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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쓸쓸 Dec 03. 2023

자가-세입자, 아파트-빌라 사이 너와 내가 만나는 방식

김혜진 소설 <너라는 생활>, <불과 나의 자서전>


재개발을 앞둔 3구역의 세입자로 살고 있는 ‘나’는 길고양이를 돌보는 과정에서 ‘너’와 친해진다. 재개발이 완성된 1구역에 사는 ‘너’에게서 나는 간극과 격차를 느끼지만,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는 다짐은 자꾸만 지켜지지 않는다. (「3구역, 1구역」) 레즈비언 커플인 ‘나’와 ‘너’는 ‘너’의 아는 언니를 집에 초대한다. 둘의 ‘특별한’ 사랑을 칭송하며 ‘나’의 불안정한 일자리를 걱정하던 언니는 ‘나’와 ‘너’가 사는 아파트 단지를 보자 난처해한다. “나는 두 사람이 이 아파트 이름을 자꾸 말하기에 부근인 줄 알았지. 여기인 줄은 몰랐네. 정말 생각도 못했네.” (「아는 언니」)


김혜진의 소설은 한국 사회의 가장 첨예한 문제 중 하나인 부동산 문제를 에둘러가지 않는다. ‘나’와 ‘너’ 사이에, 그리고 바깥에는 자가-세입자, 아파트-빌라, 재개발 전-후, 공공 장소 개발-사유지 개발 등의 복잡한 주거 문제가 연루되어 있다. 여기서 발생하는 간극과 격차는 ‘나’와 ‘너’, 다른 존재들 사이를 부단히 벌린다. 이 간극과 격차, 복잡다단한 각자의 상황이 겹쳐져, 김혜진의 소설 『너라는 생활』에서 많은 ‘너’들은 ‘나’에게 끊임없는 환멸을 일으킨다. 한 존재를 깊이 알수록 벗어나기 힘든 환멸, 내가 사랑했던 지점이 지독히 진절머리나는 지점으로 탈바꿈하는 환멸, 나 역시 잘 아는 환멸이다. 


분노는 방향을 틀고 너에게로 간다. (...) 너는 시시때때로 공과 사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사람이고, 일과 생활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드는 사람이고, 모두를 곤란하고 난처한 상황 속에 몰아넣는 사람이고, 같은 실수와 잘못을 반복하면서 거듭 우리의 생활을 위태롭게 만드는 사람이고. 그 순간엔 그런 식으로 너에 대한 원망과 미움을 부풀리는 데에 또다시 몰두하게 된다. 78쪽 「너라는 생활」


다쳤으면 어떻게 할 건데? 정말 다리라도 부러졌으면 어떻게 할 거냐고!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너를 자꾸만 몰아세우게 된다. 어떤 실수가 있었던 건 아닌지, 뭔가 놓친 건 아닌지, 부주의하고 허술한 너에 대한 의심이 끈질기게 되살아난다. 나는 오래전, 더 오래전 일들을 들먹이며 너를 다그친다. 이게 다 너 때문이다. 너에 대한 불신 때문이다. 네가 이렇게 불신을 키운 탓이다. 네 목소리가 커지고 내 목소리도 커진다. 130쪽 「동네 사람」


그러니까 그 순간 내가 확인한 건 아주 가까운 사람을 탓하는 네 오랜 버릇이 여전히 너에게 남아있다는 사실이었고 그것이 말할 수 없이 실망스러웠다. 164쪽 「우리는」 


