔 새하얀 눈꽃이 의자 위에서 벗을 대신해 줄 것이기에.......


사람을 기다린다는 건, 시간이 고이는 ‘빈 의자’에 앉아 있는 일인 것 같다. 누군가 잠시 옆에 머물렀다 떠남을, 세상의 바람과 비와 눈발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 그것은 비어 있어야 또한 채울 수 있음을 깨닫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완전히 채워 버리면 더 이상 담을 수 없음을 느린 겨울 오후, 빈 의자에 앉아 생각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제주 봄맞이 골목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