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이언 딜런 《에세이즘》
좋다 좋다, 감탄하며 읽었고 매 문장에 밑줄을 긋고 싶었는데 ‘그래서 어디가 좋았는데?’라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모르겠다. 수많은 불면의 밤을 에세이를 읽으며 보냈고, 그 자신이 에세이를 쓰고 있는, 에세이를 사랑하는 저자가 ‘에세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자기만의 대답을 준비하는데, 이 답 역시 에세이적이다. 에세이적이라는 말은 핵심을 표현해내고자 하면서도 “전체를 다루지 않기를, 불완전하다는 것 자체에 가치가 있기를 고집”(25)하는 형식, “위험이나 모험에의 충동 그리고 완결된 형식이나 미적 완성에의 충동 사이에서 흔들리는 장르”(31), “일시성에서 영속성을 추출해내고자 하는 대신에 일시성을 영속화하고자 하는”(34) 충동, 생각의 앞면에 머무르지 않고 “생각을 뒤집어보고 그것의 앞면과 뒷면을 종합”(121)해내는 시도... 그래서 저자의 글은 에세이의 어원과 역사적 특징에서 시작하는 게 아니라 ‘00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쓰인 편린들의 반복과 연결로 이루어져있다.
나는 어떤 에세이, 어떤 에세이스트를 꿈꾸는가. 현실 속 저자든 상상 속 저자든, 이 장르(물론 에세이를 장르라고 부르는 건 전혀 맞지 않지만)에서 이미 실현된 본보기이든 실현 불가능한 본보기이든, 내가 그 저자와 그 본보기에게 바라는 것은 정확함과 애매함의 결합이다. (이것은 내가 생각하는 글쓰기의 정의이기도 하다.) 또 내가 바라는 것은 가르치고, 유혹하고, 혼란스럽게 하는 형식, 이 세 가지 일을 균등하게 수행하는 형식이다.
17쪽, <에세이와 에세이스트에 관하여>, 《에세이즘》
내가 이 같은 에세이에 매달리게 되는 것도 내 안에 이러한 갈등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나는 에세이에 얼마간의 완성도가 있기를 바란다(윤리적 완성도가 아닌 형식적 완성도가). 그 글에 생각의 실, 문체의 실, 감정의 실이 아주 촘촘하게 짜여 있어서 은은한 광택을 내길 바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나는, 그 모든 것이 바로 그 작품 안에서 바로 그 순간에 와르르 풀려나가길 바란다. 그 글이 누더기가 되길, 짜깁기가 되길, 뒤엉킨 실들의 미로가 되길 바란다. 내가 그렇게 너덜거리는 상태여서인지도 모르겠지만.
51쪽 <흩어짐에 관하여>, 《에세이즘》
이 책이 ‘에세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자기만의 대답이라고 했지만, 대답하는 동안 저자의 질문은 이렇게 바뀐다. ‘나는 왜 에세이를 사랑하는가’ 무언가를 향한 애정 고백기를 읽는 일은 그 순수한 애정에 탐복할 수밖에 없는 일이기도 한데, 이 책 역시 그랬다. 저자의 ‘에세이 찬가’가 저자의 개인사를 다루고 있는 ‘위안에 대하여’라는 챕터가 반복되며 뭉클하게 다가온다.
비비언 고닉이 상황 속에서 이야기를 발견하라고 조언한 것처럼, 브라이언 빌런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내가 이해하기로) 에세이를 잘 읽기 위해서는 표면적인 메시지를 넘어 내적으로 추동하는 힘을 느껴야 한다. 그 힘은 이음새가 매끄럽지 않을 수 있고 심지어 서로 모순될 수도 있지만. 명확하게 하고자 하는 욕구와 흐트러트리려는 욕구, 총체적으로 보고 싶은 욕구와 부분적 진실에 천착하고 싶은 욕구... 양방향으로 달려가는 힘 속에서, “모색하고 감응하는 그 기묘한 분위기”(186)에 머무르는 것이 독자의 할 일이다.
에세이를 잘 쓰는 방법도 비슷하다. 내 바깥 무언가 멋진 자아를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 이상하고 모순적인 나 자신에게서 시작하는 것. 이 책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이야기. 수잔 손택이 남긴 거대한 분량의 일기는 작가로서 되고 싶었던 자신의 모습에 대한 염원으로 드글드글하다. 하지만 손택이 정말 쓰고 싶었던 글은 그 일기의 방식에서 이미 마련되어 있던 게 아닐까? “불완전한 방식, 허세에 가까운 정도로 야심적인 방식을 통해서, 손택 스스로 내가 되고 싶은 작가가 되기는 불가능할 것 같다고, 내가 살고 싶은 사람으로 살기는 불가능할 것 같다고 자신의 일기를 통해 고백함으로써 말이다.”(170) 그의 일기장은 “그녀 자신이 가장 생산적으로 해체될 수 있는 지면”(170)이었고, 그의 에세이즘이었다.
우울증으로 오래 투병한 저자 역시 마찬가지의 깨달음에 이른다. 우울증 환자의 클리셰 중 하나인 ‘머릿속의 안개’ 그러니까 ‘명료함과 에너지의 부족, 그리고 집중력의 감퇴’로 해석되는 그 안개 자체를 가지고 글을 써낼 수 있지 않을까? “혼미함, 난잡함, 쇠잔함을 가지고도 글을 써낼 수 있지 않을까? 재난 그 자체의 내부로부터 글을 써낼 수 있지 않을까?”(201)
쓰고 싶은 글은 있지만 더 잘 쓰고 싶어서, 자료 조사를 잘하고 싶어서, 아직 내 역량이 안되는 것 같아서, 계속 미루고 있다. 나는 어떤 종류의 ‘깔삼함’을 원하는 걸까. 상황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해내고 싶다는 미명 하에 이야기를 너무 깔끔하게 정리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생각의 앞면을 넘어 뒷면으로 넘어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건 아닐까.
“대부분의 경우, 생각은 그저 생각의 앞면일 뿐이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생각을 뒤집어보고 그것의 앞면과 뒷면을 종합해내는 것이다. 이 방법을 쓰지 않았다면 전혀 흥미롭지 않았을 수많은 철학 저술들이,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커다란 흥미를 끌어왔다.” 다시 말해, 단상적인 작업이 위력과 동질성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부분들 간의 분쟁과 이질성 덕분이라는 얘기다. 아도르노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제대로 전한다는 것은 곧 자신의 글이, 나 자신이 여러 모순되는 것들을 동시에 말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121쪽 <단상에 관하여>, 《에세이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