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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여곡쩔 Mar 28. 2024

글로 밥 벌어먹는 삶에 대한 고찰- 드라마 작가1

우여곡쩔 OO도전기 - 4

이전 글 '장래희망은 재택근무입니다'에서 이어집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글로 밥 벌어먹고 사는 삶을 동경했다. 보고 자란 드라마에 유독 작가, 기자, 소설가, 카피라이터와 같은 창작자가 극 중 인물로 많이 등장했는데 대체로 캐릭터들이 조금 독특하면서 예민하기도 털털하기도 하면서 매력적이어서 이런 것들이 내 잠재의식 속에 자리 잡았을 수도 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글 쓰는 것을 좋아했다. 쓰던 글의 종류와 성격, 플랫폼은 나이에 따라 달랐다. 초등학교 때 일기와 독후감으로 시작한 글 쓰기는, 중학교 때 친구들과의 교환일기와 팬픽이 되었고, 고등학교 때부터는 포털과 SNS 흥망성쇠에 따라 글의 성격과 둥지가 달라졌다.


고등학교 때는 친구들과 다음카페에서 서로의 일상을 낄낄대며 공유했고, 대학교 때는 프리챌을 살짝 찍은 뒤엔 싸이월드 미니홈피로 넘어가 내 20대 시절 조증과 울증을 수시로 오가던 아주 들끓던 감성을 고스란히 담아 일기를 썼다. 아마 그때가 지금을 제외하고 인생에서 글을 가장 많이 쓰던 시기가 아닐까.


직장생활에 적응해갈 무렵 트위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이 차례로 히트를 치면서 일상에 관한 짧은 기록을 하는 수순을 밟았다. 나는 늘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데 비해 저 공간들은 모두 비좁았다. 하지만 회사에서 보고서를 주구장창 쓰고 보도자료와 행사 대본들을 고치다가 집에 돌아오면 긴 글은 마음에 담고 싶지 않은 것이 되었고, 긴 글을 쓸 마음의 여력도 없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드라마작가는 항상 마음속에 품고 있던 직업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시트콤 작가'의 형태로. 나는 시트콤을 매일매일 챙겨보면서 자란 세대인데, 특히 우리나라 시트콤 매니아들의 대부분이 그렇겠지만 김병욱 PD의 시트콤을 좋아했다. <LA아리랑>으로 입문해서 <순풍산부인과>,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똑바로 살아라>, <거침없이 하이킥>, <지붕 뚫고 하이킥>,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까지 대부분을 다 즐겨봤다.


특히 <지붕 뚫고 하이킥>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트콤이고, 논쟁적인 커플 구도 중 지훈-정음 커플에 열광했다. 그들의 러브라인과 지훈-세경의 러브라인을 비교해 복선을 잡아내고 미래를 예측하고자 전체 회차를 몇 번씩 보기도 했다. 아직도 회자되는 지훈-세경의 뜬금없는 죽음과 '시간이 잠시 멈췄으면 좋겠어요'의 대사와 함께 흑백 처리 되었던 그 장면을 본방으로 보면서 얼마나 당황했었던지.. 그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김병욱 감독 이외에도 <남자 셋 여자 셋>, <논스톱>, <세 친구>, <소울메이트>, <안녕 프란체스카> 등등을 열심히 본건 당연하다. 미드로 넘어오면 <프렌즈>, <모던 패밀리>, <빅뱅이론>  등부터 시즌제 로맨틱 코미디까지로 장르를 좀 더 확장해 보면 <섹스앤더시티> <앨리맥빌> 그 외에 기억 안나는 무수한 드라마들...


나는 왜 시트콤을 좋아했을까? 우선 나는 기본적으로 유머와 위트가 있는 이야기, 우울하거나 무겁지 않고 유쾌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또한 모자란 부분이 있어 인간미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좋아하고 그들의 좌충우돌 성장담을 보는 것에 재미를 느낀다. 시트콤은 대개 약간은 모자란 면이 있는 사람들끼리 모여 매화마다 사소한 사건과 갈등을 반복하는데 그것이 결국 어떠한 형태로든 마무리 지어지면서 소소한 교훈과 깨달음을 준다. 그리고 그런 작은 일상이 모여 등장인물들의 성장과 서사와 관계발달로 이어지고 작품 전체의 큰 주제가 된다. 나는 그런 작은 것이 큰 것으로 모이는 형식이 좋았고 거기서의 기본은 인간미에 기반한 웃음라는 것이 매력적이었던 것 같다.


