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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하 Jan 01. 2021

운이 좋은 기업의 비밀


<2019년 불어 닥친 일본의 무역외란>

 지난 2019년 7월. 일본이 반도체 핵심 소재 3가지에 대해 수출 규제를 시작했다. 일본의 강제 징용 배상 판결에 대한 보복 차원이었다. 분통만 터트리고 있기엔 사태가 심각했다. 상당수의 첨단 소재를 일본에서 수입하고 있는 국내 기업들에 막대한 피해가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사건을 계기로 소재·부품·장비(이하 소부장)의 국산화가 시급하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정부는 소부장 기업을 전폭적으로 육성하는 로드맵을 세웠다. 관련 분야 강소기업 100곳을 선정해 R&D, 사업화 자금, 수출 등에 대해 대대적인 지원을 하기로 했다. 첫 프로젝트에 총 1,064개 기업이 신청했고 우선적으로 55개 사가 최종 선정됐다.

 하지만 정부가 아무리 막강한 지원을 한다한들 소재 부품이 어디 하루 이틀 만에 끌어올릴 수 있는 기술 분야인가? 그간 기초과학의 중요성을 등한시한 문화, 가마우지 경제라는 오명을 쓰고 있는 대한민국에 과연 대대적으로 지원할만한, 제대로 된 소부장 기업이 있기나 한 걸까? 이러한 의구심을 안고 55개사에 이름을 올린 소부장 기업들을 만났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P를 소개한다.
       


<수많은 실패와 성공을 반복하며>

 평범한 직장인이던 P. 갑자기 다니던 회사에 부도가 났다. 한순간에 일자리를 잃는 것도 두려웠지만 당시 회사의 기술이 사장되는 것이 너무 아까웠다. 해당 기술 바탕으로 2005년 창업에 뛰어들었다. P 대표의 회사는 에어베어링 스핀들을 주력으로 하는 스핀들 제조회사이다. 스핀들은 공작기계나 반도체 제조장비에 들어가는 핵심 부품으로 세계적으로 해당 기술을 보유한 나라는 일본, 독일, 미국 등 손에 꼽을 정도이다.

 관련 기술이 미비한 대한민국에서 창업을 하다보니 P창업 직후 온갖 어려움을 겪었다. 해당 기술과 실무 능력을 가진 엔지니어를 찾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궁여지책으로 선진 기술을 보유한 해외 전시회에 참가해 우수 기업들과 접촉하며 그들의 부품을 구입하고 기술 교류를 이어나갔다. 해외의 연구인력 박사들을 초청해 기술을 배워가며 전문 인력을 양성했다. 수많은 실패와 성공을 반복하면서도 기술에 대한 끊임없는 투자를 이어가다, 결국 P 업체는 스핀들을 사업화해 대량 양산하는 국내 최초의 회사가 되었다.   
 


<새로운 시장을 개척한 '역발상'>

 P 회사의 성장은 발상의 전환에서 비롯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에어베어링 스핀들은 PCV 홀가공용, 반도체 장비의 웨이퍼 가공용 등 일부에만 국한돼서 사용된다. 하지만 P의 경우 기존 에어베어링 전문기업들이 갖고 있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일반 산업군에 해당 기술을 적용시켜보고자 새롭게 시도했다.


 당시 국내 휴대폰 산업의 성장이 두드려졌다. 이를 눈여겨 보던 P는 IT 부품, 휴대폰의 메탈 가공이나 패널 디스플레이의 정밀 가공에 쓰일 수 있는 스핀들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IT 부품 관련 제품 개발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분야이다 보니 P 회사에서 세계 최초의 제품들이 계속해서 쏟아져 나왔다. 스마트폰이 대량 보급되면서 P 회사의 매출도 덩달아 치솟았다.



< “승승장구 할 때 위기를 직감했죠.” >

 회사는 탄탄대로를 걸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P는 위기의식을 느꼈다. ‘그다음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를 끊임없이 생각했다. 상승장이 있으면 하락장이 필연적으로 오기 마련이지만 일반적으로 성공에 취해 있을 때에는 앞을 내다보기 어렵다. 하지만 승승장구할 때 늘 위기를 생각했다는 P의 말에서 그의 성공 비결을 읽었다. P는 결국 기술력 있는 새 제품으로 승부해야 한다는 판단 아래, 회사가 성장하는 만큼 R&D에 과감히 투자했다. P 회사의 연간 R&D 투자액은 전체 매출액의 7~8%, R&D 인력은 전체 직원의 20%를 넘는다.  

 이러한 위기의식 속에 새로운 제품이 탄생했다. 스핀들은 크게 볼베어링과 에어베어링 스핀들로 나눌 수 있는데 볼베어링 스핀들은 중절삭에, 에어베어링 스핀들은 미세 절삭가공에 쓰인다. P 회사는 두 스핀들의 기능을 합쳐 하나의 스핀들을 제작했다. 설비 두 대에서 작업하던 것을 한 대에서 할 수 있으니 고객 입장에서는 무척 경제적인 제품이 탄생한 것이다. P는 해당 제품으로 새롭게 해외 시장을 개척했다. 수출 국가는, 일본이다.




<과연 운이 좋을까?>

 P는 운이 좋았다. 소부장 기업 육성이 시급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전폭적인 정부의 지원 정책에 올라탄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기술, 혁신적인 아이디어로 시장에서 환영받는 제품과 서비스 일지라도 정부의 정책에 반하는 기업은 성장을 지속하기 어렵다. 정부의 정책을 이길 시장은 없기 때문이다. (모빌리티 혁신 기업 ‘타다’가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일본의 수출 규제를 계기로 그 어느때보다 중소기업에 우호적인 환경과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대기업들이 소재 부품을 해외에만 의존하는 것이 얼마나 큰 리스크를 동반하는지 알게 된 것이다. 이번엔 일본이었지만 다음엔 어느 국가가 창을 겨눠올지 모를 일이다. 그간 중소기업은 어렵사리 기술개발에 성공해도 적절한 수요기업을 찾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다. 수요기업을 찾는다 한들 대기업의 단가 후려치기 등 불공정거래에 고전하다 결국 사업을 접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렇게 사장된 잠재 우수 기술들이 얼마나 많을지 가늠하기 어렵다. 이번 사태를 통해 대기업들 역시 기술력을 보유한 중소기업이 앞으로 공존해나가야 할 파트너로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이쯤에서 생각해 볼 문제가 있다. P 뿐만 아니라 내가 만난 기업가들은 하나같이 운이 좋았다. ‘정말 운이 좋았죠.’를 입에 달고 살았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운이 좋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는 단 하나다. 늘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때, 성공이 저 만치 멀리 있는 듯해 보일 때에도 기본을 지키며 묵묵히 실력을 키우고 있었다. 때문에 기회가 왔을 때 주저 없이 그 행운을 낚아챌 수 있었다. 그래서 그 운은 결코 운이 아니다.  

 기초과학을 무시하는 사회 전반의 문화, 대기업의 횡포, 정부의 무관심.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P와 같은 소부장 강소기업들은 꿋꿋이 기술 개발에 천착했다. 옹골찬 고집을 지키며 우직하게 나아가는 그들을 보며 기자와 취재원이 아니라, 사람 대 사람으로서 존경심을 느꼈다.

 준비된 그들에게 드디어 기회가 왔다. 이번 정부 지원을 발판으로 국내 강소기업들이 기술 선진국에 당당히 진입해 그들의 저력을 보여주길 바란다. K팝, K 드라마를 넘어 전 세계에 K테크의 위상을 드높이는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기를 간절히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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