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계간지 민들레 2024년 가을호(153호)에 실은 글입니다.
아이의 두 눈이 빛날 때
여덟 살 민서가 놀러왔다. 민서는 내 초등학교 친구의 딸이다. 초등학생 시절 나와 친구가 서로의 집에서 자주 시간을 보냈던 것처럼, 한 살 터울인 나의 아이와 민서도 서로의 집을 오가며 논다. 오늘 두 아이는 식탁 밑에 아지트를 꾸미느라 바쁘다. 안방에 있는 이불을 끌고 와 식탁 밑에 펼치고, 창고에서 이불을 더 꺼내와 식탁 위를 덮었다. 커튼이 쳐진 작은 집 같다. 소꿉놀이 장난감을 식탁 안으로 가져와 밥을 하네, 반찬을 하네, 난리법석을 떤다. 통에 모아둔 구슬이 사탕이라더니 이제는 약이란다. 식탁 밑 아지트는 별안간 병원이 됐다. 둘은 종이를 잘라 약봉지와 처방전을 가득 만들고는, 키득대며 나를 부른다. “이설기 환자분, 들어오세요!”
둘은 빨대 청진기로 나를 진찰하더니 ‘배에 빵꾸가 뚫렸다’는 진단을 내린다. 밥을 잘 먹어야 한다며 식판에 장난감을 내오고, 밥 먹고 30분 후에 먹으라며 약도 준다. 진단명은 갈수록 추가되었다. 열이 30도 가까이(?) 나고 있으며 다리가 부러졌고 머리에 염증이 생겼단다. 병원 놀이가 시들해지자, 둘은 바닥에 엎드려 각자 그림을 그린다. 간만에 조용한 시간. 민서는 주위를 독서실처럼 꾸미고는 시를 쓴다며 종이에 뭔가 적기 시작한다. 한글을 모르는 나의 아이도 지렁이인지, 고대 이집트의 상형 문자인지, 암튼 뭔가를 끄적인다. 각자 쓴 걸 서로 주고받고, 또 주고받는다.
놀았던 것 좀 치우라고, 엄마 찾지 말고 둘이 놀라고 타박도 하지만 나는 아이의 놀이를 지켜보는 시간이 좋다. ‘식탁 밑 아지트’ 같은 무용한 것을 만들기 위해 몰입할 때, 스스로 만든 작은 세계를 바라보며 뿌듯해할 때, ‘뭐 또 재미있는 거 없을까’ 궁리하느라 두 눈이 빛날 때, 내게도 아이의 생기가 전달되는 것 같다.
‘엄마표 ○○’이라는 이상한 세계
하지만 이런 놀이의 장면은 우리 사회에서 오래 지속되기 힘들다. 아동학자들은 놀이의 조건으로 무목적성, 자발성, 아동 주도성을 든다. 아동 스스로 내부적 목적과 내적 동기를 가지고 자발적으로 놀이의 시작과 끝을 정할 수 있을 때, 그것이 '놀이'라는 것이다. 이 정의에 따르면 외부적 목적과 그 목적을 위해 계획된 일련의 과정들은 놀이라고 보기 어렵다.
인터넷에 ‘놀이’를 검색하면 일상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활용한 ‘엄마표 놀이’ 정보가 넘쳐난다. 쌀이나 미역, 두부 등으로 하는 촉감 놀이, 밀가루 반죽 놀이, 쌀이나 콩 등을 활용한 마라카스 만들기 놀이…. 이런 놀이로 대근육·소근육·인지 발달을 촉진하고 엄마와의 애착을 효과적으로 형성해 아이가 정서적 안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나도 해봤다. 엄마표 놀이. 아이와 할 만한 놀이를 인터넷에서 검색하고, 문방구나 마트에 가서 필요한 재료를 구입하고, 아이가 호응할 만한 타이밍을 잡아 실행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발달 촉진이라는 목적을 감추기 위해서는, 발달 촉진 활동을 ‘놀이인 듯’ 보이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정작 아이는 시큰둥했다. 의도를 알아채고 급격히 흥미를 잃은 듯한 검은 눈동자 앞에서 나도 모르게 화가 났다. ‘내가 어떻게 준비했는데!’
