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37, 간이식 상담을 받다
"모친도 60대 초반에 간경화로 사망했습니다. 이모와 외삼촌 모두 간 경화로 사망하였으며 누이 3명이 모두 수직 감염된 보균자로 70이 넘은 큰 누나는 현재 간경화가 진행 중에 있습니다."
A병원의 상담실에서 이 저주받은 질환의 일대기를 듣고 있자니 전율이 흘렀다. 아빠에게도 이모가 있었던가? 외삼촌이 있었던가? 할머니는 내가 아주 어릴 적 돌아가셨기 때문에 왜 돌아가셨는지 구태여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옛날 옛적 너에게도 할머니가 계셨는데 어린 네가 마당에서 고물고물 앉아 노는 모습을 지키면서 저 작은 아이를 솔개가 채 가면 어쩌나 싶어 툇마루 끝에 앉아 빗자루로 괜스레 훠이 훠이 새를 쫓으셨다.... 는 그런 종류의 귀여운 이야기 몇 가지만 따뜻한 장면으로 머릿속에 아로새겨졌다.
대한민국에서 간이식을 가장 많이 한다는 A병원의 간담췌외과 진료를 본 것은 불과 3주 전인 3월 15일이었다. 아빠는 기억이 닿는 순간부터 종종 환자라고 불렸다. 그렇게 멀쩡하게 보이는데도 말이다. 살아생전 엄마도 가끔 느이 아빠 오래 못 사니 잘해주어라, 라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자주 했었는데 아빠 말 잘 들으라는 말을 무섭게 하는가 보다 라는 정도로만 여겼다. 실로 아빠는 전혀 환자처럼 보이지 않았다. 아빠는 종종 이글이니 홀인원이니 하는 것들을 쳐내는 꽤 괜찮은 골퍼였고 엄마가 짧은 투병생활을 끝으로 세상을 떠난 지 오래되지 않아 젊고 예쁜 새 처를 들이더니 한 해에 두세 번꼴로 해외여행을 다녔다. 그것도 마추픽추니 호놀룰루니 하는 이국적이고 멋진 곳으로. 내 결혼식 때는 신부의 웨딩드레스보다 더 비싼 양복을 입고 등장하는 바람에 나를 조금 열 받게 할 만큼의 멋쟁이였으며 업력 27년의 작은 회사를 경영하는 현직 CEO이기도 했다.
재작년 즈음, 식도정맥류* 파열로 갑자기 제주도에서 응급수술을 받고 입원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쫓아내려 갈 때만 해도 사실 골프를 치다가 이 사달이 났다고 생각하고 주 5일 골프를 주 3일 정도로 줄이면 되시겠네요 하고 말았다. 2월 말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잦은 손떨림과 기억력 감퇴를 호소하는데 노인네가 이제 치매까지 오는 모양이라며 웃어넘긴 것이 실은 간성혼수* 증상이었다는 것을 알고는 마음이 저려 한동안 숨이 턱턱 막혔다. 집 근처의 낡고 후진 병원에 입원해 암모니아 수치가 내려갈 때까지 하염없이 관장 치료를 받고 나서야 겨우 그 손떨림이 멎었다. 대신 그러고 나니 몸속 전해질이 과도하게 빠져나가 아빠는 밤마다 극도의 저혈당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평상시 곧 죽는다는 말을 염불처럼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이었는데도 막상 간이 생명력을 다 해간다는 신호를 보내자 극도로 겁에 질린 듯했다. 밤사이 또 저혈당 쇼크에 빠질 뻔했다는 소식에 급히 새벽차를 잡아 아빠를 보고 돌아오는 길, 휴대폰으로 다이렉트 암보험에 가입했다. 간이식 공여자는 더 이상 암보험을 들 수 없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탓이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A병원의 홈페이지에 접속해 간담췌외과의 외래 예약을 잡았다. 운 좋게 인기 교수인 K교수의 진료가 두 타임이나 비어 있었다.
