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은 진보적으로 쓰면서, 막상 남편한테는 너무 좋은 아내 아니에요?”
어느 술자리, 지인이 말했다. 연년생 아이 둘을 키우며 부부 관계가 나락을 향하고 있다는 한 지인의 고백 뒤였다. 나에게는 남편과의 관계가 어떠냐고 물었다. (술자리 당시 시점으로) 관심사가 아니었기에 할 말이 별로 없었다. ‘주말부부라는 게 시간이 갈수록 좋은 조건이 되었고, 주중에는 내가 주말에는 그가 육아를 하는 패턴에 익숙해지고 있다. 사실 그에게 별 관심이 없으며 내 삶을 사는 것에 바쁘기에 요새 거의 싸우지 않는다.’ 이런 이야기를 드문드문했던 것 같다.
육아의 한복판에서 남편과 가열차게 싸울 무렵, 나는 "공략하기보다 낙후시켜라"라는 말을 금과옥조처럼 받들었다.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혼자 애쓰는 일을 그만두자, 내가 타인인 그를 개조하거나 교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자, 다만 그를 변화시키려는 그 에너지를 나 자신을 위해 쓰자, 당시 함께 공부하던 매실이 강조하고 또 강조하던 말이기도 했다. 셋이 단란한 시간을 보내는 대신 육아 바톤을 넘기고 카페에 갔고, 남편과 가정을 챙길 에너지를 읽고 쓰는 데 썼다. 남편이라는 존재에 더는 크게 휘청이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는 게 내가 만들어낸 변화였고 일말의 자부심이었다. 그런데 지인이 생각하기에 남편 입장에서 내가 너무 좋은 아내인 이유는 이랬다. ‘그에게 별 관심이 없으며’, ‘내 삶을 사는 것에 바쁜’ 조건이야말로 남편 입장에서는 최고라는 거다.
남편에 대한 관심을 끄려는 전략은 어떤 면에서는 그와 ‘잘 살기 위한’ 것이었고 실제로 효과가 있었다. 나는 그에게 라면 좀 그만 먹으라고, 후줄근한 옷 좀 버리라고 잔소리하지 않았고 그에게 육아메이트 이상의 노동(기념일 챙기기, 둘만의 데이트 등)을 요구하지 않았으며 집중육아기를 거치면서도 다시 야금야금 사회생활이란 걸 시작하는 아내였다. 내가 나의 공간을 만들어내기 위해 애써왔던 것들이 실은 그에게 너무 편리했던 게 아닐까, 잘해왔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 실패가 아니었을까, 정신이 아득해졌다. 물론 나는 내 글이 딱히 진보적이라거나/이어야 한다거나 내 삶이 투사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인의 말은 아프게 다가왔는데, 내가 남편과의 관계에서 ‘착한’ 부분이 있다는 걸 나 역시 어느 정도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궁금했다. 내가 남편에게 크게 관심을 두지 않으면, 남편과의 관계유지를 위한 감정노동에 애쓰지 않으면, 그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역할을 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여성이 그 노동을 그만두는 순간 대부분의 관계가 끝난다던 정희진의 문장은 사실일까. 우리 사이가 여성인 나의 헌신과 배려로 지탱되는 그토록 허약한 관계라면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내게 일어난 일은 약간 달랐다. 내가 과거처럼 그에게 관심을 갖지 않자 그가 먼저 내게 다가왔고 말을 물어왔다. 그에게 나는 삶을 나눌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친구였다. 나는 그가 관계를 위한 노동을 감당하고 있음에 고마웠고, 동시에 그가 나를 원하고 있음에 안도했다. 그 안도는 ‘내가 그를 사랑하느냐’가 아니라 ‘그가 나를 원하느냐’가 더 중요하고 “남성에게 절실히 필요한 존재가 됨으로써” 권력에 접근하고자 하는 여성의 감각에서 온 것이었으리라.
"그녀가 남편을 다시 선택하는 기준은 ‘내가 남편을 얼마나 사랑하느냐’가 아니라 ‘남편이 나를 얼마나 원하느냐’이다. (...)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이 권력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남성에게 절실히 필요한 존재가 됨으로써 그가 가진 권력을 공유하는 것이다. 여성은 남성이 자신을 원할수록 권력을 느끼는데, 이때 여성의 욕망은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위해 소진되는 것이다." 정희진, 《아주 친밀한 폭력》, 169쪽
남편과의 관계유지를 위한 감정노동에 애쓰지 않겠다는 것은 남편을 불쌍히 여기는 것을 그만둔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엄마는 "조서방도 멀리서 오가느라 힘들겠다"며 늙어가는 자신이 아닌 사위를 걱정하고, 아이의 어린이집 원장님은 "남자는 칭찬을 많이 해줘야 한다"며 엄마들에게 조언을 건넸다. 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남성과 잘 지내는 비결은 남성을 불쌍히 여기고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 것이라는 걸. 남성이 원하는 관계 맺기 방식이 바로 그런 거라는 걸. 이런 (온우주적인) 걱정과 위로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도 ‘나는 힘들게 살고 있다’고 스스로를 연민하는 남편이 괘씸했다. 남편은 자주 일이 힘들다고 토로했지만, 그는 비교적 워라밸이 좋은 직장에 다니고 있으며 가족이 아니더라도 자기 자신을 부양하기 위해서 일을 계속했을 것이다. 그가 직장에 다닌다고 해서 불쌍히 여길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를 위로하고 격려할 때라야 나의 이야기가 그에게 비로소 들린다는 것, ‘평화로운’ 일상이 가능하다는 것을 나 역시 경험적으로 안다. 여성이 기를 살려줘야 하는 남성성의 실체가 무엇일까 반문하면서도, 때때로 그와 육아 바톤을 넘길 때면 ‘고마워’와 ‘고생했어’, ‘다음엔 더 일찍 와’ 등의 말 사이에서 고민했다. 물론 나 혼자 고민할 뿐 남편은 아무 생각이 없다. 또다른 문제가 있는데, 가족을 위해 꿈을 포기한 고독한 생계부양자가 아니더라도 한국 사회에서 1인분의 노동자로 살아가는 것은 그 자체로 고되다. 누구나 자기 생을 마주하고 자기 밥벌이하며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다. 나는 우리 관계가 ‘가족의 행복’이라 쓰고 ‘자녀의 성공’이라 읽는 공통의 목표를 위해 희생하고 있다는 끈적함이 아니길 바랐지만 산뜻하기만 한 관계가 세상에 있을까. 생계부양자 남성을 향한 연민이 아니더라도 인간으로서의 연민이 남았고, 그 연민과 이 연민은 어떻게 다른지 자주 헷갈렸다.
