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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나는 그럼 몇 번째로 어려운 상사야?"

내가 만난 모든 여성 리더들을 떠올리게 된 계기

by 우여곡쩔



내가 직장생활을 시작한 것은 2006년 12월. 대졸 공채로 시작하여 줄곧 같은 직장을 다니다가 17년을 꽉 채워 일한 뒤 첫 직장을 그만뒀다. 이후 잠깐의 공백기를 가진 뒤 새로운 회사에 들어가 1년반이 흘렀다.


내가 20년 가까이 회사생활을 하면서 만난 상사들은 대부분 여자라는 공통점이 있다. 내가 대부분 일해온 직무가 마케팅이고 거기다가 엔터테인먼트&미디어 업계에서 상당기간을 몸 바쳐 일했는데 조직은 늘 여초였고 그 영향인지 리더도 늘 여자였다.


정확히 세어보자면 그간 내가 1~2차 상사로 만난 리더들은 총 24명이고 그중에 17명이 여성 리더였다. 명수뿐 아니라 함께 일한 시간의 양으로 친다면 아마도 내 전체 커리어 중 90% 이상의 시간을 여성 리더와 함께 보냈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남자 상사들과는 길어야 3달 이상을 일해본 적이 없다. 그분들은 그쯤 되면 늘 조직개편이 되어 다른 곳으로 떠나셨다.




나는 두 번째 회사를 첫 번째 회사와는 완전히 다른 업종과 경험해보지 못한 조직 문화를 가진 곳으로 택했다. 모든 것이 달라서 그냥 적응만 하는데도 시간이 걸렸다. 그곳에서 만난 나의 상사는 역시 여자였다. 그간 많은 여성 리더를 만나보았는데, 나의 새 상사는 그간 만나보지 못한 새로운 유형의 캐릭터였고 전혀 다른 의미로 까다롭고 힘들었다.


입사 후 약 한 달여의 시간이 지난 어느 날 술자리에서 상사가 회사생활 적응은 되었냐며 본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나는 "그간 수많은 리더를 만났고 대부분 여성 리더였는데, 솔직히 그중에서도 꽤 고난도의 상사세요"라고 말했다. 즉 맞추기 힘들고 만족시키기 까다로운 상사라는 의미였다.


그러자 상사가 흥미롭다는 듯이 물었다. "그럼 몇 등 정도야? 역대 몇 번째로 고난도야?"


찰나의 순간 나는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1등으로 이야기하면 기분이 나쁠 것도 같고, 또 순위가 낮으면 은근히 쉬워 보인다고 생각해서 자존심 상할 것 같았다.

고민 끝에 "상위 20~30% 정도 이신 것 같아요"라고 대답했다.


상사의 표정으로 유추해 볼 때 나의 답변 전략이 나쁘지 않았던 것 같았다.


사실 상위 20~30%는 즉흥적으로 대답한 수치인데 그렇다면 내가 그간 만난 상사들 중에 가장 어렵고 힘든 상사는 누구였을까? 그를 계기로 나는 지난날의 내가 겪어본 리더들, 그중에서도 여성리더들을 한 명씩 떠올려보았다. 최악의 상사하면 자동응답기처럼 말할 수 있는 온리원은 일단 명예의 전당에 올려둔 뒤, 필터값을 여러가지로 요리조리 나열해 보기 시작했다. 능력순, 인성순, 호감순 등.. 더 세부적으로 떠올려보면 정치력순, 조직관리력순, 실무능력순 등 다양한 역량 순으로도 정렬이 가능하다.





이런 리더 정렬 놀이는, 상사에 대해 불평불만을 하는 주변 동료나 선후배들에게 종종 내가 묻는 방식이었다. 주변에서 자신의 상사가 너무 힘들고 싫다고 이야기하면, 나는 그 사람이 극렬히 싫어했던 예전 상사와 비교해서 어떻냐고 묻곤 했다. 그렇다면 보통 "아 그 때보다는 당연히 낫지. 이 정도는 양반이다"하며 상사에 대해 급 온순해지기도 했다. 물론 과거에 너무 힘들었던 상사가 시간이 지나 미화되는 케이스도 있었지만 말이다.