가끔 궁금하다. 사람들은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에 대한 환멸을 어떻게 견디는 걸까? 아니 그저 견디기만 하는 걸까? 다른 방법은 없나? 「자정 무렵」의 ‘나’는 ‘너’와의 관계를 정리하겠다고 다짐하면서도 ‘너’와 내일, 모레, 주말에 해야할 일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느라 하고 싶은 말은 꺼낼 수가 없다. 그저 서로 얽혀있는 일상을 살면서 그것들이 나와 너를 이어오고 있음을 안다. 네가 없거나 내가 없으면 가능하지 않을 일들. 어쨌든 생활을 지속하기 위해 우리가 반복해왔던 일들. 좀처럼 바뀌거나 달라지지 않는 견고한 일상 속의 일들. 그러니까 그 순간엔 어디에나 있고, 누구나 가진, 특별할 것도, 특별하지도 않은 이런 것들이 우리를 지금껏 여기까지 끌고 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116쪽 「자정 무렵」)


사실 환멸은 ‘너’와는 상관없이 그저 내가 만들어낸 것이기도 하다. 나의 편협함, 나의 고집, 뭐 거기까지 가지 않아도 나의 인식 그 자체…. 『너라는 생활』의 '나'들은 '나'의 렌즈로 '너'를 굴절해 바라본다. 그 굴절의 효과를 짐작하는 독자들은 ‘나’의 환멸에 일방적인 구석이 있다는 걸 예감한다. 그런데 ‘나’들은 환멸에만 머물지 않는다. ‘너’의 그림자에 진저리치면서도 그 그림자에 찰싹 붙어있는 빛에 대해 생각하고, 너라는 사람에 대해 어떻게 해도 다 알 수가 없다는 진실에 대해 생각한다. ‘너’가 있는 곳을 “다시금 이끌리듯 바라본”(172쪽)다. ‘나’는 ‘너’를 환멸하다가도 어쩔 수 없이 너에게 이끌리고, 그 취약성 덕분에 “한번 뒤섞인 것들은 결코 이전처럼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229쪽  「팔복광장」)을 보여주는 존재다. 


철저하게 나의 시선으로 바라본, 만났다가 헤어진 많은 이들을 한명 한명 떠올리고 겹쳐보게 되는 독서였다. 





김혜진의 『불과 나의 자서전』은 『너라는 생활』보다 훨씬 뒷맛이 썼다. 『불과 나의 자서전』에서 드러나는 남일동과 중앙동을 둘러싼 부동산 문제가 첨예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문제가 『너라는 생활』의 ‘나’와 ‘너’ 2자 구도를 넘어 세대를 타고 흐르기 때문이다. ‘나’는 남일동에서 ‘나’를 키우며 “홍아, 너는 이 동네 애들과 달라.”(24쪽)라고 말하던 엄마의 마음(“그곳에서 어린 나를 키우는 것이 어머니에게는 내내 아슬아슬하고 조마조마한 일었다는 것” 24쪽)을 이해하면서도, 가까스로 중앙동으로 편입된 부모의 삶의 방식에 이물감을 느낀다. 


그러니까 내 부모는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내가 수없이 다짐하고 어렵게 감행했던 일들,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들, 사람들의 미움과 분노를 불러오는 일들. 그런 일들이라는 게 늘 뭔가를 바꾸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모두가 항복하듯 두 손을 들고 침묵하는 편에 서게 되는 이유가 있다고 말입니다. 젊은 날의 결기나 기개 같은 것들은 스러지기 마련이고 나 역시 예외가 아닐 거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당신들이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여긴 건지도 모릅니다. 42쪽


남일동으로 이사온 싱글맘 주해는 남일동을 감싸고 있는 무력감과 패배감에 주저앉지도, 남일동을 벗어나는 것에 혈안이 되어있지도 않다. 집앞 골목에 가로등을 설치해달라고 민원을 넣고, 마을버스 정류장을 만들어달라고 주민 서명을 받으러 다니고, 동네 벼룩시장을 연다. 그가 만들어내는 활력은 남일동 주민은 물론, ‘나’까지 조금씩 변화시킨다. 하지만 주해 역시 남일동에서 들려오는 재개발 소식에, 재개발이 되어 아파트에 살게 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믿기로 한다. ‘남민’(남일동에 사는 난민)이라고 주해의 딸 수아가 놀림받은 날, ‘나’가 문제제기를 하자고 하자 주해는 말한다. 


