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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delaide Son Mar 11. 2022

거리두기 연습

익숙한 것들과 멀어지기

어느 정도 물리적인 이사 준비가 마쳐지고 난 후부터는 또 다른 차원의 이사 준비 작업이 필요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그리고 우리 동네에 작별 인사를 고하는 과정이 바로 그것이다. 단순히 감정적인 이별이 아니라, 때로는 그것은 퍽 현실적인 행위로 다가왔다. 우선 우리 지역구에 사두었던 지역사랑상품권을 모두 소진해야 했다. 서울을 한참 가로질러 이사를 가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처남 아이디까지 동원해서 최대한도로 서울사랑상품권을 사놓은 참이었다. 마침 명절이 다가오고 있었고 단골로 가던 정육점에 가서 통 크게도 4구짜리 한우세트를 몽땅 결제하는 것으로 하염없이 써질 것만 같던 그 돈도 해치워버렸다. 선물세트를 찾는 나이 어린 새댁에게 조심스레 2구짜리 저렴한 세트를 권하던 정육점 사장님은 국거리 없이 구이감으로만 고기를 꽉꽉 채워달라는 나의 주문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고 우리 가족은 골든벨을 울린 것 마냥 사장님들의 환대를 잔뜩 받으며 가게를 나설 수 있었다. 그 고급진 한우 선물세트는 양가 어른들과 시할머니, 그리고 서울에 계신 나의 고모에게 한 박스씩 보내졌고 어른들은 불경기에 모처럼 받아보는 흥청망청한 고기 선물을 몹시도 반기셨다.


아이의 어린이집도 옮겨놓아야 했다. 이 동네에 산 지 어언 4년이라 근처 어린이집은 이제 빠삭해졌지만, 이제 다시 깜깜이가 되어 장님 봉창 두드리듯 아이사랑 어플을 켜놓고 근처에 보이는 모든 어린이집에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이미 신학기 원아모집이 끝났을 시기라 사실상 중도 입소에 가깝기 때문에 애초부터 국공립 어린이집 같은 곳은 염두에 두지 않았고 적당한 거리에 있는 가정 어린이집을 위주로 공략하였다. 다행히 나는 요즘 드물다는 맞벌이 두 자녀 가정이었고 넣어보는 족족 대기 1번 아니면 2번이라 아주 승산이 없진 않았다. 큰 아이가 대기 1번인 어린이집이 총 세 군데였기 때문에 세 군데 모두 전화를 걸어 입소 의사를 밝힘과 동시에 나의 비장의 카드인 위탁보육료를 내밀었다.


남편의 직장에서는 매우 독특한 방식의 보육료 지원을 하고 있었는데, 어린이집에 가는 원아에 대해서 정부지원보육료의 1/2를 위탁보육료로 아이가 재원 하는 어린이집에 직접 지원하는 방식이었다. 개인이 수령할 수도 없고 계정목상 특별활동 비용과 같은 교육비 명목으로만 사용할 수 있는 돈이라 대체 누구를 위한 지원인가 항상 알쏭달쏭하던 이 돈이 결국 나의 아이가 비교적 수월하게 어린이집에 입소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특별활동비와 입학금 등 잡부금을 제외하고 나면 위탁보육료 재정은 고스란히 원의 수입이 되었기 때문에 위탁보육료를 지급받는 원아는 어린이집의 입장에서는 매우 반가운 존재인데 나는 무려 두 자녀 가정이니 나보다도 더 매력적인 입소대기자는 없는 셈이다. 연령별 지원금이 다르기는 하지만 우리 우리 아이들이 1.5명 분의 보육료를 원에 지불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어린이집은 2명을 입소시키고도 3명분의 보육료를 받는 셈.  물론 순번을 거슬러 입소하는 방법은 없으나 아이가 대기 1번을 유지하는 모든 어린이집에서 나의 아들들을 유치하고자 꽤 적극적이었으므로 아이 맡길 곳이 없어 발을 동동 구르는 불상사는 걱정하지 않게 되었다.


코로나 끝나면 꼭 같이 놀아요, 하고 엘리베이터에서 만날 때마다 입으로만 약속을 잡던 앞집 아이 엄마도 급히 주말에 초대해서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비슷한 시기에 둘째를 임신하느라 서로 불러가는 배를 보며 눈으로 스윽 스윽 전우애를 나누던 사이였는데 이제 영 못 본다고 생각하니 아쉬운 마음이 컸다. 다른 시절이었다면 우리는 더욱 가까이 지냈을 수도 있었으려나... 그래도 극적으로라도 자리를 마련해서 뭔가 후련한 기분이었다. 스물여섯인가 일곱 즈음에 스페인 순례자의 길을 함께 걸었던, 옆동네 사는 수정이와도 이별의 만찬을 나누었다. 수정이와는 순례자의 길이 처음 시작하는 생 장 피드포르...로 가는 버스가 출발하는 바욘이라는 프랑스의 작은 마을에서 처음 만났는데 앞서거니 뒤서거니 길을 걸으며 참 많은 순간들을 함께 했었다. 젊은 우리 나날들을 추억하며 또 한 번 나는 한 시절을 이렇게 마무리하였다.


일산에 사는 대모님(이라고 하면 뭔가 외숙모 같고 머리가 희끗한 초로의 여성일 것 같으나 실은 겨우 5살 손위의 언니) 댁에도 서둘러 다녀왔다. 자유로를 타고 시원스레 주욱 달리면 30분도 안 걸리는 곳이었는데 이젠 서로 큰맘 먹고 만나야 하는 거리가 되어서 아쉬운 마음에 입맛이 쩍쩍 다셔졌다. 나는 이토록 모순적인 인간인 것이 이사 못 가 안달 난 사람처럼 온 세상을 헤집어 이주 프로젝트를 진행하다가도 이렇게 살던 동네에 미련을 철철 쏟고 다닌다. 서른을 넘어서자 둘이서 번갈아가며 임신하며 출산하느라 20대 내내 용감무쌍하게 마셔대던 그 술자리가 또 그리워졌는지, 나는 그날도 아주 고주망태가 되어 집에 돌아오고야 말았다. 과연 벌건 대낮에도 대리운전이 잡힐지 안 잡힐지 휘청 휘청 손가락을 놀리다가 엉겁결에 잡힌 기사님의 손에 운전대를 맡긴 채 술과 고기 냄새를 진하게도 풍기며 집에 돌아와서는 그 길로 깊고 깊은 잠에 빠지고야 말았다. 번뜩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10시가 가까운 상황. 아이 둘을 데리고 고군분투했을 남편에게 미안하고 무안해서 쉬이 밖으로 발은 떨어지지가 않고 머리는 깨질 것 같이 아프고. 그러고 보니 어제 술 취한 채로 탄 엘리베이터는 하필 왜 이리 많은 사람을 태운 건지 무려 4개 층에서 멈춰 서면서 마스크를 뚫고 들어오는 만취한 아줌마의 술과 고기 향에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렸던 기억이 어렴풋.... 하, 빨리 이사 가고 싶다는 생각이 비로소 들기 시작하는 것이 이제 집에 작별 인사하는 짓도 그만해도 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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