리더는 대개 아랫사람들에게 욕을 먹는 포지션이고, 뒷담화의 대상이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아랫사람들의 업무를 과중하게 만드는 지시를 하고, 때론 그들의 자유의지에 반하는 의사 결정을 하고, 과정에 번거롭게 이견을 제시해야 하며, 때로는 결과물을 부정적으로도 평가해야 하고 이 평가는 금전적인 보상 및 일자리의 안정성과 연결이 되곤한다. 그러니 상사에 대해 좋은 마음만 품고 있기란 어렵다. 결국 어떤 상사는 도무지 어떻게 그 자리까지 올라갔는지 알 수 없는 무능력하고 멍청한 사람으로, 어떤 상사는 극악무도한 사이코패스, 또 어떤 상사는 감정이 없는 소시오패스로 낙인찍히곤 했다. 그런데 누군가가 경쟁을 뚫고 어떤 자리까지 올라갔다는 것은 결국 남들과는 다른 어떤 강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오래 일했던 그룹에서 여성 리더로서 정점의 위치까지 올랐던 N. 그녀가 있던 시기에 나는 대리 과장 나부랭이이자 일개의 일개미에 지나지 않았던 터라, 전 그룹을 호령했던 그녀를 지근거리에서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여러 사람들을 통해 얼마나 힘든 인물인지 그 악명은 너무 익히 들었다. 그녀의 말 한마디와 지시 한 번이 수 많은 부서에 후폭풍을 불러일으켰고, 많은 일개미들은 늘 그 후폭풍을 수습하느라 이리 치이고 저리치이고 고생했다. 그녀를 향한 악감정은 아마도 그 시기에 회사를 다닌 사람들의 대다수가 품고 있을 일종의 민족(?)정서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최근 자신의 유튜브 채널을 개설해서 본인이 얼마나 멋진 업적을 남겨왔는지 썰을 풀기 시작했다. 나는 색안경을 끼고 그 영상들을 보지 않았다. 실상과는 괴리감이 있을 걸로 예상 했고, 본인 자랑과 과장으로 점철되어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알고리즘에 이끌려 그녀의 유튜브 영상을 한편 봤는데. 어라? 재밌는 것 아닌가? 그러다가 홀린 듯 여러 회차를 보게 되었다. 나는 끝내 그녀를 통해 성공한 사람이자 한 시대를 풍미했던 리더에게는 확실한 무언가가 있다고 깨닫게 되었다.


그녀가 했던 여러 말들 중에 명확한 워딩은 기억이 안 나지만 의미상 가장 가장 기억에 남은 대목은 이러하다. 조직 생활 혹은 상사가 힘들다고 불평하지 말고 그 회사와 상사에게서 본인이 얻어갈 것, 뽑아 먹을 것을 생각하라. 즉 나쁜 점이 아닌 배울 점을 보라는 말이 크게 다가왔다. 여러명의 히어로가 등장하는 어벤저스 류의 영화에서도 주인공들은 각자의 기술과 특수 무기로 상대방을 제압한다. 완벽함 속에 숨겨둔 결점이 위기를 불러오지만, 결국 각자의 특기로 살아남는다. 이것처럼 어떤 상사에게라도 배울 점과 본받을 점은 있고 우리는 그 부분을 주목해서 봐야 한다.




오랫동안 글을 쓰고 책을 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어떤 주제? 어떤 아이템으로? 각자가 잘 쓸 수 있는 이야기란 남들보다 경험이 많아 에피소드가 풍부한 이야기일 것이다. 나는 직장생활을 오래 했으니 직장에 관한 이야기가 좋겠다 싶었다. 그러다가 나처럼 많은 여성 리더를 만나본 사람도 드물 것이기에 이것은 기회 요소라 생각했다. 요즘은 아이돌 가수도 여성 아이돌이 잘 팔리고, 드라마도 여성 캐릭터가 메인인 드라마가 사랑을 받으니, 여성 리더에 대한 이야기도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이제부터, 내가 20년 가까이 만난 많은 여성 리더 중 15명을 통해 그들 각자가 갖춘 리더십의 무기 그리고 여성 리더가 되기 위해 갖춰야 할 자질에 대한 이야기들을 하나씩 풀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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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