K교수의 진료실 앞은 그 명성답게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진료방 2개를 잡고 이쪽저쪽 돌아가면서 진료를 보는데 15분 단위로 돌아가는 진료 전광판에는 환자 이름이 빼곡히도 가득 차 있었다. (15분간 저렇게 많은 환자를 본다고?) 아빠는 항바이러스제 복용을 시작하고부터 지난 20여 년간 이 병원에서 소화기내과 진료를 보았으나 간담췌외과는 초진이었으므로 생면부지의 교수님에게는 그저 낯선 환자일 뿐이다. 저 짧은 시간에 이 기나긴 환자의 기저질환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고 진료를 의뢰할 수 있을까, 각각 다른 병원에서 촬영한 영상기록 CD만 세 장에 이번 입원기간 동안 뽑아간 수 십장의 의무기록지 안에서 포인트를 찾아내어 아빠에게 적합한 처방을 내릴 수 있을까 매우 걱정하고 있었는데, 역시 이런 대형병원은 다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초진환자인 아빠는 K교수를 만나기 전에 "상담의사"를 따로 만나는 시간이 주어졌고 이 분에게 차분히 기저질환과 가족력, 복용 중인 약과 현재 몸의 상태, 최근 들어 급변한 컨디션에 대해 소상히 진술할 수 있었다. 이분은 전문 인터뷰어 같기도 하고 속기사 같기도 했는데(병원에 근무하는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아마도 레지던트 이후 병원에서 과정을 이어가는 "펠로우"의사일 것이라고 한다.) 아빠가 중언부언 횡설수설하는 중에도 그녀는 영민하게 포인트를 추려내어 차트에 줄줄이 기록을 하면서 이따금 이야기가 샛길로 샐 때는 능숙하게 주의를 환기시키곤 했다. 만 62세인 아빠의 인생이 의학적 소견과 함께 작은 차트에 요약되는 것을 지켜보며 이따금씩 아빠가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은 내가 거들곤 했다. 이를테면 아빠는 당신이 언제부터 금연했는지를 기억해내지 못했다. 제주도에서 식도정맥류가 터진 해를 2019년으로 착각하기에 2020년으로 정정해주었다. 우리 부녀가 더듬더듬 채워나간 이 일지를 끝맺으며 그녀가 물었다. "그래서 기증자가 있으신가요?"
옆에서 아빠가 눈을 질끈 감는 것이 느껴졌다. 펠로우 선생님은 굉장히 건조하게 나의 인적사항을 받아 적었다. 만 32세, RH+ AB형, 1남 1녀 중 장녀이며 기혼, 자녀는 2남, 키와 몸무게까지 모두 타이핑해넣은 후 밖에서 다시 기다리면 간호사가 이름을 부를 거라고 했다. 그사이도 수많은 환자들이 회전문 빠져나오듯 K교수의 진료실에서 몰려나왔다. 우리 차례가 되어 진료실에 들어서자 교수는 따닥따닥 몇 번 클릭을 해 화면을 들여다보더니 대뜸 기증자가 있으십니까?라고 물었다. 여태 젊은 여자 펠로우 선생님께 기술했던 그 많은 내용들이 과연 전달은 된 걸까, 순간 입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꼈지만 다시 목을 가다듬고 앵무새처럼 종전의 내용을 차분하게 읊었다. 공여 예정자는 환자의 딸이며 1남 1녀 중 장녀, 만 32세, RH+ AB형입니다. 두 아이 자연 분만했으며 개복수술받은 적 없습니다.
