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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delaide Son Mar 25. 2022

고향이 어디세요?

서울살이 1n 년, 나의 고향은요...

요즘은 동향 사람을 만나면 그렇게 반갑다. 서울살이 십수 년 만에 나는 제법 깨끗하게 사투리의 흔적을 지운 편이지만 일평생 서울살이를 하면서도 사투리 못 고치는 사람이 태반이라 나는 제법 예민하게 짧은 대화에서도 얼른 이쪽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캐치해낸다. 얼마 전 누군가와 우연히 서로 동향임을 확인하고 반가움에 몇 마디를 나누다가, 어머 그런데 시집을 이쪽으로 오셨나 봐요? 하는 질문에 아 남편도 사실 동향인데 원래는 남편 직장 근처 어디에 신혼집을 얻어 살다가 지금은 동생 학교 때문에 이리로 이사 오게 되었어요라고 시원스레 처음 보는 사람한테 잘도 이 복잡한 정황을 설명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아 물론, 동생이 그 학교 떨어지고 지방에 내려가서 우리 가족만 지금 여기 살게 되었어요, 라는 사족은 덧붙이지 않았다.)


한때는 "어디서 오셨어요?"라는 질문이 꽤 무례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라 낯선 사람 앞에서 제 고향이 어디인데 이러쿵저러쿵한 사연으로 여기에 살고 있어요라고 말하는 일을 무척 번거롭게 생각했다. 고향이 이쪽이세요? 혹은 서울 출신이세요?라는 질문에 구구절절 대답하는 일은 실제로 매우 귀찮다. 설령 그게 대화의 물고를 터주는 요긴한 방법이라고 할 지라도 매번 같은 질문이 반복되니 지겹기 짝이 없다. 아니요 고향은 여기가 아닌데요라고 대답하면 그럼 왜 연고도 없는 여기에 사세요? 이런 식의 꼬리물기 질문이 이어지기 일쑤다. 이 질문은 서울살이 내내 성가신 깔따구처럼 나를 따라다녔다. 대한민국은 분명 거주 이전의 자유가 있는데! 내가 여기 사는 이유를 생면부지의 사람들에게 매번 해명해야 하는 일이 몹시 거추장스럽다.


얼마  공무원 임용 시험에 합격한 사촌동생도 같은 불만을 토로했다. 지방 출신인 그녀는 지극히 개인적인 사유로 서울시 공무원 시험을 쳤는데  고향에서 시험을 치질 않고 서울 시험을 쳤느냐, 그럼 지금은 어디서 사는 것이냐, 회사 앞에 사는 것이냐(개인적인 이유로 지금 회사 앞에는 살고 있지 않다.), 그럼  거기서 사는 것이냐 각종 질문 종합세트의 폭격을 맞는다는 것이다. 사실  개인적인 사유에는 남자 친구라는 존재가 얽혀있어 더욱이 대답하기가 곤란스러울 때가 많다. 남자 친구의 갑작스러운 서울 발령 때문에 서울시 시험을 준비하게 되었고 지금은 남자 친구  근처에서 집을 구했다는 매우 합리적이고 개연성 있는 설명도 어쩐지 직장 사람들 앞에서는 조심스러워진다는데 나라도 그럴  있겠다 싶어 고개가 끄덕여졌다.


꽤 오랜 기간 동안은 네, 서울 출신이고 여기서 태어났어요. xx여고 나왔어요.라고 대충 거짓말로 둘러대기도 했었는데 남편은 이런 내가 공연한 과민반응을 하는 거라고 비웃었지만, 실제로 그는 서울로 올라오자마자 다니고 있던 대학교 앞에서 자취를 했고, 취업을 하고 나서는 회사 근처에서 자취를 했기 때문에 비교적 해명 거리가 심플했다. 나의 경우에는 결코 그렇지가 못했다.


대학을 입학한 첫 해에는 학교에서 서너 정거장 떨어진 모 여대 앞에서 자취를 했다. 여기서 내가 500번은 대답해야 했을 그 질문이 이어지는데 그것은 바로  "왜 학교 앞에서 자취를 하질 않고?" 학교 코앞에다가 자취방을 얻어주었더니 친구들 모두 불러 모아 술 마시고 포커 치고(?)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아이가 완전 비뚫어져버렸다는 어떤 괴담을 듣고 온 모친의 선택이었다. 여대 앞이니 치안이 좋을 거라는 계산도 함께였다. 질문에 500번 정도 답하니 1년이 지나갔고 동생이 뒤이어 서울에 올라왔다. 이번에는 동생 학교 앞으로 이사를 했다. 누나가 집에 같이 있으니 불량한 친구(!!)들이 집에 몰려와 아지트를 삼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 이 역시도 모친의 선택이었다.


