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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디이 Nov 06. 2023

추천서, 하나로 다 되는 나라가 사실 미국

미국 시골 생활 절망편 (1)

학연, 지연, 혈연- 미국 사람들이 더 인맥을 중시한다는 걸 한국사람들은 정작 잘 모른다. 미국 입시나 입사 과정이 예상과 다르게 고리타분하고 전통적이라는 걸 경험하면 절망하게 될지도 모른다. 미국에선 추천서와 인맥 하나면 게임오버. 근데 정말 그럴까?


니 부모 뭐하시노? 미국에서는 아직도 영화가 아니라 현실이다.


    미국으로 유학 갈 생각을 하고 한창 대학원 입시 지원서를 작성하고 있을 때였다. 가장 가고 싶었던 학교의 대학원 입시 지원 사이트에서 정보를 기재하던 중, 내 눈을 의심하게 되었다. 부모님 정보를 쓰는 란이 있었고 그 옆에 Occupation (직업)이라고 적혀 있었다. 엄마와 아빠의 직업을 적으라는 것이었다. 순간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었다. 요즘 한국에선 직장 지원할 때도 대학 지원할 때도 부모님 이야기를 안 쓰도록 유의하는데, 미국 그것도 자유로운 분위기로 유명한 서부의 학교에서 부모님 직업을 적으라니, 이게 말이 되나??? 한국이었으면 당장 신문에 날 일을 이렇게 버젓이 아직도 하고 있다고? 이런 황당함은 나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미국에선 학연, 지연, 혈연- 그 외 모든 인맥이 본인의 실력이었다.




그들만의 리그, 미국의 인맥 문화


    미국은 마치 능력과 성과주의, 직장에서 사람 뽑을 때 나이도 성별도 사진도 보지 않는 아주 평등한 나라로 인식된다. 심지어 미국에선 학벌도 중요하지 않다고? 주변의 미국인에게 물어보면 대개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교과서적인 반응일 것이다. 과연 요즘 시대에 대학 그딴 거 필요 없어라고 당차게 말할 미국인이 몇이나 될까? 미국에서 직접 살아보고, 교육받으며, 직장을 구하다 보면 이런 건 다 한국인들이 만들어낸 우리만의 착각, 미국에 대한 지나친 환상이라는 걸 몸소 체험하게 된다.


여기도 다 사람 사는 곳이며, 학연, 지연, 혈연, 그리고 한국엔 잘 없는 추천서 문화까지… 그들도 규모가 크고 체계적인 곳이라면 스펙이라고 할만한 건 당연히 다 따진다. 지원자의 학벌이 좋은데 굳이 마다할 이유가 있을까? 학벌만 보고 뽑진 않더라도, 눈길이 한번 더 가는 건 미국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다.


명문대생이 본인 학교 얘기를 빼놓지 않는 건 미국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이러한 인맥 문화는 의외로 본인의 뿌리와 전통 (Family tradition)을 꽤나 중시하는 가족 중심의 미국 문화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뉴욕의 어떤 사립 대학교의 경우에는 직계 가족이 동문인 경우 지원서에 적어낼 수 있으며, 입학 후에는 무려 대학등록금 가족 할인도 받을 수 있다. 미국인들에겐 가족들이 대대로 같은 학교에 가는 것이 입학 비리가 아닌 가문의 전통으로 여겨진다. 예를 들어, "We, the Bernards (Bernards 성씨 가족이란 뜻), are pround to be an alumni of XX university."라는 식의 우리 가족이 XX 대학교의 동문인 게 자랑스럽다는 말도 스스럼없이 한다. 유명 사립 대학교의 기념품 샵에선 하버드 출신 엄마, 아빠, 할아버지, 할머니 등등 온갖 버전의 제품들이 인기 상품이다.

어느 대학교든지 기념품 샵에선 그 학교와의 학연을 보여주는 기념품 티셔츠나 머그컵을 판매한다.


본인 차에 출신 대학교 로고뿐 아니라, 출신 지역이나 고향 이름을 붙이고 다니는 경우도 꽤 쉽게 볼 수 있다. 스몰토크의 흔한 주제 중 하나가 본인이나 가족이 어떤 학교를 나왔고 어디 지역 출신인지를 얘기하는 것이다. 자기 지역 티셔츠를 입고 그걸 알아보는 고향 사람들과 대화하며 급속도로 친해지는 게 전형적인 베이비 부머 세대의 미국 사람들이다. 따라서 미국인들에겐 이런 학연, 지연, 혈연을 활용하는 네트워킹 자체가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미국이야말로 모든 것이 알음알음 인맥으로 해결되는 곳이다.


    내가 대학원 공부를 했던 동부의 시골은 미국의 전통적인 지연과 학연을 직빵으로 느끼기에 최적인 곳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 학계에 인맥이 전무했던 나는 괜스레 입학 초기부터 속으로 좌절했었다. 한 예로, 우리 과의 한 젊은 조교수는 미국 인맥의 집합체가 만들어 낸 케이스였다.