아이가 자라는 과정에서 ‘엄마표 ○○’은 끝이 없다. 20여 년 전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엄마표 영어’는 사교육 기관이 아닌 가정에서 자연스러운 노출을 통한 영어 습득을 목표로 한다. 하지만 자녀의 흥미와 영어 콘텐츠의 자연스러운 노출을 강조하는 엄마표 영어에도 엄연한 프로그램이 있다. 자녀의 단계에 맞춰 영어 원서와 DVD를 구비하고, ‘집중 듣기’를 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흘려 듣기’를 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영어 음원을 틀고, 이를 실천할 수 있는 루틴을 만들고…. 놀이의 목적을 가지되 목적을 감춘 엄마표 놀이처럼, 자녀의 영어 선생님이되 영어 선생님임을 감춘 엄마표 영어의 세계는 ‘외부적 목적을 들키지 않고 얼마나 자연스럽게 감추는가’의 싸움이 된다. 이 싸움에서 아이의 자발성이 발휘되기는 쉽지 않다.
최근 들어서는 ‘엄마표 코칭’도 유행이다. 코칭이 스스로 답을 찾아갈 수 있게 돕는 과정이라며 아이의 자기주도성을 더욱 강조한다. 그러나 엄마표 코칭 역시 학습‧독서‧진로 등의 분야에서 (구체적인 목표는 아이 스스로 정한다고 할지라도) 바람직한 성장의 방향을 전제하고 지도한다는 점에서 다른 엄마표 ○○과 큰 차이가 없다.
‘그러니까 왜 그걸 엄마가 해야 하는데?’라는 질문에 답하지 않은 채 엄마표 ○○은 자녀가 사회적 지위를 확보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엄마의 역할이라는 성별 이분법 강화, 일자리 경쟁 심화, 효율성‧계산 가능성‧예측 가능성‧통제의 원리가 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맥도날드화’ 현상(조지 리처,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 등과 뒤엉켜 육아 문화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엄마표 ○○이 유행하고 자녀교육이 과열되는 현상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아이 곁을 맴도는 ‘헬리콥터 부모’나 ‘드론 부모’, 아이 주변의 잡초를 제거해주는 ‘잔디깎이 부모’ 등의 신조어는 이러한 과잉양육이 자녀의 자기주도성을 억압하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자녀를 성공적인 사회인으로 만들기 위해 애쓰는 이러한 양육 방식이 정작 성공적인 사회인의 필수요소인 자기주도성을 위협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육아서가 과잉양육을 질타하며, 부모의 자성을 촉구한다. 스탠포드대학교에서 학생 지도‧상담을 담당했던 줄리 리스콧-헤임스가 쓴 책의 한국어판 제목 『헬리콥터 부모가 자녀를 망친다』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자기주도성, 그게 뭔데?
지금과 같은 양육 환경에서 아이의 자기주도성이 꽃피기 어렵다는 것은 명확하다. 앞서 언급한 조지 리처와 줄리 리스콧-헤임스부터 『도둑맞은 집중력』의 저자 요한 하리에 이르기까지, 여러 연구자들이 충분한 놀이와 몰입, 체계적인 계획과 관계없는 자유시간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나 역시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놀이의 장면이 ‘진정한’ 자기주도성을 살리는 길이라고 주장하며 글을 마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하지만 많은 경우 부모의 문제(과잉보호, 지나친 교육열, 아동 방치…)는 세계의 문제(아동 대상 사건 사고의 증가, 일자리 경쟁 심화, 사회안전망의 부재…)이기도 하며, 육아 전문가가 자주 저지르는 실수는 세계의 문제를 부모의 문제로 섣부르게 환원하는 것 아닌가. 나는 세계의 문제를 부모의 문제로 환원하는 쉬운 길을 택하기보다는, 애초에 자기주도성이라는 개념에 실패가 예정되어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먼저 꿈틀대는 물음은 이거다. 자기주도성, 그게 대체 뭔데? 자기주도성이라는 단어에는 4차 산업혁명, 인공지능(AI) 시대, 창의융합형 인재 등의 단어가 비엔나소시지처럼 줄줄이 따라온다. 이 단어들은 내 아이도 스티브 잡스나 일론 머스크처럼 키울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게 하지만 그 뒷면에서는 신자유주의의 냉혹한 냄새를 풍긴다. 신자유주의는 교육이나 보건, 복지 등 사회의 모든 영역을 기업화(enterprising)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주체를 기업가적 주체(entrepreneur) 혹은 기업가적 정신(entrepreneurial spirit)에 따라 살아가도록 한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개인은 시장 원리와 경쟁 논리를 내면화해 스스로를 인적 자본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자기 자신의 기업가가 되어야 한다. 많은 연구자들이 지적하듯이 오늘날 교육 분야에서 자기주도성이 강조되는 흐름에는 획일적 교육이나 입시위주 교육에 대한 문제의식만이 아니라, 구조적 안전망 대신 개인의 책무성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적 시대 정신이 흐르고 있다.
