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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디이 Nov 12. 2023

지방민, 미국에서 쉽게만 살면 재미없어 빙고!

무조건 당신만 모르는 미국 시골 생활 절망편 (2)


어머, 이거 때문에 여기까지 오신 거예요?


    미국 시골에서 유학생활을 할 때, 내 주변은 나를 설레게 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도시가 고팠다. 도시의 소음, 북적거리는 거리, 활기찬 분위기, 아무도 서로를 신경 쓰지 않는 무관심과 내 인생의 큰 즐거움 중 하나인 미술 전시까지... 그리고 그나마 가까웠던 보스턴에는 내가 느끼기에 더 다양하고 흥미로운 생각과 경험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도시에서의 대화에선 스파클 (Sparkle)이 반짝였다. 집과 학교 만을 오가는 나의 일상보다 도시에 사는 이들의 일상이 더 생기있고 즐거워 보였다.


그런데, 열이면 열, 도시에서 하는 이벤트에 참여할 때마다 항상 듣는 소리가 있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내가 초대받지 못한 장소에 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같은 질문이 반복될 때마다 애써 괜찮은 척하며, 친구를 보러 오는 김에 왔다고 둘러댔다. 사실일 때도 있었지만 아닐 때도 있었다. 어차피 상대는 내가 뭐 때문에 여길 왔든 관심도 없을 테니 말이다. 물론 아이스 브레이킹을 하기 위한 질문일 수도, 뭔가를 겨냥하고 한 질문일 수도 있었다. 상대의 질문 의도가 와닿지 않았던 것만큼이나, 내 감정도 확실하지 않았다.


도시민들의 질문은 마치 주황색으로 바뀐 신호등 같았다. 더 이상 건너 오면 안된다는 그 어떤 주의.

 



도시에 방문할 때마다, 꽤 오랫동안 원인 모를 서러움에 잠기게 되었다.



그럼에도, 잊을만하면 나의 지적 호기심을 유혹하는 학계 행사와 사교 모임 때문에 보스턴으로 향하곤 했다


그 감정은 날카로웠지만 또 옅기도 해서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깨닫지 못했다. 도시에 방문할 때마다 도르마무 (Dormammu: 마블 영화 캐릭터로, 계속해서 시간을 되돌리는 우주 파괴자)와의 만남처럼 다시 반복될 뿐, 어떤 해결책도 없었다. 도시에 대한 그리움은 시골 생활을 접어야만 끝날 것 같았다. 하지만, 고작 도시에 대한 열망 때문에 유학생활을 도중에 그만둘 수는 없었다. 끝나지 않았던 결심과 고민을 되풀이하며, 다시 그 감정을 꺼내볼 수 없도록 굳혀간 것은 나름의 방어기제였다. 결국 시골 생활을 졸업과 함께 탈출하기까지, 무엇 때문에 도시에서의 짧은 즐거움의 잔상이 애매하고 아리송한 자책과도 같은 감정을 남기는 건지 알아내지 못했다.


지방민의 설움은 마치 얇은 종이에 순식간에 베인 상처와도 같았다. 치명적이진 않지만, 자꾸 생각나고 다시는 겪기 싫었다.

보스턴의 밤과 석양은 같았지만, 도시 보정으로 내가 살던 시골의 것보다 아름다워 보였다.


몇 년이 지나고 내가 다시 도시로 돌아오고 나서야 이런 감정을 주변에 털어놓을 수 있었다. 미국인 지인은 "It's only two hours by car. It's nothing."이라고 그렇게 먼 거리도 아닌데 굳이 상대방이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며 의아해했다. 참고로 이 지인은 꽤나 시골 동네 중에 하나인 콜로라도 출신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 감정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듯했다. 한국에서 서울과 대전 사이 2시간 거리라면 정말 멀게 느껴지지만, 미국은 차로 갈 수 있는 거리라면 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도시 근교에 사는 사람들은 1-2시간 거리를 차로 통근하기도 한다.


도시인들에게 축적되었던 얄미움들을 처음 되돌아보았을 땐, 그런 말을 들었던 상황과 그 속의 대상들이 뒤늦게 미웠다. 한참을 다시 생각해 보다가 알게 되었다. 그들의 질문에서, 한국에선 도시에 살았던 나의 모습이 비쳐 보였다. 나는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왜 그들의 마음을 알 것 같을까?




자신이 사는 도시에 대한 자부심이 있는 만큼, 도시 밖 세상에 관심이 없는 듯하다.


    미국도 도시에 따라 거리에 대한 사람들의 관점에 차이가 크다. 다른 도시들은 모르겠지만, 유독 유학생들과 학생들이 많이 사는 보스턴이나 뉴욕 맨해튼에 사는 뉴요커들의 경우엔 거주 지역을 벗어나는 걸 부담스러워하는 경향이 있다. 이해는 간다. 나도 서울에 살 땐 경기도권에 갈 생각조차 안했으며, 뉴욕에 오니 브룩클린을 가는 것 조차 귀찮았으니까.