홍이씨, 내가 그 학교에 수아를 넣을 때 이런 일을 생각 안 했겠어요? 홍이 씨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나도 알아요. 그렇다고 내가 학교에 가서 따지면 나아질까요? 아뇨, 그랬다면 남일도니 남민이니 하는 말들도 처음부터 생겨나지 않았겠죠. 여기 개발되고 우리 아파트로 이사하면 나아질 거예요. 여기 남일동 일대가 달라지면 이런 일도 더는 없을 거고요. 

내가 무슨 말인가를 더 하려 하자 주해는 내 어깨를 다독거리며 말했습니다.

뭐가 옳고 뭐가 그른지 나도 몰라서 이러는 게 아니에요. 홍이 씨, 나도 홍이 씨처럼 수아 키우고 싶어요. 옳다, 그르다, 언제든지 그런 걸 따질 수 있는 사람으로 키우고 싶다고요. 

수아가 나처럼 키우고 싶다는 그 말의 의미를 나는 오래도록 알지 못했던 게 틀림없습니다. 그게 내가 아니라 내가 사는 중앙동을 염두에 둔 말이라는 것을, 그게 네가 남일동에 살았다고 해도 그렇게 모든 걸 명명백백하게 따질 수 있느냐는 질문이라는 것을, 나는 시간이 훨씬 더 지난 뒤에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139쪽


김건형의 해설처럼 “상승을 위한 운동은 필연적으로 누군가를 분할선 아래로 밀어내”고, 이렇게 분할선 이편과 저편을 가르려는 욕망은 세대를 넘어 흐른다. 가족이라는 사랑의 형태로. ‘나’는 그 욕망이 나의 부모에게서 나에게로, 주해에게서 수아에게로 흐르는 것을 지켜본다.


그러니까 그 순간 나는 남일동이 내 부모의 마음 깊숙이 드리웠던 감정을 떠올렸던 것입니다.

이곳을 떠나려는 사람이나, 남으려는 사람이나, 어쨌든 여기 사는 동안엔 안고, 견디고, 마주해야 하는 두려움의 감정을 새삼 상기하게 된 것입니다. 

오래전 어머니로 하여금 집 앞에 서서 멍하니 집을 올려다보게 만들었던 그 조마조마한 마음이 여전히 이곳에 남아 있다는 것을. 여기 사는 한 그런 마음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그런 것들은 저절로 사라지거나 없어지지 않고, 끝없이 누군가에게 옮아가고 번지며, 마침내 세대를 건너 대물림되고 또 대물림될 거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126쪽


‘나’는 이 모든 것을 외면하지 않고 응시한다. 응시만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인 것처럼. 이 책을 읽으며 때때로 책을 덮고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그러지 않았던 것은 ‘나’의 이 응시가 갖는 어떤 가능성 때문이었을 거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재개발이 만들어내는 마음들을, 그것에 휘둘리며 자라온 ‘나’의 내력까지 냉철하게 정면으로 보는 실감”(해설), 이것이 “자기 응시를 통해 혐오를 비추는 불빛. 그 빛이 영웅 없는 이 소설의 패배가 만들어내는 뜨거운 눈빛”(해설)이라는 해설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 해설의 제목은 “혐오 경제의 가계도와 재개발의 감정학”이다. 


그래서 소설은 “안타까움과 미안함” 같은 공동체에 대한 낭만적 향수로도, “후회와 죄책감” 같은 윤리적 성찰로도 비약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곳에 서 있는 동안 내가 느낀 건 그런 실감”(12쪽)이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재개발이 만들어내는 마음들을, 그것에 휘둘리며 자라온 ‘나’의 내력까지 냉철하게 정면으로 보는 실감을 갖고자 한다. 자기 응시를 통해 혐오를 비추는 불빛. 그 빛이 영웅 없는 이 소설의 패배가 만들어내는 뜨거운 눈빛이다. 해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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