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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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세월이 흘러 맞이하게 된 30대의 어느 날, 엄마가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나에게 전화를 했다.
"너 학교 도서관에 연체료 안 낸 거 있어?!"
"응"
"왜 그걸 아직도 안 내고 있어! 이런 XXXX !! 엄마가 냈어!!"
엄마는 욕쟁이 할멈급으로 육두문자를 쏟아내기 시작했는데, 연체료를 안 낸 걸로 엄마가 그렇게 까지 화를 내는 것이 순간 좀 이상했다. 아니, 그렇게 화를 낼 일이야? 그리고 이 학교는 무슨 이런 부채를 받으려고 부모님께까지 연락한담? 학교 사정이 안 좋은가? 여러 가지 생각이 오가는 날이었다.
아무튼 엄마가 나의 인생 첫 부채를 대신 청산해 줬다. 나는 31,400원의 굴레로부터 비로소 자유로워졌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 나는 엄마의 과격한 욕설 뒤에 감춰진 진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 내가 남자친구와 헤어진 뒤 연애도 결혼을 안 하고 있어 걱정이 되었던 엄마는 '결혼정보업체'에 나를 몰래 등록하고, 자연스러운 소개팅 주선 인 양 나를 속이는 연기를 하고 있었다.
왜냐면 내가 선은 절대 보지 않겠다, 결혼정보업체는 절대 등록하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았기도 하고, 그 루트가 아니고서야 소시민이었던 엄마 아빠에게는 여러 가지 괜찮은 선자리를 주선해 줄 인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결혼정보업체에서 처음 회원 가입을 할 때에 학력을 증명하는 졸업증명서를 요구했던 것. 엄마는 난관에 봉착했다.
딸 결혼 시키기 프로젝트를 몰래 꾸미던 엄마에게 나의 대학 졸업 증명서는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할 보물 지도였다. 엄마는 졸업증명서가 혹시라도 나의 자취방에 있을까 싶어 나 몰래 찾아왔다가 졸업증명서를 찾기는커녕 돼지우리처럼 지저분한 딸내미의 집 실체를 마주하는데 그쳤다. 엄마는 잔뜩 화가 났지만 몰래 온 것을 차마 말할 수가 없어서 화를 속으로 삭였다.
그리고 그때 지하철도 안 뚫렸던 경기 남부 외곽에서 머나먼 서울시 북부의 학교까지 한 세월 걸려 찾아 간 엄마는, 졸업 증명서가 알 수 없는 이유로 발부가 안 되는 난감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목표를 향해 맹렬히 돌진하던 엄마에게 닥친 또 다른 시련.
왜 졸업 증명서를 뽑을 수 없는 것인가. 그 이유를 물어 물어 끝내 알아낸 엄마는 학교 도서관에까지 가서 연체료를 나 대신 납부하고 가까스로 졸업증명서를 뗀 뒤에서야 '이 놈의 딸내미는 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지' 하는 뒤늦은 분노에 휩싸이고 말았던 것.
이후 결혼정보업체를 통해 몇 차례 소개팅인 척하는 선을 주선했다는 사실을 나에게 들키고, 남은 돈을 환불하라고 으름장을 놓는 나 때문에 계약을 해지하고 난 뒤에야 엄마는 이 사실을 나에게 우스운 후일담처럼 들려주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어찌나 깔깔댔는지.
20살 때 만들어놓은 31,400원의 부채가 엄마의 서울 왕복 교통비에 여러 고생까지 더해진 분노의 스노우볼로 돌아와 30대에 다시 만날 줄 누가 알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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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고두고 곱씹게 되는 기억과 뒤늦은 깨달음을 정리합니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