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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쿙이 May 17. 2023

환경운동하는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기나 한거야?

기후위기 시대의 육아

기후위기를 걱정하며 산지 수개월이 흘렀고, 거대한 탄소 기반 경제와 싸우고 있는 줄 알았던 나는 실제로는 남편하고만 박터지게 싸우고 있었다.


내가 한창 기후우울로 힘들어하고 있을때 소고기 집에 날 데려가서 한바탕 싸우고(지금 이 타이밍에 하필이면 왜 소고기집이냐고!), 친구들과 놀러간 여행에서 고기를 한점도 입에 안댔다고 싸우고(나 때문에 너님이 너무 불편했다나 뭐라나), 입만 열면 기후위기를 걱정한다고 싸우고, 넌 매사에 너무 부정적이라고 싸우고. 싸우고 싸우고 또 싸우고.


사족을 붙이자면, 남편은 한참 저탄고지 식이에 꽂혀 각종 논문과 서적을 디립따 파고 있었고, 때마침 나는 고기에 대한 극렬한 거부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하필이면 같은 시기에 서로의 관심사가 정반대의 궤도를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남편은 탄수화물 중심의 식사를 거부하다보니 당연히 고기나 생선을 주로 먹게되었지만 나는 반대로 탄수화물이 아니면 먹을게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식사때마다 갈등을 빚게 되는 것이었다. 남편은 탄수화물 중심의 내 식습관이 건강을 망치고 있다고 주장했고, 나는 육식위주의 식생활이 환경을 망치는 주범이라고 주장했다.


그렇게 피튀기는 싸움을 거듭하다 종래엔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기후위기 걱정하다 가정이 파탄나게 생겼다고. 개인이 행복을 챙기며 환경을 위하는 삶이 가능하기나 한거냐고. 나만 좀 불편하면 되는 줄 알았던 일은 내 주변 모두(정확히 말하자면 남편놈 하나지만.)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다.


환경을 걱정하고 위하는 일이, 그렇지 않은 삶보다 조금 더 품이 들더라도 결과적으로 삶을 더 행복하게 해주리라 믿었고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다. 무한정 가지고 소비하는 삶보다 아끼고 나누는 삶이 장기적으로 봤을때 육체와 정신에 더 큰 풍요를 가져다 줄거라고. 실제로 전처럼 소유욕이나 경쟁심에 시달리지 않을 수 있어 마음이 홀가분했는데. 아니었나?


남편과의 관계가 틀어지며 나는 더 불행해지고 있다 느꼈다. 내가 하는 일의 가치를 누구보다도 이해해줄거라 믿었던 사람조차도 설득할 수 없는데 이 방법이 옳다고 감히 누구를 설득할 수 있을까.


나는 남편과의 싸움에 지쳐 다시 고기를 먹는 방식를 선택하기로 했다. 사실 내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내가 하는 노력들(플라스틱 사용 줄이기, 고기 소비 안하기, 옷 안사기, 도시텃밭 가꾸기, 중고거래 이용, 대중교통 타기 등)이 전세계 탄소배출량에 미치는 미비한(미비하다고 썼지만 실상 아무런 변화도 일으킬 수 없는 수준의)영향에 비해 남편과의 갈등이 내 현실에 미치는 영향은 그야말로 재앙에 가까웠으니까.


내가 고기를 다시 먹기 시작하니, 남편은 진심으로 나에게 미안해했다. 내가 먼저 고집을 내려놓으니 상대도 고집을 내려놓았다. 너의 건강을 걱정해서 그런거니 먹었으면 좋겠지만 안 먹어도 괜찮아, 라고. 사실 나도 알고 있었다. 남편의 주장도 틀린 말은 아니라는 걸.어쩌면 우리는 고기를 먹고 안 먹는 따위의 문제가 아닌, 하루하루 육아에 치여 자기 자신조차 돌보기 어려운 상황에서 구태여 더 불편함을 감내해야만 하는 삶의 방향성에 지쳐버렸는지도 모른다.


놀이터 한복판에서 아이가 똥을 쌌는데 물티슈를 아끼려면 얼마나 더 많은 번거로움이 필요할까. 플라스틱 장난감의 흥미로움을 대체하기 위해서 부모는 육아에 얼마나 더 많은 노동력을 투입해야 할까. 가뜩이나 불편하고 힘든, 육아라는 극한노동 앞에서 환경을 위한답시고 더 수고스럽고 불편해지기를 감내할 수 있는 부모가 과연 몇이나 될까.


아이가 장난한답시고 수도꼭지를 틀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지는 일, 남편이 마트에서 무언가를 집을때마다 비난하고 싶어지는 마음, 자동차를 타고 돌아다닐때마다 드는 죄책감, 습관처럼 써왔던 일회용품들을 줄이려는 노력, 반찬에서 고기를 걸러내는 일 등등. 나와 남편, 내 아이가 행하는 모든 행위를 검열하고 꼬리표를 매다는 일은 실로 엄청난 에너지를 필요로 했다. 그래서 우리는 쉽게 지쳐버렸고, 그 피로함이 날선 말들이 되어 서로의 마음에 생채기를 냈다. 이렇게 아득바득(?)살기에 우리는 참 여유가 없었다. 이제 겨우 두돌이 지난 아기를 돌보는 것만으로도 매일밤 지쳐 잠이 드는 초보엄빠 였으니까.


환경을 위하며 사는 삶이 그렇지 않은 삶보다 더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러지 않고서야 누가 이 짓을 힘들여 하겠냐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어떻게든 증명해내고 싶다는 마음만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나의 1라운드는 일단 패배. 그러나 나에겐 아직 더 많은 싸움이 남아있다. 너무 나의 속도로만 달리지 않고, 내 주변을 조금씩 물들여나가면서-그렇게 나아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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