매 학기 첫 수업시간마다 그 교수가 항상 빼놓지 않고 보여주는 슬라이드가 있었다. 바로 대학교 (학부) - 하버드 대학교 (박사) - 예일 대학교 (박사 후 과정) - 다시 같은 대학교 (교수) 이렇게 원으로 이어지는 본인의 커리어를 자랑스럽게 설명하곤 했다. 나이 든 교수님들에겐 제자가 본인의 모교로 돌아와 교수가 된 셈이라 그는 평소 이쁨도 많이 받았다.


저 정도 학벌이 되어야 외국인인 내가 미국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 아닐까?



막상 수업을 듣는 학부생의 대부분은 그의 학벌 자랑에 그리 관심이 없었다. 미국의 대학교수는 소수의 유명 사립대학이나 연구 중심의 대학원이 아니라면, 한국처럼 엄청난 명예를 가진 직업은 아니다. 학부생들에게 대학교수란 오히려 학교 선생님들보단 감정적으로는 먼 존재이자 전공과목을 가르쳐주는 마치 학원 강사와도 같은 느낌이다. 학생 평가가 교수 심사에 들어가기 때문인지 학부생에겐 권위적인 경우도 별로 없다 (물론 대학원은 다른 세상).심지어 학교 규모나 과 특성에 따라 본인이 따는 연구 그렌트로 월급을 대신하는 등 경우에 따라선 그리 안정적인 직업이 아니기도 하다. 개인 사업을 본업처럼, 교수는 부업처럼 하는 이들도 많다.

미국 대학교는 대형 강의인 경우 대학원생 조교들이 과제 채점과 질문, 시험 관리를 한다. 오히려 조교들이 학생들을 더 많이 대면하기도 한다.


미국도 좋은 학벌을 대단하다 여기지만, 다양한 커리어와 삶의 모습이 존재하다 보니 한국처럼 무조건 떠받드는 분위기가 아닌 것이다.


대학원 과정이었던 나는, 그래도 붙기 어려운 동부의 탑 티어 학교를 두 곳이나 밟은 그의 커리어가 대단해 보였다. 하지만, 그 내막을 알아도 과연 그렇게 생각했을까?


알고 보니, 그가 조교수 임용이 가능하도록 끌어준 것은 그의 지도교수였다. 그의 박사과정 지도교수는 지금도 메인스트림을 이끄는 유명한 하버드 교수 중 한 명이다. 학계에서 하버드대 추천서가 안 먹힐 수 없다. 하지만, 그가 독립하여 조교수가 된 이후엔 제대로 된 논문을 한편도 발표하지 못했고, 결국 교수직에서 잘리고 말았다. 그동안 하버드나 예일의 동료 교수들이 방문할 때마다 본인의 인맥을 과시했던 것에 비해 실망스러운 결과였다. 이후 그는 시위라도 하듯 한동안 수염을 길게 기르고 다녔고 사람들과 대화도 잘 나누지 않았다.


그는 본인의 영광스러웠던 커리어가 사실 지도교수의 그늘 아래여서 가능했단 사실을 이젠 인지하고 있을까?


그의 강의력은 뛰어났었다. 본인이 어느 정도 똑똑하고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조교수 임용까지 가능했을 것이다. 운 좋게 대가를 일찍 만난 덕에 박사과정과 포닥까지는 지도교수의 명성과 인맥으로 커버가 가능했지만, 단지 연구자가 될 정도의 실력이 아니었던 것이다.


미국에선 종신 교수가 되고자 하는 테뉴어 트랙 (Tenure track)에서 논문 성과가 나오지 않아 잘리는 경우는 꽤나 흔한 일이다. 당시 우리 학과 사람들도 어느 정도 예상된 결과라는 듯 수군거렸다. 2021년 기준 미국 테뉴어 트랙 조교수 중 약 1/4 만이 종신 교수직을 얻었단 통계가 있다. 테뉴어 트랙에서는 더 이상 누군가의 지도 없이도 독립적인 연구자가 되었는지가 주 평가 기준이다. 아무리 인맥이 좋아도 본인이 스스로 연구 성과를 낼 능력이 있어야 한다.


보스턴 케임브리지로 가는 다리. 그가 쉽게 걸어간 길을 누군가는 능력이 있어도 인맥이 없어 발도 디디지 못했을 것이다.



 

현실적인 이유가 있는 추천서 문화


인맥과 추천서로 기회를 주는 것 자체가 나쁘다고만 볼 수는 없다.     


    사람이 너무 많고 다양한 배경이 존재하다 보니, 비슷한 공감대를 찾을 수 있어 적응이 쉽고 성공의 경험이 유사한 케이스를 빨리 솎아내기 위한 과정일 수도 있다. 미국인들이 모르는 사람보다 아는 사람과 일하는 것을 선호하는 이유는 아마도 너무나 많은 인구수 때문에 비슷한 수준의 지원자가 너무나도 많거나 혹은 리스크를 줄이고자 하는 방편일 것이다.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대학원에서 학부생 연구원을 뽑다 보면, 엄청나게 뛰어난 학생을 만날 일은 거의 없다. 대부분 같은 학교에 비슷한 전공이라 선별에 어려움을 겪는다. 그래서 주로 면접을 통해 성격을 보거나, 가능성이 있다면 일단 다 뽑기도 했다. 그렇게 뽑았던 학부생이 불성실해서 골머리를 앓았던 적이 있다. 시간 엄수가 필수인 데이터를 모으는 과정인데 말없이 나오지 않고 거짓말을 하는 등 문제가 많았다. 최대한 같이 가려 했으나 주변의 반대에 결국 가르치기만 하고 내보내야 했다.


