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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여곡쩔 Mar 26. 2024

내가 영어 공부를 중단한 이유

우여곡쩔 OO 도전기 - 2


내가 처음 영어 공부를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였던가, 윤선생영어교실 방문선생님을 통해서였다. 수업의 대상은 사실은 내가 아니었다. 고학년 오빠를 위해 엄마가 처음으로 신청한 학습지였는데 엄마는 나를 방문선생님이 수업할 때 오빠 어깨너머에서 같이 듣게끔 선생님께 부탁했고 나는 오빠의 옆에서 마치 귀동냥하듯 파닉스를 깨우쳤다. 오빠가 풀었던 워크북을 엄마는 지우개로 지워서 내가 한번 더 풀게끔 했다. 아무리 세게 지워도 오빠의 연필 자국은 남아 있어 답을 추측하게 했지만, 눈의 초점을 애써 흐리며 했던 영어 공부가 마냥 재미있었던 기억이다.


이후 윤선생 영어교실에서 주최하는 지역 영어시험에서 정확히 등수는 생각 안 나지만 아무튼 순위권 안에 들어 상을 받았다. 생각해 보니 등록한 학생은 내가 아니라 오빠였는데 둘 다 시험 자격을 얻게 한 우리 엄마도 대단하고, 엄마의 교육열을 좋게 생각해 배려해 준 선생님도 감사한 분이었다.


파닉스를 뗀 뒤 영어를 읽게 된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내가 자라던 작은 소도시에서 당시 유일하게 원어민을 보유하고 있었던 어학원 회화 수업을 들었다. 당시 원어민 선생님의 이름은 '제프리'였고, 미국의 미시간 대학교를 나왔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미국의 미시간 대학교까지 나와서 경기도 변두리 작은 도시에서 초등학생들 영어를 가르친다는 게 말이 안 된다. 아마도 원장선생님과 합의하에 학력 위조했을 것이다. 여하튼 나는 그때 미시간이라는 미국 지명과 미시간 대학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됐고, 당시 제프리는 매우 재미있고 좋은 선생님이어서 영어 공부를 더욱 즐겼다.


초등학교 5학년이 되자 나는 학원을 다니던 초등학생들 여자 중 영어 실력이 가장 좋은 편이었는데, 이로 인해 당시 학원에서 매년 열었던 영어 연극제에서 '백설공주' 연극 무대의 주인공으로 선정된다.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한편 공주 역할이라니 왠지 모르게 쑥스럽고 오글거리기도 했다. 이날 백설공주가 아니라 흑설공주라며 한여름 햇빛에 까맣게 탄 내 얼굴에 허연 파운데이션을 두껍게 발라주던 수학 선생님의 차가운 팩폭에 눈물이 핑돌기도 했다. 또 그때쯤 되니 남자애들과 서로 투닥거리며 싸울 때라, 왕자 역할의 남자아이가 나에게 연기로라도 뽀뽀하는 것을 서로 극혐 하여 결국 우리는 손바닥만 겹치고 왕자는 자기 손등에 뽀뽀하는 꼼수를 써 타협하기도 했다.


초등학교 때까지는 나름 소도시에서 영어 엘리트 포지션이었던 나의 실력은 중학교 때부터 벼락치기식 공부 성향이 점점 강해져 꾸준한 공부를 게을리하게 되었고, 결국 기초적인 문법들과 멀어지고 영어에 대한 나의 관심도 점점 사라졌다.  그래도 입시용 영어, 즉 내신/수능 용도의 성적을 맞추는 건 크게 어렵지 않았다.




대학에 오자 캠퍼스에 넘쳐나는 해외파와 유학파와 전공자와 외고 출신들에, 나는 뱀의 머리도 아니고 지렁이의 머리 수준이었음을 알게 되었고 영어 쭈구리로 전락한다. 그러다가 글로벌 시대 물결에 자극을 받아 대학교 2학년 마치고 호주 멜버른으로 어학연수를 6개월 다녀오기도 했지만 그것이 나의 영어에 큰 퀀텀 점프를 마련해주지는 않았다. 한번 가장 중요한 때를 놓친 영어실력은 그저 그런 상태에 머물렀다. 다만 취업용 토익 점수 만들기를 하면 당시 영어의 역할이 끝이었기에 크게 치명적이진 않았다.


회사의 직무도 해외와 교류할 만한 일이 간혹 있었지만 그 빈도가 매우 낮아서 업무상 영어가 절실하지 않았다. 내가 할 일은 가끔가다가 승진 때가 되면 오픽 시험을 쳐서 점수를 제출하면 됐다. 승진에 요구되는 어학 기준은 그렇게 높지 않았다. 나의 영어 실력은 퇴보라고 할 수 없게 수십 년간 그 자리에 머물렀고, 간혹 영어 미팅이 생기면 얼굴이 후끈 달아오르는 지경만 어찌 넘기면 되었다.


