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경험에서 중요한 자유의지
지난 주말, 8년째 알고 지내는 시각장애인 선생님과 함께 한 박물관에 방문했다. 나를 포함한 동행자가 몇 분 더 있었고 모든 전시품에 음성해설이 있는 것은 아니니까 옆에서 전시 내용을 구두로 설명해 드렸다. 그런데 전시품들의 설명을 읽어보니, 물건이 어떤 용도인지 설명은 되어 있지만 그것의 모양이나 크기 등은 전혀 설명이 되어있지 않았다. 아마도 관람객이 '눈으로 보고 있다’라는 것을 전제로 전시 보드도 제작이 되었을 테니 박물관 측에서도 기구의 형태나 소재와 관련된 정보를 전달할 필요를 못 느꼈을지 모른다. 그런데 음성해설로 들어봐도 마찬가지였다. ‘발판’이 있다는 정보나 ‘막대’라는 정보는 스쳐 지나가듯 소개하지만 결국 여러 생각이 떠오른다. “아, 그래서 이게 어떻게 생긴 건데?” “음, 쟁기처럼 갈고리가 많은 건가?” “크기가 한 손으로 쉽게 들고 다닐 수 있는 건가?”
'마법 빗자루 같기도 하고, 엄청 무거워 보이네. 혼자 들 수 있을까?'
위 사진의 '갈이 농기구'를 봤을 때 내가 순간적으로 느꼈던 생각이었다. 호기심이 생겨 설명을 쭉 읽어 내려가보니 용도와 관련된 설명이어서 '선생님은 이게 그래서 어떤 모양인지는 전혀 모르시겠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당시에는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막막하여 전시품의 크기나 시각적으로 느껴지는 무게 등에 대해 제대로 설명을 해드리지 못했다. 되돌아보면 말로 어떻게 해도 내가 느꼈던 감흥은 비슷하게 얻으실 수가 없었을 것 같다. 시각적 정보가 전달하는 임팩트가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시각적으로 인지하지 못하더라도 높은 수준의 전시 관람 경험을 얻을 수 있을까? 음성해설이 되어 있는 전시품 보다 되어있지 않은 전시품이 더 많다는 것, 또한 음성 해설을 듣더라도 머릿속으로 이미지가 명확히 그려지지 않는 경우를 고려해 볼 때 이미 시각장애인의 관람 경험은 비장애인이 경험하는 것과 현저한 차이가 있다. 이것은 현장에서 관람하는 전시 경험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디지털 경험에도 적용된다.
눈으로 화면을 볼 수 없는 경우, 이미지에 대한 설명을 직접 글로 설명하여 청각으로 인지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대체텍스트라고 한다. 대체텍스트가 전달하는 정보의 수준에 따라 경험의 차이가 생긴다. “사람, 커피잔, 의자”라고 설명해 주는 것과 “긴 검정머리의 사람이 파란색 커피잔을 들고 의자에 앉아 있습니다”라고 설명해 주는 것을 비교하면 머릿속에 그려지는 이미지의 선명함이 확연하게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노란색 버튼”이라고 설명하는 것과 “노란색 확인 버튼” 또는 “노란색 취소 버튼”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애플리케이션의 실행 과정 중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느냐 없느냐를 판가름하는 중요한 정보가 되기 한다. 결국 정보에 대한 설명이 사용자경험을 극대화할 수도 있고 바닥으로 떨어뜨릴 수도 있는 결정적인 요소가 될 수 있다.
정보 전달은 제품 설명서에서도 명확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제품 조립 설명서에서 “이미지 1과 이미지 2처럼 진행해 주세요.”라고 작성된 문구가 있다면 이는 이미 사용자가 눈으로 이미지 1과 이미지 2가 무엇인지 인지하고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하지만 “이미지 1처럼 밑판을 뒤집고 이미지 2처럼 밑판 각 모서리 끝에 있는 구멍에 나사를 조립해 주세요”라고 설명되어 있는 것은 사용자가 이미지 1과 2를 직접 보지 못하더라도 머릿속으로 충분히 상상하며 조립할 수 있게 된다. 완전한 경험의 차이다. 전자는 브랜드에 대한 좌절감과 실망감을 안겨주고, 후자는 브랜드에 대한 충성도를 높이는 계기로 이어질 수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Seeing Ai와 같은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시각장애인 사용자도 텍스트 정보를 편리하게 인지할 수 있다. 정확도도 최근 들어 더 높아졌다. 따라서 모든 정보가 시각장애인도 충분히 인지할 수 있도록 작성되어야 한다. 분명 이러한 도구는 시각장애인뿐 아니라 노안으로 눈이 침침한 어르신들에게도 도움이 된다. © Microsoft
잠깐 다시 전시 경험으로 돌아가보자. 시각장애인 관람객에게 “아니 그럼 도슨트 들으면 되는 거 아니에요?”라고 물으신다면, “병원 갈 때 왜 혼자 가요? 항상 사람 같이 가면 되잖아요?” “걸어 다닐 때 옆에 보호자 항상 동행하면 되잖아요." 등과 똑같은 질문이다. 이 질문들은 굉장히 중요한 한 가지를 놓치고 있다. 장애 유무와 관계없이 사람은 누구나 자유 의지에 따라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자유 의지란 철학적인 논의라기보다는 말 그대로 자신이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특히 행동의 결정에 대한 자유 의지를 강조하고 싶은데, 내가 원할 때 이동을 하고, 식사를 하고,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자유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매번 내가 의지적으로 행동하고 싶은데 사람이 옆에서 불가피하게 보조를 해야만 한다면 심리적으로도 위축되게 된다. 따라서 ‘독립적으로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자유 의지를 실현하는 것이 장애인, 어르신 등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작년 가을 진행했던 강의에서 받은 두 가지 질문이 있었다. 첫 번째로 질문하신 분은 청각장애인이었다. “저는 난청을 가지고 있는 청각장애인인데 수어는 하지 못합니다. 이런 경우 어떻게 정보가 제공되어야 하나요?”. 당시 강의실에는 수어 통역사가 옆에 계셨다. 그런데 실시간 타이핑은 제공되지 않고 있었다. 행사 준비하는 측에서 청각장애에 대한 다양한 스펙트럼에 대해 인지하지 못하신 것 같았다. 내 대답은 이랬다. “강의에 대한 설명이 당연히 텍스트로 제공되어야 합니다. 정보를 어떤 방식으로 취득할지 선택권은 누구에게나 주어져야 합니다. 의사 결정을 하는 데 있어서는 선택권이 너무 많은 것은 사용자 경험을 떨어뜨릴 수 있겠지만, 정보를 취득하는 데 있어서는 선택권이 여러 가지인 것이 좋은 것 같아요."
