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 집으로 내려보내는 짐은 1인용 소파 두 개, 슈퍼싱글 침대 1개, 식탁 1개, 식탁의자 2개, 화장대 1개와 디지털 피아노, 이사 박스 4개에 정리된 옷가지와 잡동사니였고 이 중 침대는 부모님 댁으로, 화장대는 시댁으로 내려야 하는데 부모님 댁에서 에어컨과 실외기를 받아와야 하는 아주 복잡한 여정임에도 불구하고 다행히도 해주겠다는 사람을 구했다. (어디서 구했냐고요? 물론 숨고에서 구했지요!)
내려가는 가구 중 식탁의 이력이 특히 이채롭다. 남편이 입사 후 회사 근처의 낡은 복도식 아파트에서 자취를 시작할 때 가구점에서 구매한 접이식 식탁으로, 혼자 살 때는 접어서 800짜리 작은 식탁으로 쓰다가 결혼한 후 신혼집에서는 펼쳐서 4인용 식탁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사실 그즈음 세라믹 식탁이나 화이트톤의 인테리어가 유행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나는 볼 때마다 거슬리는 저 식탁을 못 바꿔 안달이었고, 결국 두 번째 이사를 하면서 식탁 자리가 좁다는 핑계로 희고 예쁜 원형식탁을 들였다. 그 와중에 못생기고 튼튼한 그 식탁을 차마 버리지 못했는데 이것이 공교롭게도 동생이 사용하는 문간방 빈 공간에 기가 막히게 맞아 들어갔기 때문에 그 식탁은 엉겁결에 2년간 책상 노릇까지 용케 잘 해냈다. 이제 본래의 소임대로 다시 식탁 노릇을 하러 멀리 트럭에 실려 보내지는 것을 보니 어딘지 뭉클한 느낌이다.
신혼 가구를 구하러 다니던 2017년은 정말 너무너무 바빴다. 입사한 지 6개월 만에 부서를 옮겼는데 회사생활도 처음인 데다가 일도 익숙지 않아서 야근하기 일쑤에 결혼도 처음이라(!!) 행복한 예비 신부는커녕 나는 날이면 날마다 수척해져 갔다. 그릇을 고르는 일도 혼수를 장만하는 일도 모두 거추장스럽고 귀찮게만 느껴졌다. 주말이면 겨우 지친 몸을 일으켜 대충대충 사야 할 것들을 마지못해 아무렇게나 사모으며 정말 죽지 못해 사는 심정으로 버텼다. (아 정말 우울했습니다.) 집 근처에 있는 리바트에 가서 그냥 하루 만에 모든 가구를 사서 채웠다. 그때 샀던 1인용 소파 두 개는 첫 집에선 서재에 자리하며 아주 짧게나마 부부간 오붓한 시간을 즐기게 해 주었고, 아이가 태어난 이후부터는 두 아이의 수유 의자를 거쳐갔으며 지금은 그냥 천덕꾸러기가 된 채로 이 방 저 방 쫓겨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혼자 사는 집에 큰 소파를 둘 필요도 없을 것 같아 동생의 작은 거실에 겨우 자기 자리를 찾게 되었으니 이 또한 다행이다 싶다.
2013년부터 2016년까지 에어컨이 없는 집에 살면서 공교롭게도 나는 매 해 여름 시험을 보았다. 물론 에어컨 없는 것이 시험의 패인이라고 하기엔 나는 정말 날라리 수험생이었지만 에어컨 없는 8월 중순은 너무너무 괴로웠다. 어느 해엔가는 도저히 못 참고 근처 오피스텔에서 자취하는 친구 집으로 짐을 싸서 도망가기도 했다. 미련스럽게 여러 해를 버티다가 아빠에게 SOS를 쳐서 스탠드형 에어컨을 하나 들일 수 있게 되었는데 설치하자마자 곧 결혼을 하느라 고 에어컨을 떼어다가 벽걸이 에어컨을 세트로 구입하여 신혼집에 달았다. 시스템 에어컨이 달린 집으로 이사 오면서 2 in 1 에어컨도 어딘가에 방치되었는데 결국 이 에어컨도 주인을 찾았다.
전자피아노야 말로 기구한 삶을 지냈는데 신림동 자취방에서부터 동생과 함께한 이 물건은 6개월간 짧은 대전 체류기간에도 엘리베이터 없는 3층 집까지 힘겹게 올라가 자리를 지켰고 누나 집으로 들어올 때도 꾸역꾸역 트럭에 실려 다녔으며 아이들도 있으니 두고 가라는 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제 주인을 따라 또 먼길을 떠났다. 사실 2년간 같이 살면서 피아노 앞에 앉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무척 회의적이었으나 부득불 고집을 부리니 꺾을 방도는 없다.
조각조각 기워내듯이 동생의 새살림들을 챙겨가면서 동시에 우리 집에 나는 구멍들도 메워내야 했다. 식탁과 함께 식탁의자도 쿨하게 내려보냈으므로(식탁과 마찬가지로 식탁의자도 굉장히 꼴 보기 싫어하던 중이었다.) 새로운 식탁의자를 사서 채워야 했고 식탁인 듯 책상인 듯하던 것이 자리한 그 공간에도 새 책상을 사서 들이기로 했다. 시스템장에 걸려있던 동생의 옷가지들과 신발장에 뒤섞여있던 신발들을 추려내 정리하고, 책상 위의 잡동사니들까지 꼼꼼하게 챙겨 짐을 싸다 보니 이미 진이 빠지기 시작했다. 분명 우리 집은 포장이사를 하는데 어쩐지 모든 짐은 이미 내가 다 포장한 것 만 같고. 멀리 지방까지 짐을 내려야 하니 아침 일찍부터 기사님 두 분이 오셔서 작업을 시작하셨다. 지난 2년간 동생이 함께 살다 간 흔적은 1톤 트럭을 꽉 채웠고 짐이 떠난 자리를 보니 비로소 그 공백이 느껴졌다. 식구가 정말 한 명이 줄었다. 시원섭섭한 감상에 젖어있을 겨를이 없이 그 이튿날은 정말 우리 집 짐을 빼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