학교현장에 기업가 정신(Entrepreneurship)을 교육하는 곳이 늘어나고 대학마다 창업 동아리가 활발하게 활동하지만, 창의와 혁신으로 무장한 ‘나-주식회사의 CEO’로 살아가는 일은 쉽지 않다. 한 스타트업 전문가는 창업의 가장 중요한 자질이 ‘문제와 사랑에 빠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나도 이런 자질을 가진 사람을 여럿 알고 있다. 문제와 사랑에 빠져버린 사람,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쉽게 포기하지 않는 사람, 식사를 거르고 밤을 새워서라도 길을 찾아가는 사람, ‘안 되면 되게 하라’고 말하는 사람…. 이런 사람은 사회에 필요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살 수는 없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
학군지 아이들이 순하다는 말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우리 사회는 자기주도성을 이상적인 가치로 추앙하지만, 이 자기주도성은 제한된 범위 내에서만 통용된다. 전면화된 시장 원리와 경쟁 논리에 의해 구조화된 가능성 안에서의 자기주도성, 그러니까 많은 돈을 벌거나 공공의 변화를 이루는 등의 가시적인 성과가 있는 자기주도성만 환영받을 수 있는 것이다. 명문대를 휴학하고 오지로 떠난 스토리를 바탕으로 유튜버가 되거나 대기업을 때려치우고 스타트업을 세우는 자기주도성은 상상할 수 있지만, 자기만의 스토리를 브랜딩하는 것을 거부하거나 중소기업의 성실한 평사원으로 살아가기를 선택하는 자기주도성은 상상하지 못한다.
양육자들이 여전히 자녀 주위를 빙빙 돌기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 역시, 사회에서 떠드는 자기주도성이 제한된 범위 내에서 통용되는 개념이라는 걸 간파해서는 아닐까? 오늘날 육아 문화는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자기주도적 인재를 키우라고 양육자를 닦달하면서도, ‘학군지 아이들이 순하다’는 말로 부모 말에 순종적이며 큰 사건 사고를 일으키지 않는 중산층 아이들을 예찬한다. 양육자들 역시 이유식 단계에서 아이 스스로 손으로 집어먹을 수 있도록 ‘아이주도 이유식’을 준비하고 자녀의 자율성을 존중하기 위해 저녁 식사 메뉴를 무엇으로 할지 여름 휴가는 어디로 갈지 등에 선택권을 주지만, 엄마표 ○○의 프로그램에 아이를 몰아넣은 채 자유로운 놀이 시간은 충분히 허용하지 않는다.
자녀가 ‘남들과 다른’ 자기주도적 인재가 되기를 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학군지에서 순하게’ 자라기를 원하는 양육자들의 욕망은 모순적으로 보이지만, 그렇지 않기도 하다. 국가와 자본이 요구하는 자기주도성은 키우되 이에 예속되지 않는 자기주도성, 지배 질서에 의문을 던지고 현실에 대해 새로운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기주도성은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나름의 일관성(?)을 가지고 있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자기주도성이라는 개념은 자기계발, 기업가 정신, 퍼스널 브랜딩, 1인 브랜드 등의 단어로 끝없이 확장되고 있으나, 동시에 이 개념은 해방적 잠재력과 자유의 측면을 억압하는 방식으로 축소되고 있다. 그 결과 양육자들은 잔뜩 부풀려지고 또 쪼그라진 자기주도성을 좇느라 우왕좌왕하고, 아이들은 자기주도적으로 부모와 사회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오늘도 바쁜 일과를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