퇴사 후 나는 가고 싶은 외국계 기업에 운 좋게 면접을 보게 되었고, 늘어난 개인 시간과 맞물려 영어공부를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 회사 퇴사 전 자기 계발비로 1년 치 끊어둔 튜터링 영어회화를 거의 매일 하며 미국인 튜터와 수다를 떨었고, 말해보카 어플로 단어를 암기하고, 문법을 공부하고 리스닝 연습도 거의 매일 했다. 좋아하는 프리미어 리그의 감독과 선수 인터뷰 클립들도 자막 없이 보려고 노력했다. 꼭 글로벌 기업에 가고 싶었다.


그 사이 8번의 면접 그중에 2번의 영어 면접을 포함해 보고 난 뒤 내가 받은 결과는, ‘평가는 좋았으나 경쟁자에 밀려 불합격‘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인사담당자가 '너를 지금 같이 뽑고 싶으나 TO가 없다. TO가 다시 나는 대로 1분기 빠르면 1월에 연락을 주겠다. 이후 간소화 된 절차를 밟자'라는 말을 했던 것이다. 나는 애매한 유보 상태로 희망고문 당하며 몇 달의 시간을 흘려보냈다. 물론 그 기간 동안 그곳에 최종합격한다면 최대한 적응할 수 있도록 꾸준히 영어공부를 했다.


그러다가 얼마 전 최종적으로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불합격에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란 것이다. 이 이야기가 내가 상처를 덜 받고 마음을 잘 정리하게끔 하기 위한 선의의 거짓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아무튼 그곳에서는 영어의 실력을 5단계로 평가하고 이번에는 3번 수준을 뽑으려 한다 했다.


1단계는 내셔널리티 즉 미국 사람, 2단계는 미국에서 태어나서 자란 교포로 한국말은 어색한 사람, 3단계는 미국에서 초중고 학창 시절을 보내 영어도 네이티브 수준에 가깝지만 한국말도 잘하는 사람, 4단계는 미국에서 대학 나왔거나 살았거나 해서 영어도 잘하지만 한국말이 훨씬 더 편한 사람,  5단계는 나머지 사람들



5단계의 사람들에도 실력의 편차가 있고 각각의 서사와 사연이 있겠지만 이들은 모두 5단계로 퉁쳐진다. 그러므로 고작 영어 어플을 이용한 공부로는 당연히 5단계를 벗어날 수 없고, 지금 미국으로 돌연 이민을 간다고 해도 나에게 주홍글씨처럼 새겨진 '5'라는 숫자가 없어지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다. 밥 먹고 영어만 미친 듯이 공부한다고 해도 그저 나는 뼛속까지 한국인인 40대 아줌마이기 때문에 어감과 뉘앙스를 통한 맥락과 속뜻까지 쉽게 파악하기 어렵고, 더 나아가 밈이나 유머까지는 따라잡는 것은 더욱 힘들 것이리라.


이런 생각이 들자 그날 이후로 영어공부를 중단했다. 지금 영어 공부를 하는 것이 부질없다는 생각에 모든 의욕이 사라졌다.


AI의 발달로 영어가 실시간으로 통번역 되고 영상 속 오디오와 입모양까지 씽크가 맞춰지는 시대가 오자, 영어가 지금처럼 중요하지 않은 세상이 머지않았다고 생각하긴 했다. 점차 비즈니스 환경에서 영어에 대한 압박은 줄어들 것이고, 또 지금의 아이들의 영어유치원으로 대변되는 치열한 영어 사교육 시장도 조금 느슨해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영어가 유창한 수준이 아니면 취업 시장의 큰 축이 시원하게 사라진다.


이것은 지금부터 노력해서 따라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것, 일종의 조선시대 신분제보다 더 엄격한 잣대임을 알고 있다. 그리하여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빼박 내수용 인력'으로 커버리고 늙어버린 나에게 이 글로벌 시대는 뒤늦게 호환마마 보다 무서운 일이 되었다.


"OO님 못 본 지 벌써 30일이 지났어요. 목표를 이루겠다 다짐했던 그때를 다시 떠올려보세요."

튜터링에서 애꿎은 푸시메시지만 허망하게 계속 울리는 백수의 봄날이다.



다음 글 장래희망은 재택근무입니다 로 이어집니다.


최근까지는 저도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이었습니다. 퇴사한 전 김부장의 인생 2막을 차례 차례 기록합니다. <우여곡쩔 OO도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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