입학이나 입사 시험에선 모든 지원자를 다 뽑고 시행착오를 겪을 수 없다. 나름의 스크리닝 방식도 있겠지만 수많은 지원자 중에 지인의 추천이 강력한 선별력을 발휘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엔트리 레벨인 경우엔 경험이 고만고만해 눈에 띄는 사람을 찾기 어렵고, 시니어 레벨의 연구원을 뽑을 때는 스킬이 많아도 랩에 딱 맞는 경험을 가진 사람을 찾기가 어렵다. 이러나저러나 원하는 사람을 뽑는 건 어렵다. 지인의 소개가 뽑는 사람의 입장에선 1차적인 불확실성을 제거한 상당한 플러스가 된다.




공채가 없는 미국의 기업에는 아예 돈을 주는 추천인 제도가 있다.


    미국 회사에서는 직원이 소개한 지인이 입사하게 되면, 회사에 따라 추천인에게 1000불에서 10,000불 (약 백 삼십만 원에서 천 삼백만 원 사이)의 추천비를 지급한다. 회사의 직원을 보증인처럼 두고 우수한 인재를 영입하기 위한 전략이다. 내 동료가 잘 아는 사람이 일 잘한다며 추천하는 경우라면 누군들 같이 일해보고 싶지 않을까? 한국에서도 다른 회사나 팀으로 이직하는 경우에 아무래도 동료나 지인의 추천이 제일 쉬운 길이듯 말이다. 미국 직장 생활에서 네트워킹이 중요한 이유이다. 본인의 평판과 네트워킹이 중요하기 때문에, 함부로 지인을 추천하는 경우나 지인 추천으로 입사한 회사를 금방 그만두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다.


미국인들은 본인이 추천 대상자와 직접 일을 해보지 않은 경우, 추천서 요청을 정중하게 거절하는 경우도 많다.


추천서의 경우엔, 쉽게 써주는 것도 아니다. 자신의 신용을 보증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현재 직장에 입사할 때 엔트리 레벨인데도 무려 5명 이상의 업무 관련 지인들로부터 추천서를 받아야만 했다. 그중 3명이나 반드시 나와 일을 같이 해 본 매니저 레벨이어야 해서 추천서를 받기까지 꽤나 애를 먹었다.


예전에는 말 그대로 추천인이 쓰는 편지였지만, 요즘은 그 마저도 "내가 평생 동안 가르쳐 본 학생 혹은 일해본 직원 중 몇 위" 이런 식으로 정량화하여 작성한다. 직장 입사의 경우엔 아예 암호화된 링크를 통하여 추천 대상자의 업무 능력을 여러 가지 카테고리별로 나누어서 세세한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모르는 사람이 대충 써줄 수도 없는 답변들이다. 그 내용을 보면 대략 지원자가 어떤 능력이 높으며 어떤 성향인지를 파악할 수 있도록 쓰게 되어있다.



유학 입시 때는 한국에서 받은 나의 추천서들이 상대적으로 약한 것을 탓했다.


   미국 유학 준비를 시작했을 땐, 주변에 일찍부터 유학을 했다거나 영어가 네이티브 수준이고 인맥도 좋은 지원자들을 부러워했다. 


미국 인맥의 중요성을 알게 되면서 더 안달복달했었다. 유명한 교수가 있는 대학원의 프로그램에 들어가고 싶었던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인맥 때문이었다. 내 전공 분야의 빅네임 (Big name; 학계에서 어떤 분야의 대가를 의미)의 연구실에서 인맥을 쌓고 그다음 단계를 쉽게 가고자 했다. 그래서 떨어진 후 내 커리어를 벌써부터 망친 것 같아 안타까웠고 괜히 억울했다. 미국의 지원자들은 지도 교수들끼리 서로 이미 다 아는 상태일 텐데, 나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고 같은 연구실 출신이더라도 성실하고 능력 있는 연구자들만이 살아남는 것을 보게 되자 생각이 바뀌었다. 정말 추천서만으로 모든 것이 패스였다면, 유명 연구실 출신의 사람들은 걱정 없이 박사 후 과정을 하고 교수가 되었을 것이다.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게다가 미국 대학원에서 앞서 말한 젊은 조교수의 커리어가 인맥의 여부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을 지켜보며, 역시 실력은 드러나기 마련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젠 미국에서 온갖 인맥을 동원하여 어떤 자리까지 갈 수는 있더라도, 본인의 실력만이 끝까지 자리를 지킬 힘을 만든다는 걸 안다.


그래도 역시 인맥의 힘은 쎄다. 나중에 내 자녀라도 보내고 싶은 마음에, 하버드 대학의 유명한 동상 발을 터치하고 왔다. 효과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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