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라는 이상한 세계" 출판 뒷얘기1
정희진과 비비언 고닉의 문장에 기대어
책을 쓰는 이들이라면, 책을 쓰는 과정에서 이정표로 삼은 문장이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내게도 그런 문장이 있다.
"자기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경험을 쓰는 것이 아니다. 경험에 대한 해석, 생각, 고통에 대한 사유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정희진, <나를 알기 위해 쓴다> 중에서
정희진 선생의 이 문장을 글을 쓰면서 막힐 때마다 곱씹었다. 정희진 선생이 글쓰기를 ‘경험에 대한 해석, 생각, 고통에 대한 사유를 멈추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면, 비비언 고닉은 이렇게 말한다.
"회고록 속의 진실은 실제 사건의 나열로 얻어지지 않는다. 작가가 당면한 경험을 마주하려 열심히 노력하고 있음을 독자가 믿게 될 때 진실이 얻어진다. 작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는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작가가 그 일을 큰 틀에서 이해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비비언 고닉, <상황과 이야기> 중에서
비비언 고닉은 이러한 일을 해내는 ‘서술자’에 대해 강조한다. <상황과 이야기>를 읽으며 서술자에 대해 나는 이렇게 이해했다. 상황을 ‘겪는’ 것이 나라면, 이 상황을 ‘해석하는’ 것은 서술자라고. 서술자는 “경험은 원료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존재, “끊임없이 빠져드는 사건의 너저분한 흐름을 명확한 형태로 빚어내”려는 존재, "우리의 여정을 함께 하고, 글을 완성시키고, 우리의 시야를 전보다 넓혀주리라 믿을 수 있는" 존재, “힘겨운 경험을 할 때조차 그 순간을 더 넓은 시야로 이해하고자 하는 공통된 욕구가 우리 모두의 내면에 살아 숨쉬고 있음을” 보여주는 존재다.
나는 나의 경험을 쓰고 싶었다. 엄마가 된 후의 경험에 대해서. 하지만 그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나의 경험을 열렬히 해석하고 싶었다. 해석은 언제나 이야기의 한 면만을 담을 뿐이라 해도, 자신의 한계 내에서나마 가장 올바르고 사려 깊은 방식으로 그걸 해내고 싶었다. 그게 세상에 나의 이야기를 내놓으려는 자의 책무라고 여겼다. (해석보다는 상황을 묘사하는 방식으로 글을 쓰는 경우도 많지만, 그렇더라도 저자 스스로는 해석의 키를 쥐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발달을 자극하면서도,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라고?
나는 무엇을 그렇게나 해석하고 싶었던 걸까? 아이를 낳고 가장 크게 느낀 감정은 죄책감. 맘카페 회원들은 “자책하지 마세요. 당신은 이미 좋은 엄마랍니다.”라는 복붙한 듯한 댓글을 주고 받았고, 엄마 아빠는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는 것에 감사하며 살아라”라고 말했다. 상담 선생님은 내가 죄책감에 취약한 것은 어린 시절 겪은 상처의 영향이니, 내면 아이를 다독여주라고 말했다.
내가 느낀 죄책감에 대한 다른 해석이 필요했다. 그 해석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엄마를 향한 사회적 비난이 얼마나 광범위하고 뿌리 깊은지 확인할 수 있었다. 엄마의 죄책감은 그 비난이 내면화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도. 나로서는 오랜 시간 헤매어 간신히 찾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모성 이데올로기라는 깔대기로 급격히 수렴되는 이야기였고, 그것으로 끝내기에는 나의 해석을 기다리는 또다른 이야기들이 있었다.
육아 초기, 아이의 발달 자극을 위한 교육 노동에 매진하던 시기가 있었다.
“아이가 보는 앞에서 작은 장난감을 컵으로 덮고 감추면, 컵을 열어 장난감을 찾는다.”