진료는 참으로 짧았다. 그럼 수혜자 검사부터 진행해야 하니 나가면서 입원 일정을 잡고 가시면 됩니다. 그걸로 끝이었다. 3분이 채 안 걸리는 짧은 진료였다. 간호사에게 가장 빠른 입원 일정을 안내받으니 2주 후로 잡혔다. 수납을 하고 나오면서도 아빠는 좀처럼 납득이 되지 않는 눈치였다. 그래서 당장 이식을 받으라는 건가? 아니면 좀 더 지켜보자는 건가? 머릿속에 물음표가 무수하게 떠오르는 상황이었지만 숨 돌릴 겨를이 없이 얼른 집으로 돌아와 짜장면과 탕수육을 시켜 꾸역꾸역 먹고는 다시 길을 나서야 했다. 아빠가 간이식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주변의 쉬파리처럼 많은 인간들이 한 마디씩 첨언을 얹고 나서기 시작했다. 이식은 아무래도 A병원이 최고 잘한다는데? 그런데 B병원에 최고로 좋은 기계가 있다고 하는데? 그런데 C병원의 S교수가 그래도 최고 권위자라고 하던데? 이런 식의 카더라 통신들은 죄다 주섬주섬 카톡 창의 복사 붙여 넣기로 나에게 전달되었다. 그러니 이왕 올라오신 김에 B 병원 진료도 함께 보는 게 낫겠다 싶어 같은 날 오후에 진료를 잡아 두었던 것이다. 재택근무 중인 남편과 원내 오미크론 확진 아동이 발생하여 등원하지 못한 나의 두 아들과 아빠까지 네 남자를 데리고 점심 식사를 해야 했기 때문에 거실에 밥상을 하나 펼쳤는데 괜히 병원 다녀와서 아이들에게 병균 옮길까 봐 무섭다며 끝끝내 혼자 식탁에 앉아서 고집스레 등을 돌리고 다 불어 터진 자장면을 뒤적거리는 그 모습이 밉고도 너무 야위어 불쌍했다. 그도 그럴 것이 외래 진료를 접수하면서 잰 아빠의 체중은 겨우 58킬로였다.
(다음 주에 계속 연재됩니다!)
간성혼수*(간성뇌증)
간성 뇌증이란 간 기능 장애가 있는 환자에서 의식이 나빠지거나 행동의 변화가 생기는 것을 말한다. 평소의 성격이나 행동이 약간 변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의식 상태가 수시로 달라지거나 밤낮이 바뀌는 경우, 심하게는 통증에도 반응이 없는 깊은 혼수상태까지 다양한 양상을 보일 수 있다. 간성 혼수라고 말하기도 하나, 간성 뇌증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간성 뇌증의 단계는 다음과 같다.
- 1단계: 지나치게 졸려함 또는 불면증, 상황에 맞지 않는 행복감, 불안, 집중을 하지 못함, 안절부절못함.
- 2단계: 기운이 없음, 사람이나 장소, 시간을 헷갈려함, 부적절한 행동, 발음이 어눌해짐, 손발이 휘청거리거나 떨림.
- 3단계: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하고 장소와 시간을 모름, 계속 의식이 없음, 아플 정도로 자극을 해야만 눈을 뜸.
- 4단계: 아프도록 자극을 하여도 반응을 하지 않는 혼수상태임.
[네이버 지식백과] 간성뇌증 [hepatic encephalopathy] (서울대학교병원 의학정보, 서울대학교병원)
식도정맥류*
식도 정맥류는 문맥압 상승에 의해 식도 정맥의 수와 크기가 증가하여 정맥이 혹처럼 부풀어 오른 상태를 말한다. 간경변증 등으로 인해 간문맥(장과 간 사이의 혈관으로 간에 영양을 공급하는 정맥계의 대혈관)에 혈액이 고여 문맥압이 높아질 경우 식도의 정맥 쪽으로 흐르는 혈류가 많아지면서 식도 정맥이 확장되어 크기가 증가한다. 혹처럼 부풀어 올라 확장된 정맥을 정맥류(varix)라고 하는데, 이 식도 정맥류가 터지면 토혈(피를 토하는 것)이나 흑색변, 혈변이 발생하고 심할 경우 저혈량 쇼크에 빠져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식도정맥류 [esophageal varix] (서울대학교병원 의학정보, 서울대학교병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