그 집에서 동생이 졸업할 때까지 4년을 살았는데 또 너는 왜 거기에 사니?라는 질문에 4년 내내 대답을 해야만 했다. 친한 친구들은 얼른 답변을 외워서 대신해주는 성의도 보여주었다. 쟤 동생이 거기 다닌대요! 그러고 나면 더 이상의 추가 질문은 보통 없는 편이었지만 저런, 동생은 공부를 참 잘했구나... 하는 군말도 꼭 덧붙여졌기 때문에 나는 야코가 죽기 일쑤였다. 어딘지 우중충한 동네 분위기도 마음에 들지 않고 그 무렵 엄마가 돌아가셨다. 겸사겸사 환경을 바꿔보겠다는 생각으로 나와 동생의 학교 가운데 그 어드매에 있는 동네에 작은 아파트를 하나 구했다. 동생은 졸업 후 바로 동 대학원에 진학을 했고 나는 이래저래 휴학이 길어지느라 졸업까지 한참 학기가 남은 상황이었다.

결혼 전까지 살던 그 동네가 내가 서울살이를 가장 오래 했던 동네였는데 왜 여기 사세요?라는 질문에 가장 대답하기 힘든 곳이기도 했다. 여기랑 저기의 중간 즈음이라는 설명은 내가 졸업하면서 더 설득력이 떨어졌고 20평대 아파트에 남매가 사는 것은 이상하다고 여겨졌는지 자꾸만 부모님은 어디 계시냐고 사람들이 물었다. 이렇게 저렇게 둘러대다가 나중엔 귀찮아서 집에 계신다고 할 때도 있고, 몸이 좀 안 좋으셔서 지방에 내려가 계신다고 하거나 가끔은 해외 출장 나가셨다고 대답하기도 했다


아마도 그 시절의 나는 나에 대해 확신을 가지는 일이 너무도 힘들어서 그랬던 게 아닐까. 그래서 어디 사세요? 왜 거기에 사세요?라는 비교적 단순한 질문에도 그렇게나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했던 걸까. 오랜 수험기간도,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후의 반쪽짜리 가족 구성도, 좋은 대학을 다니고 있는 동생에 비해 그렇지 못한 나 자신도 모두 숨기고 싶고 가리고 싶은 것들이었는데 어디에서 오셨냐는 그 간단명료한 질문에도 마치 나의 근원을 건드리는 것 같은 타격감을 받았던 걸까. 왜 여기에 사세요?라는 질문은 때때로 너 여기에서 (돈과 시간과 젊음을 낭비하며) 무얼 하고 있니? 하는 질문으로 들리기도 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지금 생각하면 그리 복잡할 것도 없었지만 그 당시에는 너무도 복잡하게 생각되던 나의 가족관계도 역시 엄청난 약점이 되어 그 질문 안에서 나를 공격하는 느낌이었다.


요즘 조금이라도 우리 고장 말씨가 들리는 듯하면 낯짝 두껍게 어디서 오셨냐고 나서서 호구조사를 하고 있는 나를 보며 아줌마도 아닌데 초면에 왜 그렇게 고향 타령을 해쌓냐고 친구가 잔소리를 하길래 흥, 내가 아줌마니까 그런 거지 하고 웃어넘겼다. 이제는 어떤 뻔뻔함이 생겼는지 시키지 않아도 여기 보금자리 잡은 이유에 대해 잘도 설명하고 다닌다. 놀랍게도 자발적으로 썰을 풀고 있자니 오히려 듣는 사람이 지치는지 여러 소리 안 하고 대화가 마쳐지는 일이 많다. 이럴 줄 알았으면 뭐하러 그렇게 스트레스받아가며 이리저리 둘러대기에 급급했는지 모르겠다.


주야장천 겨울에만 이사를 다니다가 처음으로 3월 이사를 하였는데 돌아오자마자 날씨가 푹 하니 풀리고 창문 밖에서 산수유 꽃이 움을 틔우며 봄 느낌이 물씬 풍기기 시작했다. 미혼일 때 살던 동네에 아줌마가 되어서 돌아왔는데 넉넉해진 나의 사이즈만큼이나 마음도 더 든든해진 느낌이다. 그 사이 남편도 생기고 아들도 둘이나 태어나는 통에 믿음직한 내 편이 이렇게 많이 늘었다. 언젠가는 또 살던 동네로 이사를 가야 할 수도 있고 아니면 전혀 다른 제3의 동네 혹은 다른 나라의 낯선 도시에서 보금자리를 틀 수도 있겠지만 이제는 그 누구의 질문에도 거침없이 대답할 수 있는 그런 아줌마가 되었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고향이 어디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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