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인, 정희진, 한채윤 외 지음《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
생존을 위해 개인의 모든 것을 동원하라는 명령 속에서, 이들은 ‘피해자 카드’를 꺼내들었다. 피해도 자원이 되는 세상에서 여성의 피해자화는 남성 사회도 여성도 ‘환호’할 만한 자원이다. 약자는 사회가 자신을 타자화해도 분노하지만, 스스로를 타자화할 때 얻는 이익이 있다는 것도 안다.
정희진, <피해자 정체성의 정치와 페미니즘>, 《가해와 피해의 페미니즘》, 235쪽
언젠가 글쓰기 플랫폼 브런치에 들어갔더니, 메인 화면에 노출된 글 여러 개가 이혼에 관한 이야기였다. 홀린 듯 남의 이혼 이야기를 정독하다가, 급기야 이혼한 지인에게 '이혼한 이야기를 써서 유명해지라'고 종용했다. (ㅋㅋㅋ) 은유 작가는 《글쓰기의 최전선》을 쓴 2015년, 인터뷰에서 이런 발언을 했다. "어두운 감정, 고통이나 상실에 대해서는 사회적으로 발언할 장이 별로 없다. 왜냐면 내 아픔, 약점, 상실을 이야기했을 때 개인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출처: https://ch.yes24.com/Article/View/28118) 고작 10여년이 지났을 뿐인데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진다. 지금은 자신의 아픔, 약점, 상실조차도 자아를 전시하기 위한 자원이기 되는 시대니까.
인간의 기본적 권리는 "서사화할 권리, 곧 내 이야기를 들려줄 권리, 내 고통을 표현할 수 있는 특별한 내러티브를 정식화할 권리"라는 슬라보예 지젝의 말대로, 인간은 자신의 고통을 서사화하는 존재다. 고통을 서사화하고 그 속에서 나름의 의미를 발견할 때라야 고통을 넘어설 힘을 얻는다. 하지만 고통을 서사화하는 일은 이제 유명세를 얻기 위한 방편으로 급격히 빨려들어가고, 사람들은 SNS를 이용해 불행과 고통을 전시하고 과시한다. 불행이 왜 과시의 도구가 될까? 불행한 사연이 사람들의 관음증적 욕망을 자극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런 사연을 겪은 피해자로서 윤리적 우위를 차지하기 쉽(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 역시 돌아보면 피해자로서의 정체성을 붙들고 삶의 대부분을 살아왔다. 기독교인(이라서 억압받고 있다는), 활동가(라서 가난하다는), 여성(이라서 내 삶이 꼬였다는)이라는 정체성이 각각의 시기에 나를 휘감았고, 그 정체성이 나를 '구원'해줬다. 사회의 중심부와 주변부를 오가는 내게 대안적이고 창조적인 시각이 있다고 믿었다. 어쩌면 나는 그저 장삼이사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견딜 수 없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내가 피해자임을 알아가는 과정은 분노가 솟구치고 멀미가 났지만, 동시에 피해받는 '우리'라는 공통의 감각, 서로 피해의 서사를 공유하면서 느끼는 강렬한 감정을 안겨주었다. 피해자라는 정체성에는 나르시시즘과 같은 은밀하게 달콤한 구석도 있었다. 이렇게나 고통을 받은 나, 이렇게나 고통에 안주하지 않고 사유하는 나…. ‘고통받는 자아’는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나를 적셔주었고 나는 거기서 삶의 의미를 얻었다.
나도 안다. 계속 그런 방식으로 삶의 의미를 얻으면 참 편한데, 그럴 수 없다는 걸. 《가해와 피해의 페미니즘》에서 정희진의 글(<피해자 정체성의 정치와 페미니즘>)은 피해자 정체성에 입각해 우월함을 주장하고 싶은 나의 욕망을 또다시 뚜드려 팬다(?). 억압당한 경험만으로 존재를 증명할 수는 없다는 것, 그런 식의 증명으로는 고통의 위계가 발생하고 또다시 피해자라는 보편성으로 묶이게 된다는 것, 그리고 애초에 고정된 정체성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것...