사는 것 자체가 뿌듯하고 자랑스러운 동네였다면, 정작 나도 자부심에 취해서 그랬을지 모른다 


예를 들어, 보스턴 케임브리지는 여의도 면적의 약 2배 정도에 해당하는 크다지 크지 않은 동네이다. 그런데 마치 서울에서 강남 사람들이 강북이 멀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거꾸로 케임브리지에 사는 학생들은 찰스강 너머의 보스턴 중심지에 대한 심리적 거리감이 컸다. 그들의 생활반경은 케임브리지 안에 머물렀다. 보스턴의 번화가이자 중심지인 비컨 스트릿 (Beacon street)같은 곳으로 종종 놀러는 가도, 누군가를 만나러 중심지까지 나온다는 건 그들에게 엄청난 일이었다. 그런데 내가 2시간을 차로 달려 방문한 것 자체가 그들에겐 무척이나 놀라운 일이었을지도.


뉴요커들은 한술 더 떠서, 뉴욕 안에서도 작은 섬인 맨해튼에 사는 게 아니라면 뉴요커가 아니라고 할 정도로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마치 중국 상해 사람들이 중국 본토와 다른 나라처럼 분리하여 생각하고 스스로를 상해인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우리에겐 이러나 저러나 다 같은 중국인인데 말이다. 미국 드라마 <How I met your mother>에서 주인공 테드가 뉴저지에 사는 여자를 만나는 에피소드에서, 결혼하면 뉴저지에 살게 될까 봐 연인과 헤어져야 할지 고민한다.


뉴요커에게 강 건너 뉴저지 사람들은 "Nobody"이다.


당시에는 이런 도시 사람들의 생각 자체가 나에게 상처를 주었다. 내가 사는 시골이 문화생활을 거의 못하는 곳이라 너무 답답했고 도시 바이브가 항상 그리웠다. 그래서 도시에 갈 때마다 누군가가 내가 그 도시의 일원이 아니라 방문객이라는 것을 언급하는 것이 싫었다. 시골에 사는 것이 나의 자존심에 약점이 되었는데, 누군가가 그걸 자꾸 들춰내는 것 같아서 거북했던 것이다. 누군가가 내가 어디에서 왔다는 식의 가벼운 언급에도, 나에 대한 남들의 시선이 꽂혀서 상처를 남겼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누군가가 사는 지역을 부러워하는 것 자체가 내가 경험하지 못했던 감정이었고, 누군가가 내가 사는 지역에 관심이 없는 것 또한 생소한 반응이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한국에서 구성해 온 나의 정체성에 서울의 어떤 동네에서 산다는 것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누군가 내가 사는 동네를 언급하며 어떤 선입견이나 추켜세우는 듯한 언급을 하면, 민망하다 여겼고 부정하기에 바빴다. 아무도 관심이 없고 굳이 살고 싶어 하지 않는 미국 시골 동네에서의 생활을 끝내고 나서야, 나는 이제껏 교만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내가 한국에서 누리던 것을, 더 이상 누리지 못하고 나서야 알게 된 낯선 아픔이었다.


한국에서 살아온 기간 동안, 내 노력이 아닌 부모님의 삶의 결과로 얻은 지리적 편리함에 너무 익숙해졌다. 살던 동네가 주는 어떤 이미지에 너무 파묻혀버려서, 그 이점을 자연스럽게 나를 소개하는 데 사용했다. 물론 그게 나쁜 것은 아니다. 환경을 잘 활용하는 것도 능력이기에. 어느 나라이든 누구든지, 여러 재미있는 일이 일어나는 대도시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지 생전 들어본 적도 없는 어떤 지역에 대한 그저 그런 일상을 알고 싶지는 않을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이전에 대처해보지 못한 새로운 종류의 감정 때문에, 자존심에 입은 상처를 곯도록 놔두었다는 것이 시골 살이를 감당했던 나에게 미안하다. 나 스스로라도 들여다보았어야 한다. 지금에서야 천천히 이렇게 나의 옛 감정을 이해하며 상처 하나가 비로소 나아가고 있다. 더불어, 나는 완전한 도시에 파묻혀 사는 것보다 언제나 도시에 방문할 수 있는 조용한 교외에 사는 걸 선호하는 사람이라는 것도 알아가고 있다. 내 취향도, 감정도 머물지 않고 변한다. 언제까지고 옛날의 얕은 쓰라림을 계속 문지르고 있을 순 없다.


이젠 보스턴의 밤거리가 부럽지 않은 뉴욕의 맛을 제대로 즐겼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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