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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일 May 06. 2022

# 00. 들어가며

물처럼 자연스럽게

취미로 그림을 그린 지는 오래됐다.

어려서 낙서 한 번 안 해본 사람이 있을까.

그림 보길 유난히 좋아했기에, 작화가 유독 뇌리에 남는 만화책을 따라 그리며 '낙서질'의 수명이 남들보다 조금 길게 갔다. 그 사이 먹은 나이만큼 시간도 흘러, 이젠 스캐너도 건너뛰고 액정 태블릿 어플리케이션으로 그리는 그림이 당연시됐다. 수정이 자유롭고, 레이어를 사용하며 구도에 구애받지 않는 디지털 드로잉은 혁명이라 부르는 것조차 머쓱해졌다. 생업의 사이사이 잡초처럼 빼꼼 고개 내미는 취미질에서는 시간 절약의 미덕만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게 디지털 드로잉은 픽셀로 쪼개는 노동에 가깝게 느껴졌다는 건 모순이지만 말이다.


디지털 노동에 매너리즘이 들기 시작한 건 역설적으로 그게 내 그림의 기술적 한계를 체감시켜줬기 때문이다. 엉성한 결과물을 그럴 듯 하게 매만지는 일종의 너름새 치트키(?)는 앱의 업데이트 주기만큼이나 도처에 널렸고, 어느 덧 그림 그 자체보다 도구와 테크닉에 매몰된 채 늘 거기서 거기인 내 그림들에 지겹다는 생각이 치밀던 어느 여름. ‘그리기’라는 행위 자체를 좀 더 체계적으로 다듬어 보고 싶어서, 성인 미술을 큼직하게 내건 화실을 난생처음 등록했다. 희망 작업으로 소묘와 수채화라는, 아주 모범적인 선택을 들이밀었다.

소묘는 기초 드로잉과 빛에 따른 형태감을 연습하고 싶어서, 수채화는 온전한 충동이었다. 화실 생활은 겨우 2개월을 채우고 소묘 한 장과 수채화 두 장을 남기고 끊겼지만, 며칠에 걸쳐, 몇 주에 걸쳐 한 장을 천천히 완성하는 그리기의 묘미를 되찾았다. 비로소 그림 그리기가 내게 휴식과 활력의 한 장이 되었다. 종이를 뚫고 들어갈 것처럼 수그렸던 고개를 들고, 자리에서 물러나 멀리서 바라보는 '거리두기'는 마치 분투하던 일상에서 잠시 물러나 전체를 바라보는 그것과 일맥상통하니까.


어마어마한 화소의 화려한 디지털 드로잉, 조금만 돈을 쓰고 시간을 들이면 3D 작업도 이젠 프로들만의 영역이 아니게 된 요즘-. 연필을 깎고, 지우개 가루를 날리고, 붓칠 하다 망해 가며, 되돌려지지도, 레이어 옮기기도 되지 않는 종이 위에서 끙끙대는 이것은 삽질이다. 낙서질에서 그림질로 힘겹게 넘어가려다 미끄러져 이젠 삽질이 되어 버린 이 파란만장한 취미질은, 그 지루하고 고단한 분투 속에서, 이따금 누추한 결과물에 잔뜩 의기소침해지기도 하는 내게 반짝이는 어떤 순간을 선사한다.

 

팬아트 그리기는 오랫동안 친구 같은 취미였다.


 내게는 늘 과정 그 자체가 중요했다. 그 경험을 통한 영감이, 한 번씩 바람처럼 머리를 휘돌고 나가는 '환기'의 순간이 소중했다. 결론만 얘기해, 그래서 Yes or No, 어느 쪽이야, 몰아세우는 사회, 결과물로 평가받는 숱한 일상사에서 남 모르게 상했던, 혹은 나 모르게 구겨졌던 마음 한 구석이, '그림질'의 과정을 통해 한 솔기씩 다림질 된다. 양파처럼 한 겹씩 들춰내버리는 느린 과정-시간의 공들인 칼질 앞에서 묵묵히 맞대하는 민낯의 초라함은 부담보단 홀가분함이다. '… 아, 괜찮아-.' 이유도 설명도 없이, 괜찮으니까 괜찮다는 그 한 마디만 진심을 담아 스스로에게 던질 수 있는 가뿐함이다. 지우개 가루 속에서 조금 더 다듬어진 선을 발견하고, 색을 올리는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번짐이 경계를 넘어 오묘한 색감을 만들어 가는, 이 철두철미한 아날로그의 순간들은 나를 다독여준다.


그 다독임의 순간들을, 어딘가에서 또 뺨 맞고 훌쩍일지 모를 훗날의 나를 위해 기록해두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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