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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delaide Son May 06. 2022

크고 싱싱하고 말랑말랑한

그 많던 술은 누가 다 먹었을까

나는 안도했고 남편은 짧게 탄식했다. B병원의 코디네이터는 내 간의 크기와 비율이 나쁘지 않으니 수술 진행이 가능하다는 말과 함께 2차 검사 일정을 잡아주었고 2차 검사 결과를 들으러 올 때는 사회복지사 면담과 함께 국가 기증자 시스템에 등록하는 절차가 이루어지므로 법적인 보호자인 배우자를 반드시 동반해야 함을 안내해주었다. 내가 공여자 부적합일 때의 다양한 시나리오를 생각해보는 일은 무척 피로한 일이었다. 이제 갓 대학에 들어간 늦깎이 신입생인 남동생이 공여자가 되는 경우도, 50이 훌쩍 넘은 새엄마가 공여자가 되는 경우도 모두 고려는 해 보았으나 이만저만 간단하지가 않았다. 일단 경우의 수가 줄어든 것에 대해 나는 그저 매우 후련한 기분이 들었고 남편의 심란함은 더 깊어만 갔다.

1차 검사가 공여자 좌엽과 우엽의 비율, 혈관의 모양과 간의 볼륨을 재는 검사였다면 2차 검사는 전반적인 몸 전체의 컨디션을 스크리닝 하는 종합정밀검진이었다. 초진과 1차 검사 때의 외래 진료는 실제 공여자 수술을 집도할 집도의에게 보았지만 그날은 다른 선생님이 진료를 봐주셨는데 아마도 수련의사였을 아주 아주 젊은 선생님이었다. 더듬더듬 내 차트를 읊고는 2차 검사를 하고 집에 돌아가면 된다고 너무 간단하게 말을 마친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호.. 혹시 궁금한 게 있으신가요? 하고 서둘러 물었으나 나 또한 그의 간결함에 좀 놀라 아.. 아뇨 하고 손사래를 치고 나와버렸다. 외래를 보고 나와 바로 코디네이터 선생님을 만나 당일 검사 절차에 대한 안내를 받았는데 슬쩍 선생님이 들고 있는 차트에 4분면의 표와 함께 64%라는 숫자에 하이라이트가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마도 내가 기증 가능한 간(우엽)의 비율이라고 제멋대로 추측해 보고는 그래 내가 알고 싶었던 숫자는 알았으니 되었다 싶었다. 


시간도 많이 걸리고 대기가 긴 MRI 검사를 가장 먼저 받아야 했으므로 서둘러 영상의학과로 향했다. MRI 검사는 생각보다 길고 지루했다. 검사 시작 전 방사선사는 나에게 폐소 공포증이 있는지를 물었고 혹시 검사 도중 호흡이 힘들게 느껴지거나 정히 답답함을 견디지 못할 시에는 손을 들어 검사 중지를 요청하라고 일러주었다. 그녀가 기계적으로 죽죽 줄을 긋고 동그라미를 치며 읽어준 안내문에는 검사를 도중에 중지하게 될 경우 다시 검사 일정을 잡게 되며 이 때는 수면마취 후 진행할 수가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검사를 마치지 못해 다시 일정을 잡게 될 경우 일그러지는 모든 스케줄을 떠올리니 나는 또 골치가 아파졌다. 다시 또 아이를 맡기고 남편의 연차를 조정하고 (또 금식을 하고!) 병원에 또 와야 하다니. 내가 폐소 공포증이 있던가? 좁은 공간의 답답함을 참을 수 있는 사람일까? 그날따라 주차할 곳을 찾지 못하는 통에 살짝 지각을 하고야 말았는데 그러느라 MRI예약시간이 다음 시간으로 밀리고 말았다. 긴긴 대기 시간은 오히려 사람을 긴장하게 만드는 법. 나는 폐소 공포증 따위가 있는 사람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검색을 하자 온갖 괴담이 또 쏟아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살면서 한 번도 그런 어려움을 겪은 적이 없던 사람도 갑자기 마주한 백색 돔 앞에서는 없던 공포증이라도 생기는 모양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폐소 공포증을 걱정했던 것이 매우 무색하게 나는 검사 도중 잠이 들고야 말았다. 30여분에 걸쳐 진행되는 이 검사는 지시에 따라 일정하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이 전부였는데 좁고 흰 원통 안에 누워 일정하게 울리는 기계 진동음을 들으며 규칙적으로 심호흡을 한다? 잠에 빠지지 않는 것이 차라리 고문일만큼 정말 미친 듯이 졸린 검사였다. 정신줄을 부여잡다가 잡다가 겨우 깜박 잠이 들고 말았고 숨을 참으라는 지시에 숨을 자꾸 쉬었기 때문에 검사를 끊고 다시 해야 한다는 검사 요원의 목소리에 애써 잠을 쫓아 내며 버텼다. 긴 검사를 마치고 기계를 빠져나오자 검사자들의 얼굴도 몹시 지쳐 보여서 어쩐지 미안해졌다. 내가 잠들지 않았더라면 조금 더 빨리 마쳤을 텐데. 미안합니다 라는 말을 하려고 했는데 무안함과 이제 막 잠에서 깬 몽롱함 때문에 비틀비틀 검사실을 빠져나와버렸다.