아이는 이 과제를 수행할 수 있는 개월 수가 되었지만, 아직 컵을 여는 동작을 하지 못했다. 그래, 오늘은 꼭 이 과제를 연습시켜봐야지. 아이가 유아 식탁에 앉아 있을 때, 아이가 좋아하는 쌀과자를 보여주곤 재빨리 컵으로 덮었다.
“어? 쌀과자가 어디 갔지? 쌀과자가 어디로 갔을까?”
아이는 쌀과자가 눈앞에서 사라지자 울음을 터트렸다. 나는 컵을 흔들어 딸각딸각 소리를 냈다.
“무슨 소리가 나는데…… 쌀과자가 이 안에 있나?”
아이는 계속 울다 쌀과자가 컵 사이로 삐져나온 틈을 놓치지 않고 쌀과자를 낚아챘다. 다음날, 또다시 쌀과자를 컵으로 덮자, 아이는 반응조차 하지 않았다. 컵을 보여주든, 흔들든 말든 관심 없었다. (...)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는 까만 눈동자 앞에서 막막함을 느꼈다. 나의 열의가 가닿지도, 말이 통하지도 않는 이 작은 생명체에게 무얼 가르친단 말인가. 이설기, <엄마라는 이상한 세계> 29쪽
나는 이 시기를 잊고 싶었다. 일어나지 않았던 일인 것처럼 지워버리고 싶었다. 아이를 낳으면 누구보다 아이를 있는 그대로 존중해줄 자신이 있었는데! 하지만 그 시기 역시 나의 삶을 이루고 있고, 육아를 괴롭게 만든 결정적 원인이기도 했다. 내가 큰 좌절감을 느꼈던 시기를 외면하지 말고 더 적극적으로 해석해보고 싶었다. 처음에는 '발달 자극을 위한 교육노동이 그 자체로 고되다는 것에만 집중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라, 그러한 노동이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한다는 또다른 혼란과 죄책감을 낳는다는 것이었다. 발달장애아의 부모가 아이를 위해 열심히 재활치료를 다니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이를 너무 힘들게 하는 게 아닐까 걱정하듯이.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나는 그것을 ‘공감하는 엄마가 되라’는 명령(2장)으로 이름 붙였다. 아이에게 화내지 말라는 아동 인권 담론, 오은영식의 공감 육아법, 자연 속에서 아이의 리듬과 속도를 존중하는 자연주의 육아법 등이 큰 틀에서는 모두 이 카테고리에 들어갔다. 세부적으로는 다르지만 결국엔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공감’이라는 키워드로 묶을 수 있었던 것이다. (요런 키워드로 묶은 후에 좀 많이 뿌듯했다!) 이 키워드는 ‘발달을 자극하라’는 명령(1장)과는 정확히 반대지점에 서있으면서도, 최근 십여년간 육아법의 대세로 유행해왔다. 그런데 의도적 목표를 향해 발달을 자극하면서도, 아이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며 공감하는 일이 과연 가능한가? 애초에 실현 불가능한 상호 모순된 과제가 아닌가?
얼핏 생각할 때 ‘발달을 자극하라’는 명령은 신자유주의적인 것이고, ‘공감하는 엄마가 되라’는 명령은 양육의 본질에 가까워 보인다. 그래서 발달 자극을 지양하고 공감하는 엄마로 돌아가 아이를 있는 그대로 존중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빠지기 쉽다. 하지만 꼭 그럴까? <어머니의 신화>를 읽으며, 미국에서 ‘자비로운 어머니상’이 떠오른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의 후유증으로 인한 사회적 필요 때문이었다는 걸 알게 됐다. 의도적 목표를 세우고 실행하는 과학적 모성도, 이와 반대되는 자비로운 모성도, 시대의 필요에 따라 강조된 것일 뿐이라는 거다.
내가 느낀 혼란과 죄책감을 해석해가는 과정은 이토록 짜릿했고, 그 짜릿함을 느낀 이상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