시트콤 작가의 꿈은 시트콤의 인기가 더 이상 예전만 못하다는 연예면 기사의 반복과 함께 쇄락한 뒤로 사라졌지만, 나는 조금 바꿔 일상적인 일들을 소재로 한, 캐릭터의 매력이 살아 있는, 결국 웃음이 있는 드라마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최근 성인 ADHD라는 용어가 트렌드처럼 밀려들어 여기저기 도배될 때, 혹시 나도 예전에 성인 ADHD였던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 적이 있다. 나는 늘 부주의했고 안일했고 지나치게 태평했으며 그 와중에 불안정했고 충동적이었고 건망증도 심했고 그로 인해 어처구니없는 황당한 사건들을 많이 겪고 다녔다. 특히 대학교 때가 정점이었는데 내 이런 성향은 회사에 가서 책임감의 족쇄를 차고 줄어들었고 결혼하고 애를 낳고 더 줄어들었다. 친구들은 에피소드 제조기였던 내가 이제 너무 안정적이 되어서 재미없다고 매력 떨어졌다고 이야기하기도 했고, 지금도 내가 장르물 소재에 기웃거리면 너는 됐고 니 옛날이야기로 코미디나 쓰라고 이야기를 해준다. 그만큼 내 인생 속에서 축적한 코믹한 글감이 많고 이것은 그때의 멍자국과 깨진 유리컵과 맞바꾼 자산인 건 확실하다.


그리고 AI의 발달로 대부분의 직업, 하물며 창작과 예술도 대체가 가능한 지금, AI가 대체하지 못할 영역이 무얼까 고민하다 보니 ‘코미디'가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웃음'이라는 것은 보통 사람들의 인식 속 패턴과 알고리즘에서 벗어나 예측 못하게 치고 들어올 때 발생한다. 물론 관성적인 웃음도 있다. 웃기는 장면에서는 파블로프의 개가 된 것처럼 계속 웃고, 남이 웃으면 따라 웃게 된다. 이 모든 것은 전체적인 과거 데이터와 변수에만 영향받지 않고 누군가의 액션, 리액션에서 발생하고, 타이밍, 뉘앙스, 화자와 청자 사이에 쌓인 관계와 그들이 나눠온 대화 전체의 맥락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AI가 똑똑하게 이야기는 해도 웃음까지 줄 수 있을까? 싶었다. 나중엔 모르겠지만 당분간은 아닐  것 같다. 그러므로 코미디는 흔히 얘기하는 ’사람의 감‘이 ‘AI의 유능함’보다 당분간은 더 우세할 수 있는 몇 가지 안 되는 창작의 영역이 아닐까 싶다.




꾸준하게 드라마 작가가 되는 삶을 꿈꿨지만, 한 번도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주변에서 하던 일을 그만두고 드라마 작가의 길로 뛰어든 사람들을 보며, 용기 있다 멋지다 생각하기는 했다. 하지만 나는 하물며 투자에 있어서도 리스크 테이킹을 두려워하는 철저히 안전지향형 투자성향인데, 다달이 월급통장에 찍히는 고정수입의 안정성을 버리고 인생의 모험을 택할 깜냥이 도무지 없었다.


회사를 그만둔 후 한동안 여러 사람과 그동안 못했던 만남을 가졌다. 지적이고 위트 있고 글도 잘 써서 존경하게 된 학교 선배 언니가 본인의 친구가 드라마 작가로 입봉을 한 경험담을 들려주며, 나에게도 재능이 있는 것 같으니 드라마작가에 도전해 보라고 권유했다. 콘텐츠 업계에서 일하는 다른 후배도 나도 글 쓰는 일을 하면 어떻겠냐고, 특히 드라마 작가들 계약서를 보다 보니 직업으로서 괜찮은 것 같다며 역시 도전해 보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나는 그 만남들 이후 드라마 아카데미에 등록했다. 당시 MBC 아카데미가 나에게 브랜드 연상 1위였던지 별생각 없이 MBC 아카데미를 끊고 보니 아뿔싸 위치가 잠실이었다. 집에서 1시간 30분 거리쯤?! 이 사실을 알자마자 결제를 취소하고 환불요청했다. 그리고 다시 찾아보니 웬걸? KBS 아카데미가 우리 집에서 고작 5분 거리였다. 아 그 빌딩에 그게 있다고? 원래는 백수의 삶에 어울리게 평일반을 들을 생각이었는데 어라?! 주말반이 있었다. 나 중간에 취업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과 함께 주말반을 등록했다.


집 5분 거리에 있는 드라마 아카데미의 주말반을 등록하고 나니 갑자기 후회가 밀려왔다. 왜 나는 지난 세월 드라마 작가에 대한 꿈만 꿨지 한 번도 실천에 옮기지 않았나, 단 한 번이라도 알아보고 주말에 수업을 들었으면 좋았을 텐데. 일찍부터 회사일과 병행하며 준비했다면, '나는 이제 늦은 거 아닌가?'라는 생각을 지금 하지도 않았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후회해야 무엇하리. 나는 시트콤을 하드캐리하는 모자란 인간들에 매력을 느끼는 모지리니까 내 인생에 빈틈이 많은 것은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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