이어받은 검사가 매우 흥미로웠는데 간 섬유화 스캔 검사(Liver Fibro Scan)라는 것이었다. 사실 CT와 MRI는 간 질환자가 아니더라도 정밀 건강검진을 시행할 경우 한 번쯤 경험해볼 수 있는 검사이지만 간 섬유화 스캔 검사는 지방간이나 간염 등이 의심되는 환자들에게만 시행된다. 건강한 사람은 나처럼 간 공여라는 특수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한 번도 받을 일이 없는 검사인 셈이다. 우측 갈비뼈 사이로 초음파 진동을 쏘아서 되돌아오는 탄력 파동의 값을 측정해 간이 얼마나 탄성이 있는지(딱딱한지)를 확인하고 지방간의 정도를 파악하는 검사인데 생각보다 노이즈 없이 깨끗한 결과 값을 얻기까지 시간이 걸리는지 여러 번 검사자는 내 갈빗대 사이로 작은 막대를 바짝 붙여 퉁 퉁 진동을 쏘아댔다. 별로 침습적인 검사가 아니어서 통증은 없었지만 검사자가 자꾸만 미심쩍은 표정으로 재검을 하기에 괜히 내 간이 딱딱하다는 건가? 하는 걱정도 잠깐 하게 되었다.


남은 검사들은 흉부 X-ray검사와 심전도 검사, 소변검사와 혈액검사였는데 헌혈할 때 빼고는 이렇게 많은 피를 뽑아본 적이 없어서 약간 놀랐지만 별 무리 없이 마쳤다. 상당히 많은 검사를 해서 하루 종일 병원에 있었던 기분이었는데 시계를 보니 겨우 1시가 지나있었다. 이 많은 검사를 다 하는데 겨우 3시간가량이 걸렸다. A병원에서 진행했더라면 아마 하루가 꼬박 걸렸거나 혹은 입원을 해야 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신속한 B병원의 검사 절차에 매우 만족스러워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제야 엄청난 시장기가 몰려왔다. 전날 12시부터 금식을 한 상태라서 운전대를 잡은 손이 후들후들 떨렸다. 2차 검사 때 반려가 되는 경우는 기증자에게 수술을 진행할 수 없을 심각한 기저질환이 있거나 지방간이 극심해서 이식 이후 수혜자의 예후가 나쁠 것으로 예상되는 경우라고 한다. 전자의 경우는 크게 걱정되지 않았는데 간 스캔 검사를 진행하던 그녀의 스읍 스읍 하는 혀 차는 소리와 그동안 남편과 신나게 마셨던 무수한 맥주와 기름진 안주들이 약간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이제 와서는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여기까지 무사히 마쳐낸 나 자신이 장하기도 했다. 또 한 주간은 나의 간이 충분히 싱싱하고 말랑말랑 하기를 기원하며,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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