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민요패 '소리왓'
제주민요패 '소리왓'
백발 할머니가 호미를 들고 밭으로 들어갔다. 사방을 휘도는 바람 아래 등을 구부리고 고랑을 파고 이랑을 냈다. 보리 뿌리고 당근 갈려면 한참 남았는데 무심한 하늘이 붉게 저물기 시작했다. ‘저 넓은 밭을 언제 다 매누?’ 할머니의 한숨을 듣기라고 한 듯 이웃이 하나씩 모여들었다.
“검질 짓고 굴 너른 밧되/ 한 소리에 두 줌 반씩/ 두 소리에 석 줌 반씩 어기여랑 상사대로다” (제주민요 ‘검질 매는 소리’ 중에서)
돌 많고 바람 많은 화산섬에서의 삶은 고될 수밖에 없었다. 자갈밭을 일궈 씨앗을 뿌리는 일이 끝나면 갯가로 나가 소라와 전복을 캐고, 물질이 끝나면 다시 집안일을 돌봐야했다. 허리 한번 펴기 힘든 고단함에 지칠 때마다 섬사람들은 노래를 불렀다. 밭을 갈고, 검질을 매고, 갈치를 잡고, 물질을 하는 그들에게 노래는 힘을 붇돋아 주는 가족과 같았다.
▲ 소리왓 공연 1998년,2001년, 2005년 ⓒ소리왓
소리를 만드는 밭, 소리왓
제주민요패 ‘소리왓’은 이름부터 진정한 이 시대의 소리를 만드는 밭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1992년 창립해 지금까지 전국을 돌며 소리판굿을 공연했다. 오랜 세월 무대생활 한 덕에 제주 원도심 거리 낡은 건물 3층에 자리한 사무실은 그간 모은 소품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어린 비바리가 지고 다닌 물허벅, 해녀의 생명줄 태왁, 야무지게 매듭지은 어망과 색 바란 옹기들. 다양한 민예품이 작은 민속박물관처럼 빼곡히 들어차 있다.
▲ 소리왓 사무실 / 소리왓 소장 민예품
그 중 가장 넓은 자리를 차지한 연습실의 문을 열었다. 다음날 입춘굿에서 있을 공연 연습이 한창이었다. 벌써 백번도 넘게 무대에 올린 작품이지만 일정이 잡히면 단원들은 처음인 듯 반복연습을 했다. 입장 순서부터 무대 자리 선정은 물론, 마무리 인사와 퇴장하는 위치까지. 소리왓 단원들의 연습은 늦은 밤까지 쉼 없이 이어졌다.
▲ 연습실 내부 / ‘우리할망넨 영 살앗수다’공연 연습 / 공연 소품 챙기는 모습
백 년을 이어온 이야기, 우리할망넨 영 살앗수다
어느 한 계절 순순히 바뀌는 법이 없지만 겨울에서 봄으로 바뀌는 시기는 유난히 변덕이 심하다. 올해는 심술이 더해 절기상 봄이 시작되는 입춘, 대설경보로 온 섬이 꽁꽁 얼었다. 하지만 아무리 매서운 한파가 기승을 부려도 계절이 바뀌는 것을, 봄이 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는 일이다. 두터운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맑은 물소리, 하얗게 얼어붙은 나뭇가지에 매달린 봄눈과 아이들의 밝은 웃음 끝에 봄은 이미 잦아들고 있었다. 그렇게 계절은 눈이 아닌 귀로 먼저 다가온다.
▲ 탐라국 입춘굿 놀이 / 소리왓 공연
입춘굿 현장에서 펼쳐진 소리왓 공연 역시 봄을 알리는 소리로 가득했다. 소리왓의 대표 공연 <우리할망넨 영 살앗수다>는 제주민요의 원형을 되살려 백 년 전 제주사람들의 일상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아기가 태어나고 밭을 밟아 씨를 뿌리고, 여름 바다에 나가 그물을 던지는 평범하지만 아름다운 일상들. 그것을 바라보는 어르신의 눈엔 그리움이, 젊은 세대의 눈엔 동경이 가득 찼다.
소리에서 소리로 이어지는 세상을 꿈꾼다
사람이 태어나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이 소리다. 보고 먹는 것은 자연스레 이뤄지지만 소리를 듣고 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사람과 사람 사이 소통을 위해 소리가 반드시 필요하듯 우리 주변은 각기 다른 소리들로 둘러싸여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도 날마다 다른 소리를 내고, 우리는 낯선 소리 속에서 익숙한 소리를 어렵지 않게 구분해낸다. 그것은 소리가 전하는 특별한 세상이다.
▲ 민요를 배우는 소리나라 / 공연 연습 중인 소리나라 / 소리나라 공연 (우리할망넨 영 살앗수다) / 입춘굿에서 공연 하는 소리나라
소리왓은 더 특별한 소리 세상을 위해 어린이민요단 ‘소리나라’를 만들었다. 자그만 아이들이 전통 가락에 어깨춤을 추며 흥겨운 민요 한 자락을 선창하면 어른들이 추임새를 받아 후창을 한다. 어른과 아이가 얼싸안고 함께 노래하는, 세대에서 다음 그리고 그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소리 세상. 제주 민요패 소리왓이 어린이 민요단 소리나라와 함께 꿈꾸는 세상이다.
사진= 양혜영, 소리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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