‘아내 폭력’을 다룬 정희진의 《아주 친밀한 폭력》은 가부장제 사회의 여성의 성 역할이 어떻게 폭력으로 이어지는지를 다룬 책이다. 정희진의 핵심적인 문제의식은 "여성의 가족 내 성 역할 수행이 여성의 인권보다 우선시되면서 어머니, 아내로서의 '도리'는 인간의 기본권인 '맞지 않을 권리'를 유보하거나 사소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의 6장은 아내가 가족 유지를 위해 폭력에 어떻게 대응하는지 보여주는데, 폭력을 피하기 위해서 완벽한 아내가 되고자 노력하고 애교와 모성성, 섹슈얼리티 등을 동원한 보살핌 노동을 수행하기도 한다. 또한 스스로를 남편을 변화시킬 해결사로 인식하며, 자신이 아니라 자신을 구타하는 남편을 불쌍히 여긴다. "맞은 나보다 남편이 더 안되었다, 당하는 나보다 저 사람은 얼마나 힘들까?" "여자 없이 사는 남편이 불쌍해서 그래서 견딘 거지요." 누가 누구를 불쌍히 여기나 싶어 말문이 턱 막히지만, 이들이 가해자 남성을 불쌍히 여기는 것은 그것이 자신의 성역할이며 그를 통해 “가부장제 사회에서 인정받고 그나마 권력을 지닌” 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아내는 폭력 상황 ‘지금 여기’에 있는 존재가 아니다. 아내는 폭력 상황에서 최우선으로 배려받아야 할 사람으로서 자신을 잊고 상황을 초월한 사람이 된다. ‘배려의 화신’인 폭력당하는 아내는 정작 자신은 배려하는 대상에서 제외한다. 그래서 자신은 생명을 위협당하는 폭력에 시달리면서도 가해자에게 연민의 감정을 느낀다. 이들이 폭력에 적응하기 위해 선택한 극도의 자제, 자기 조절, 자기 비판, 자기 처벌의 심리는 남편을 위해 자신을 희생물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자신을 학대 상황에 방치함으로써 ‘행복’해지려는 심리는 가부장제를 내면화한 허위의식이 아니라 그것을 진짜 자신의 역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내는 고통받을수록 도덕적으로 우월한 존재가 된다. 이것이 그녀의 역할이다. 이러한 역할 수행을 통해 그녀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인정받고 그나마 ‘권력’을 지닌다. 흔히 남성의 ‘이기적인 출세욕’ 같은 권력 의지와 ‘권력 지향적이지 않은 순수한’ 여성의 이타적인 헌신은 대립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이것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성별에 따라 다른 권력 의지일 뿐이다. (...) 폭력당하는 여성들의 보살핌, 희생, 배려를 통한 남편 구원은 간접적인 방식의 타인에 대한 통제이다." 정희진, 《아주 친밀한 폭력》, 195-196쪽
나에게 주어진 성역할은 굉장히 구체적인 목록들을 지니고 있었다. 그 목록에는 고통이나 폭력 앞에서 남성보다 더 인내심을 가지기, 가족 유지의 책임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아이처럼 애교를 부리고 엄마처럼 보살피기, 그 모든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자신보다 상대방을 불쌍히 여기기... 등등이 있다. 결혼 제도 안에서 관계맺기 방식이 촘촘히 성별화되어 있고 나 역시 여기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 그래서 아내 폭력의 피해자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와 멀지 않다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며 소름 끼치게 확인했다. 여성주의자는 “‘당사자(actor)’로서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라는 이 책의 서문을 완전히 이해하게 되었다는 건, 좋은 일일까 나쁜 일일까.
여성주의자는 되는 것이 아니다. 타인의 고통을 목격한 사람, 그 고통에 공감하고자 하는 사람, 피해자/운동가/연구자의 차이와 위계를 넘어 ‘당사자(actor)’로서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다.
정희진, <아주 친밀한 폭력> 서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