젠더뿐만 아니라 인종, 국가, 종교, 지역 등등 모든 정체성의 ‘소유자’들은 정체성이 고정(안정)될 수 없는 상황이 반복되기 때문에, 한 곳에 정착할 수 없다. 집은 어디에도 없고 유착을 반복한다. 지배자로터 자신의 존재를 규정받기에 언어가 없었던 이들이 자신을 찾는 여정은 가장 긴 시간이 걸리는 ‘귀향’이며, 실제로 완전한 정착이 불가능하다. ‘원래 우리의 언어’는 없을 뿐만 아니라 추구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계속 변하기 때문이다.
정희진, <피해자 정체성의 정치와 페미니즘>, 《가해와 피해의 페미니즘》, 219쪽
《가해와 피해의 페미니즘》에 실린 또다른 글, 루인의 <피해자 유발론과 게이/트랜스 패닉 방어>는 내가 얼마나 지배규범의 한가운데에서, 지배규범을 인용하며 살아가고 있는가를 확인하게 하게 했다. 루인은 게이인 남성의 구애 혹은 친밀한 관계의 여성이 트랜스라는 것을 알게 된 혼란으로 살인을 저지른다는(=지배적 젠더 규범을 인용해 살인을 정당화하거나 방어하는), 게이 패닉 방어/트랜스 패닉 방어가 지배 규범을 강화하는 동시에 이를 의심하게 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성애 남성성은 얼마나 취약하기에 살인까지 해서 그것을 증명한단 말인가? 이토록 취약한 지배 규범이 어떻게 지배 규범의 역할을 반복한단 말인가? 이 질문을 통해 루인은 규범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수행이 수행을, 인용이 인용을 부르는 것, “혐오와 폭력을 통해 사후에 지배 규범으로 재구성된 것”(196쪽)임을 밝힌다. 나도 모르게 지금도 인용하고 있는 지배 규범, 그럼으로써 혐오와 폭력에 가담하고 있는 지배 규범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니 섬뜩해졌다.
내가 피해자이되 피해자로서의 고정된 정체성은 있을 수 없다는 것, 내가 지배 규범을 매일 인용하며 살아가는 장삼이사라는 것, 그래서 가해자이기도 하다는 것, 어떻게 하면 그걸 ‘성찰’하고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걸까? 많은 성찰이 그래왔듯 나의 가해자성에 대한 성찰 역시 또다른 나르시시즘으로 미끄러지는 것은 아닐까?
영화 <미씽: 사라진 여자>의 지선(엄지원)은 이혼 후 육아와 생계를 홀로 책임지며 산다. 그는 여성에게 양육의 짐을 맡기면서 그를 위한 자원은 주지 않는 적대적인 사회를 매일 마주한다. 월급의 반 이상이 보모 월급으로 들어가고 전세 만기는 다가오는데 아이 양육권 소송에서 승소할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 직장 상사는 “애엄마는 이래서 안돼” 소리치고, 담당 변호사와 형사들은 아이의 유괴 사건에 지선이 아이를 숨긴 것은 아닌지 의심한다. 지선은 내 주위 많은 여성들의 모습이며 나의 얼굴이기도 하다.
그렇게 완벽한 피해자인 지선의 모습은 자신의 아이와 함께 사라진 중국인 보모 한매(공효진)의 삶을 추적해가는 과정에서 조금씩 일그러진다. 지선은 한매가 자신의 아이의 입원비를 벌기 위해 했던 노동의 장소(안마시술소, 장기매매...)를 밟아가며, 끝내 자신이 아이의 대학병원입원실을 확보하기 위해 “어떻게 좀 해봐!”라며 (전)남편을 종용한 결과가 한매 딸의 사망으로 이어졌음을 확인한다. 유명 대학병원 진료나 입원을 위해 ‘줄’을 동원하는 대단히 한국적인, 그래서 특별할 것 없는 상황이 누군가에겐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 자신의 모성 실천조차 누군가에겐 특권적인 일이라는 것, 자신의 삶이 제3세계 여성의 착취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확인하고 지선은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킨다.
지선의 위치에서 한매의 삶을 생각하는 것은 고통의 위계를 정하고 자신의 고통을 부정하는 일('나보다 힘든 사람도 있으니까...')이 아니다. 자신이 착취당하고 있으면서 자신이 착취하는 또다른 대상이 있다는, 복잡한 위치를 끊임없이 생각하는 일이다. 그렇게 구체적인 맥락 속에서 사유하는 일은 때로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킬 만큼 현기증 나는 일이지만 뭐 어쩌겠나. 《가해와 피해의 페미니즘》의 해상도 높은 언어들을 만난 댓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