사실 우리가 강의 정보를 얻는 방식에 있어서 선택권이 대단히 여러 가지는 아니다.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는 두 가지 이거나 많으면 세 가지 정도 될 것이다. 만약 정보제공자가 정보에 대한 여러 가지 선택지를 마련하기 어려운 경우 우선은 확장성이 넓은 편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시각장애인 중에는 점자로 정보를 취득하는 분도 있지만 점자 학습이 되지 않은 중도장애인 분들도 많이 계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음성해설과 같은 확장성이 넓은 청각정보를 제공하는 것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청각장애인 참석자는 눈으로 볼 수 있으니, 강의에 실시간 자막을 제공하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
두 번째 질문도 기억에 남는다. 강의장을 운영하시는 담당자 셨는데 “여기 행사장 입구에 점자 블록이 깔려 있는데, 유아차를 끌고 오시는 분이나 휠체어 이용자분들이 입구 진입 시에 불편감을 느끼시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에 “배제되는 사용자의 입장을 생각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사실 유아차나 휠체어 이용자분들이 입구 진입로에 점자블록이 깔려 있는 것에 약간의 불편한 느낌은 들 수 있지만 강의장까지 못 오시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점자블록이 없다면 혼자 방문하는 시각장애인의 경우 강연장 이용에서 배제가 되는 셈이다. 따라서 결정을 내릴 때는 배제되는 사람들이 어떤 상황에 놓이게 될지를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 조금의 불편이 있다 할지라도 문제를 감소시키는 것이 우선순위가 되어야 한다.
건물 내부에 점자블록이 깔려 있는 곳들은 많지만, 이것이 진짜 사용자의 입장을 고민한 것인지 의구심이 들 때가 있다. 점자블록은 시각장애인이 보행하는 과정 중 정확한 보행의 위치와 방향을 결정하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독립적으로 공간 내에서 원하는 방향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 목표다. 그런데 박물관이나 전시장 등을 방문할 때 자세히 관찰해 보시길 바란다. 점자블록은 일부 문 앞, 화장실 앞, 계단 앞 몇 군데에만 설치가 되어있다. 전맹 시각장애인이 박물관 내 독립적인 이동을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함께 다니는 것이 전제가 되어 모든 것이 설계가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바꾸어 생각해 볼 때 설치된 점자블록들은 없어도 상관이 없다는 얘기가 된다. 실제로 나와 함께 다닌 시각장애인 선생님은 우리가 옆에서 동행하다 보니 점자블록이 필요 없으셨다.
화장실과 문 앞에는 점자블록들을 철저하게 설치해 놨는데, 막상 광활한 전시장 내부나 이동 통로에는 아무런 것들도 없었다. 이것이 진짜 사용자를 위한 디자인일지 되돌아봐야 합니다. 해결 방안은 분명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결국은 진정성이다.
점자블록 설치 시 비장애인 보행자와의 관계, 미관 등 여러 가지 요소를 고려해야겠지만 점자블록을 꼭 모든 곳에 완벽하게 깔지 않더라도 개선 방법은 분명히 존재한다. 결국은 진정성의 문제다. 진짜 사용자를 고려하고자 한다면, 여러 장애 유형의 사람들과 함께 지속적으로 전시 경험을 체크하고, 안내 가이드나 음성 서비스에 어떤 점을 개선해야 하는지 파악해야 한다. 지난 MSV 3호에서 인터뷰했던 글레이저 칠드런스 뮤지엄 관계자분의 코멘트와 함께 이번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박물관을 높은 접근성과 포용성을 갖춘 공간으로 만드는 것은 저희가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안전하고, 깨끗하고, 재미있는 공간에서 노는 것은 모든 아이에게 해당하는 권리니까요. 장애인법(Americans with Disabilities Act)에 맞게 박물관을 만들고 있고 이런 법이 있어서 정말 기쁘지만 장애인법은 정말 최소한의 조건이에요. ‘당연히 이 정도는 해야 한다.’는 수준의 것들이죠. 글레이저가 해야 할 일은 그 법을 넘어서 어떤 것을 할 수 있을지 묻는 것입니다.”
Kate White, Vice President of Marketing and Creative , MSV3 <Play> 136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