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학기 말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수업 분위기가 유난히도 잡히지 않는 통에, 저는 수업 진행을 잠시 멈추고 학생들의 얼굴을 둘러보았습니다. 대화하는 학생, 물건을 만지며 장난치는 학생, 임박한 학원 숙제를 몰래 하는 학생 등 각자 자기 일하기에 바빠 보였습니다. 몇몇 학생만이 '선생님이 왜 이야기를 멈추나' 하는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 마디 했지요.
"여러분! 공부는 학교에서 하는 것입니다."
그냥 순간적으로 떠오른 말을 던진 것이었는데, 다른 일에 바쁘던 학생들이 돌연하던 일을 멈추고 일제히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정적이 흐르고... 한 학생이 자못 진지한 얼굴로 이렇게 말합니다.
무게를 잔뜩 잡고 있던 저는 아이들의 엉뚱스러운 반응에 그만 피식 웃어버렸습니다.
제가 순간적으로 던진 말에 학생들에게 갑자기 '학교는 공부하는 곳'이라는 원초적인 깨달음이 소환되었던 것입니다.
학교에서 공부하지 않았다면 학생들은 그동안 수업 시간에 무엇을 했던 것일까요? 또 대체 어디서 무슨 공부를 해온 것일까요? 어떻게 공부해 왔기에 학교가 공부하는 곳이라는 사실조차 잊은 것일까요?
저는 이 일을 계기로 많은 초등 고학년 학생들이 공부는 학원에서 하고, 학교는 공부하는 곳이기보다는 친구들과 어울리는 '화합의 장소'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 학교 공부를 따라가기 어려워서 혹은 학교 공부를 더 잘하기 위해서 학원에 간 학생 A가 있다고 합시다. 이 학생이 '학교 공부 잘하기'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선택해야 할 행동은 다음 중 무엇일까요?
여러분이라면 몇 번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최종 목적은 학교 공부를 잘하는 것이니 A에게 필요한 선택은 상식적으로 2번 아닐까요?
싫든 좋든 모든 초등학생은 수업에 참여합니다. 공부하도록 마련된 학교 수업 시간을 공부하지 않고 대충 보내려고 한다면 선생님께 혼나는 것은 둘째 치더라도, 학교에서의 시간은 그 학생에게 무의미하게 허비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그런 후 학원에 가서야 학교 수업내용을 새롭게 배우고 공부한다면, 이 학생의 공부는 시간이 낭비되는 공부이자 배운 것을 또 배우는 공부가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번에는 학원에 다니지 않는 학생의 입장으로 생각해 봅시다.
공부를 잘하고 싶은 학생 B는 여러 이유로 학원에 다니지 않습니다만, 학교 공부가 생각처럼 잘되지 않고 어렵기만 합니다. 이런 경우 B가 선택해야 할 행동은 다음 중 무엇일까요?
어떤 선택이 '공부를 잘하겠다'라는 B의 목표를 이루는 데 도움이 될까요? 그것은 아마도 2번일 것입니다. 학교 수업 시간에 배우는 내용은 미리 배웠거나 책으로 접하지 않은 이상 대부분 학생들에게 낯선 내용입니다. 이 내용을 혼자 알아낼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가 가르쳐 준다면 더 빨리, 더 쉽게 배울 수 있겠지요. 학교는 교육과정이라는 낯선 내용을 누구에게나 일단 가르쳐주는 곳입니다. 공부를 잘하기 위해서는 이 기회를 최대한 살리고 활용해야 합니다. 한 번 배울 때를 놓쳐 공연히 같은 내용을 자꾸 배우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초등학생은 효과적으로 배우고 익힌 후에 나머지 시간은 열심히 놀기도 해야 하니까요.
물론 학생의 입장에서는 선생님의 수업이 때로 만족스럽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부족한 수업이라 하더라도 학생 혼자서 공부하는 것과 학교 선생님께 배워서 공부하는 것 중 나은 편은 분명 선생님께 배운 후 그것을 바탕으로 공부하는 쪽일 것입니다. 초등 교육에 더 많은 지식을 가진 교육주체는 아무래도 학생이 아닌 선생님일 테니까요.
학교에서 수업 시간에 공부하지 않은 학생은 하루 중 공부하기 가장 좋은 시간에, 교육과정이 가장 정확히 반영된 수업을 놓쳐버린 셈입니다. 반면 수업을 잘 듣고 참여한 학생은 집에 돌아올 때쯤이면 이미 어느 정도의 이해라는 발판 위에 서 있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이 학생들에게는 수업 시간 동안에 내용에 대한 이해가 상당 부분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후에는 그 이해를 발판 삼아 더욱 심화된 공부를 할 수 있습니다.
EBS <학교란 무엇인가>의 0.1% 학생들과의 인터뷰에서도 이 학생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비결은 바로 학교 수업에 집중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는 지역이 다르고 학교가 달라도 그들은 모두 학교 수업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주로 공부하는 장소는 학교였으며, 많은 학생들 중에서도 이 학생들의 수업 집중도는 남달랐습니다. 가장 기본적이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이 하지 않는 일이라고 덧붙이면서 말입니다.
복습 기반의 자기 주도 학습에서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일은 바로 '수업시간에 잘 배우는 일'인 것입니다.
<Image by AJS1 from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