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고 질 좋은 코트를 사고 싶다
매일 출퇴근할 곳이 없어진 후 겨울은 줄곧 패딩의 차지였다. 아이 어린이집, 동네 마트, 동네 뒷산, 엄마 집 등 내가 자주 다니는 동선에서 만나는 여자들도 패딩을 입었다. 그것도 검은색, 회색, 짙은 갈색의 패딩들이다. 코트에 비해 가볍고 따뜻한 (게다가 어두운 색이라 때 타도 티 안나는) 패딩을 걸치고, 여자들은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데리고 오고 마트에 다닌다.
얼마 전 옷을 갖추어 입어야 하는 일정이 있었다. 회색 롱코트와 검은색 모직 바지를 꺼냈다. 아이 낳기 전에 샀지만 좀처럼 입을 일이 없어 장롱에 잠들어 있던 것들이다. 후드 코트의 후드를 떼고 후드 단추가 있는 자리에 머플러를 둘렀다. 화장실 거울에 내 모습을 비춰보았다. 아침을 먹던 아이가 조르르 달려와 물었다. “엄마, 어디 가?” 국회의사당역에 내려 걷는 길, 나와 같은 방향을 향해 걷는 여자들 모두 코트를 입고 있다. 회색 알파카코트, 카멜색 롱코트, 헤링본 울코트... 그렇다, 나는 코트를 관찰하고 있었다.
일정 후에 ‘불편한’ 식사 자리가 이어졌다. 상대방을 추켜세워주면서도 적절한 시점에 자신의 이력이나 식견을 어필해야 하는 자리, 그 어필이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아야 하는 자리, 공통의 화제를 찾아 스몰 토크를 이어가면서 ‘화기애매함’을 견뎌야 하는 자리. 묵묵히 오리 고기만 집어먹던 나는 맞은편에 앉은 ‘학부모’ 자격으로 오신 여성분이 염려되었다. 그 분 역시 나처럼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부대낌을 느끼지는 않을까, 기우였다. 그분은 이야기에 적절하게 호응하고 필요한 시점에 자신에게 필요한 주제로 이야기를 끌어오는 것에 유능한 분이었다. 그분은 두 자녀의 어머니일 뿐 아니라 자신의 직업이 있는 분이었고 질 좋은 코트를 입고 있었다. 그렇다, 나는 그 시점에도 코트를 관찰하고 있었다.
드라마 <작은 아씨들>의 유명한 장면. 김고은은 말한다. “겨울 코트. 가난은 겨울옷으로 티가 나요. 여름엔 그럭저럭 남들 비슷하게 입을 수 있는데 겨울옷은 너무 비싸니까요.” 내가 가난하다고 말할 수는 없으므로, 내게 겨울 코트는 가난의 문제라기보다 ‘사회생활’을 하느냐, 즉 매일 출퇴근할 곳이 있느냐, 그리고 나 자신만을 위해 선뜻 돈을 쓸 수 있느냐의 문제다. 내가 그동안 코트를 사지 않은 이유다.
이제 나는 패딩의 세계에 살면서 가끔 코트의 세계를 오간다. 나뿐 아니라 많은 이들이 패딩의 세계와 코트의 세계를 오가며 살 것이다. 두 세계 사이에서 크고 작은 분열을 겪으며. 이 분열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2020년 류호정 전 정의당 의원은 어두운 색 정장과 넥타이가 가득한 국회 본회의장에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등장했다. 청년 여성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지우지 않은 채로 코트의 세계에 진입하는 방식이었다. (류호정 의원은 2003년 백바지를 입고 본회의장에 등장한 유시민처럼 국회의 반발을 사지는 않았지만, 대신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성폭력에 가까운 비난을 받았다.) 아니면 패딩의 세계와 코트의 세계를 오가는 인류학자의 마음으로 코트를 챙겨입은 채 이 세계의 작동방식을 관찰할 수도 있겠다.
나는 ‘싸고 질 좋은 코트’를 찾아 인터넷 아울렛 매장을 뒤지는 것으로 두 세계의 분열을 해결했다. 2시간에 가까운 검색 끝에 울이 90% 함유된 원하는 디자인의 코트를 80% 할인된 가격에 샀다. 구매하기 버튼을 누른 그 순간만큼은, 나는 세련되고 질 좋은 코트를 차려입고 ‘공적인’ 세계를 활보하는 사회인이었다.
나는 언제든 아이와 동네 뒷산을 오를 수 있는 패딩의 세계, 사회적 관계나 꾸밈노동에 에너지를 덜 쓰는 대신 책 읽을 시간을 확보할 수 있는 패딩의 세계에 만족한다. 적은 돈을 벌면서도 이렇게 살 수 있는 것이 특권적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나만 빼고 모두가 코트의 세계에서 코트의 말과 애티튜드에 익숙한 것처럼 느껴질 때, 대한민국의 법을 만드는 한복판에서 나의 이력과 현재가 초라하게 느껴질 때, 내가 꺼내 입은 오래된 코트와 어딘가 어설픈 표정과 자세를 의식하게 될 때… 코트의 세계를 선망하게 된다. 말끔한 새 코트를 사는 것으로 내가 속한 세계의 법칙과 방식을 지워버리고 싶다.
쇼핑 후기. 결제 후 이틀이 지나 도착한 코트는 분명 화면과 동일했지만 지나치게 얇았다. 간절기 잠깐 입으면 땡이겠네. 싸고 질 좋은 코트는 존재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