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클루시브 디자인 인사이트 02 숨겨진 Hidden
사람들은 흔히 휠체어를 사용하거나 흰 지팡이를 짚고 있는 사람들을 장애인으로 생각한다. 반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경우 그 사람이 장애가 없다고 단정한다. 그러나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숨겨진 장애가 많다. 농, 난청 등 청각장애, ADHD, 난독증, 공황장애와 같은 숨겨진 장애는 포괄적인 디자인에서 매우 중요한 고려사항이다. 인클루시브 디자인 인사이트 02 숨겨진 Hidden 편에서는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지만 여러 가지 제약을 경험하고 있는 장애와 이를 고려한 디자인에 대해 다룬다.
저녁 7시 30분, 15층 오피스텔 건물에 불이 나서 어디선가 사이렌이 울린다. 그런데 12층에 있던 나는 방 안에 있지만, 그 사이렌 소리를 듣지 못하는 상황이다. 안내 방송도 듣지 못했다. 창밖으로 검은 연기가 위로 올라오다 보니 그새야 눈으로 확인했다.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어떻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을까? 혹은 안전하게 빠져나갈 수 있을까? 많은 농인 당사자들은 이처럼 화재 경보가 울리지만 듣지 못하는 상황. 혹은 엘리베이터에서 고립되어 와이파이가 단절된 상황은 정말 절망적일 것이라고 말한다.
시각과 청각 정보는 둘 다 중요하지만, 확실한 차이가 있다면 시각은 눈앞에 있는 정보만 받아들인다. 반면 청각은 내가 머물러 있는 공간을 넘어선 곳의 정보까지도 받을 수 있다. 반대로 정보를 발신할 수도 있다. 화재 경보가 건물 전체에 울려 퍼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처럼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이유도 막혀 있는 공간을 초월해서 상황을 알리기 위해서다. 자동차의 클락션도, 자전거의 벨소리도, 혹은 누군가의 외침도 경고를 위한 메시지가 된다. 그만큼 소리는 중요한 정보 전달 요소이자 정보를 입수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런데 소리를 완전하게 들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소리로 정보를 입수하거나 전달할 수 없다면 시각이 가장 중요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된다. 제1의 정보 취득 방법이기도 하다. 물론 촉각 정보, 즉 진동을 통해 서로 알리는 경우도 있다. 2022년 인터뷰차 만났던 영국의 농인 건축가 리처드 도허티 Richard Dougherty는 두 자녀를 포함해 네 가족이 모두 농인이다. 그래서 도허티는 가족이 함께 거주하는 집을 고를 때 일부러 바닥의 진동을 잘 느낄 수 있는 나무 바닥을 갖춘 100년 넘은 집을 선택했다. 소재의 특성상 나무는 콘크리나 타일과 같은 단단하고 밀도가 높은 재료보다 진동을 더 잘 전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로를 부를 때 가까이 가서 손으로 가볍게 터치할 수도 있지만 거리가 조금 있는 경우 바닥을 발로 세게 두드려 상대방에게 내 위치를 알린다고 말한다. 하지만 촉각정보는 이렇게 집 안의 특수한 상황이 아니고서야 실외에서는 쉽지 않다.
수어도 곧 시각적 정보다. 수어는 손과 여러 제스처를 사용하는데, 농 당사자인 임서희 님의 말을 빌리자면 이런 제스처뿐 아니라 비수지 기호, 즉 서로 소통하는 사람의 얼굴 표정 역시 매우 중요한 정보 수단이라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수어를 쓰는 사람은 수어 동작뿐 아니라 그 사람의 표정을 통해 상대방을 이해하고 소통한다. 또한 문자 메시지나, 온라인으로 보는 모든 정보들도 시각적 정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면대면 커뮤니케이션은 근거리에서 수어 또는 글로 쓰는 필담 등을 통해 가능하다. 또한 개인이 어떤 정보를 취득하는 것은 디지털 기기나 자막과 같은 도구를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주변 맥락과 상황에 대한 정보는 어떻게 시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은 관찰을 통해 가능하다. 그래서 당사자들은 주변을 빠르게 잘 살피려고 노력한다. 두 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한 농인 청년은 지하철에서 사람들이 자신을 매우 주목하고 있는 눈빛을 발견했다. 알고 보니 자신이 보고 있던 유튜브 영상의 볼륨이 매우 크게 잡혀 있었던 것. 빠르게 볼륨을 낮췄다. 또 다른 농인 청년은 지하철 내에서 계속해서 열차가 계속 오지 않는데 사람들은 줄을 길게 선 상황을 보고, 혹시나 역사 내에 문제가 있는지 옆에 기다리고 있던 사람에게 메모장을 활용하여 물어봤다. 이들은 모두 주변 사람의 움직임이나 표정, 평상시와는 다른 뭔가를 빠르게 잘 감지한다.
청각장애를 고려한 공간 디자인, 데프스페이스 deafspace의 원칙은 이런 관찰의 중요성을 아주 잘 설명하고 있다. 데프스페이스는 미국 최초의 청각장애인을 위한 대학이자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겔러뎃 Gallaudet University에서 탄생했다. 건축가 한셀 바우만 Hansel Bauman은 2006년 갤러뎃 대학 캠퍼스 디자인 프로젝트를 통해 청각장애인을 고려한 물리적 환경을 설계할 때 고려할 공간 디자인 원칙인, 데프스페이스 DeafSpace 개념을 만들었다. 데프 스페이스의 다섯 가지 원칙 중 시각 정보를 잘 전달하기 위해서는 감각 도달범위 Sensory Reach가 특히 중요하다. 이는 다양한 감각을 통해 탐색할 수 있는 공간의 크기를 말한다. 즉, 시각으로 말한다면 시각을 통해 최대한 넓은 지역의 공간 내 상황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도달 범위가 넓으면 넓을수록 심리적인 안정감이 생긴다. 내 주변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잘 알 수 있어, 불확실성에 대한 위험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데프스페이스의 지향점은 시각적 정보를 가장 중요하게 사용하는 개인에게 최대한 많은 단서 cue를 주는 디자인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디자인해야 할까? 쉽게 말해 개방되어 있어야 한다. 눈앞에 최대한 가리는 것들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높은 위치에서 조금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과 같이 말이다. 안전과 관련해서 사실 이 개방감은 약간의 딜레마가 있기는 하다. 개방된 공간이 안전할까? 폐쇄적인 공간이 안전할까? 이후에 소개하게 될 총기 사고가 났던 학교 리빌딩 프로젝트에서도 이 양면적인 문제를 놓고 내부적으로 많은 고심이 있었다. 우선 여기서 말하는 개방감이 잘 적용된 사례는 핀란드 오디 Oodi 도서관 내 디자인 사례를 볼 수 있는데, 이건 다음 글에서 설명하겠다.
인클루시브 디자인 인사이트는 총기 사고 초등학교 재건축 매니저, 우크라이나 전쟁 임시 보호소 건축가, 인도의 시각장애인 학교 건축가 등 지난 4년간 세계 10개국 접근성, 포용성 전문가와 국내외 장애 당사자 수 백 명을 인터뷰한 사례에 기반하여 깨닫게 된 인사이트를 공유한다.
글 김병수
미션잇 대표, MSV 소셜임팩트 시리즈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