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 발레 단상 # 04. 코어 Core
어느덧 취미 발레도 초보 3개월 차에 접어들었다.
엄밀히 말하면 정통 발레반 수업은 아니고 발레 스트레칭이다. 일주일에 2번, 한 시간씩 수업을 하고, 수업이 없는 날은 안 되는 스트레칭 중심으로 몸을 푼다. 여전히 동작은 힘들고 매번의 스트레칭은 성찰의 순간이다. 다 굳은 몸, 더 안 굳어지면 감사할 몸으로 낑낑대는 성인반 회원들을 향해, 원장님이 위로하며(?) 말했다. 소위 말하는 '벌크-업', 근육 키우기는 1-2개월이면 된다, 있는 근육을 가늘고 길게 만드는 것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쉽다, 스트레칭은 그 정도 시간으로 어림도 없다. 어린 시절의 찰흙 빗기를 할 때, 뼈대에 양감을 더하는 과정과 후반부의 모양을 다듬고 내는 과정을 생각하면 될까.
발레 스트레칭 3개월이 넘어가면서 이전과 확실히 달라진 것도 있다.
바로 '내 몸의 축'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거다. 지속적으로 의식하고 느끼기가 생각보다 어렵고 낯설었는데, 이걸 키우기까지 근 100일이 걸렸으니, 거의 100일 떡 돌릴 정도의 기념비적인 사건이다. 왜냐하면 이걸 토대로 기존의 동작 - 몇 개 없지만 - 을 수행하고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처음 발레 스트레칭 반에 들어갔을 때 충격을 받았던 것은, 바닥에 똑바로 앉지 못하는 내 몸이었다. 앞으로 쭉 뻗고 앉은 다리도 불편한데, 그 자세로 허리를 펴고 등을 세우는 그대들은 외계인인가. 혼자 구부정한 몸으로 버둥거리자니 세상만사 흙빛이었다. 학원 수업은 후다닥 넘어가기 바쁜 고로, 셀프 진단의 무한 반복이 시작됐다.
코어 근육과 기립근의 문제다. → 근력을 키우자. 플랭크 시간과 횟수를 늘리고, 기립근 운동 기구들을 활용하자. → 여전히 몸이 안 펴진다. → 뻣뻣하구나. 햄스트링이 짧아서 그렇다. → 스트레칭 지옥. → 전보단 나아졌지만 몸이 계속 뒤로 눕는다. → 코어, 기립근... → 스트레칭 지옥 → (For) X ∞ → (Else) 하늘이시여.
접근은 틀리지 않았다. 진단이 불완전했을 뿐. 원래 병원에서도 치료가 틀리는 경우는 잘 없다. 의학만큼 경험적 지식을 토대로 매뉴얼 Manual이 엄격한 분야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비극이 비일비재한 것은 애초에 적용시킬 매뉴얼을 잘못 선정한 '오진단' 때문이다. 그런데 진단 또한 완전히 엉뚱할 확률이 낮다. 대부분의 문제는 진단의 정확도, 정교함이 떨어지는 탓이다.
근육과 자세의 해부학적 원리는 자연법칙에 속해서, 중력에 반응하고, 역학 구조로 기능한다. 이 모든 것들은 물리 공식, 수학 공식과도 같아서 올바른 값을 넣어주면 오답이 나올 수가 없다. 그래서 '원리'다. 그 '원리'라는 개념으로 몸을 바라보면 나오는 건 축. 근본적으로는 척추와 골반이고, 확장하면 그 둘을 지탱시켜주는 근육들, 코어 Core가 나온다. 기술로써의 움직임이 아닌, 원리로써의 움직임에 대한 개념이 조금씩 생기고 있는데, 이게 '원리'이다 보니, 발레 시간만이 아닌, 일상생활에서의 모든 움직임에도 영향을 주기 시작하고, 그렇게 지속적으로 움직이다 보니, 문제 자세들의 교정이 믿음의 눈으로 보면 분명 일어나고 있다.
취미 발레 입문에서 가장 먼저 배우는 '동작'은 플리에 Plie 다.
발레는 호흡을 써서 하는 운동이다. 점프는 말할 것도 없고, 단번에 다리를 얼굴 옆까지 번쩍 들어 올린 후 재빨리 내릴 수 있는 추동력은 몸을 들어 올리는 호흡에서 나온다. 아니면 악어처럼 그 큰 입을 뜨악- 벌려 먹이를 삼킨 후 한참은 합죽이로 있어야 하는 게 골격근의 생리학적/생화학적 원리다. 골격근은 동작의 모양을 만들지만, 이들을 움직임으로 이어 붙이는 건 불수의 근을 쓰는 호흡이다. 발레 무용수들의 가뿐함, 공기 같은 움직임은 호흡의 힘이다. 발레의 운동량이 큰 이유는 유산소와 무산소가 극도로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양 발을 동시에 옆으로 미끄러뜨리며 대문자 A 모양의 다리를 만들었다 교차해 모으는 에이샤뻬Echappe 가 좋은 예시로, 들이마시는 숨에 몸을 들어 발을 밀어내고, 내쉬면서 내민 발을 가져오는 식의 리드미컬한 동작인데, 이걸 호흡 없이 그냥 다리 힘으로 하게 되면 발목을 짓누르게 되고, 발을 뻗어 포인 할 때 종아리에 쥐가 난다.
이 호흡은 어디에서 오는지를 불과 얼마 전의 수업 때 들었으니. 그것이 플리에Plie를 하는 이유라고 한다. 그냥 턴아웃-무릎 구부렸다 펴는 동작으로만 단순하게 알았던 플리에는 사실 호흡을 떨어뜨리며 플렉스Flex로 몸의 힘을 비축하려는 목적, '숨을 쉬는 동작'이라는 것이다. 이것 없이는 발레 동작을 제대로 수행하기가 어렵고, 초보일수록 근 긴장을 못 이긴 각종 사고(?) 상황과 부상을 당하기 십상이다. 플리에로 시작하며 플리에를 연습하는 것, 모든 점프와 동작들 사이에 깨알처럼 자잘한 플리에들이 섞여 있는 것은 이 숨 쉬는 타이밍, 감각을 익히기 위함이었다.
이 같은 플리에는 똑바로 선 골반으로부터 출발한다. 모든 발레 동작이 다 그런 것 같지만 플리에를 제일 먼저 배우는 이유도 골반 정렬을 점검하고 훈련하기 위함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골반 중립'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 감각이 전제되어야 척추가 동서남북 어느 한 곳으로 치우치지 않고 위를 향할 수 있다. 그렇게 정수리까지 몸의 정렬이 바로 서는 것을 풀업 Pull-up의 시작으로 본다. 플리에는 이 상태로 턴아웃 무릎을 바깥으로 구부리며 호흡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몸을 내리는 건 중력을 받으면 되니까 쉽지만, 내려간 몸을 올리는 건 중력을 거슬러 힘겹다. 발바닥으로 땅을 밀며 허벅지 안쪽 힘과 엉덩이 근육을 조이는 힘으로 다리를 모으며 몸이 '밀려 올라가는 것 같은' 이 원리는 어찌 보면 중심축에서 가장 가까운 최소한의 근육들만 티 나지 않게 쓰는, 극도의 효율처럼 느껴진다.
이 원리가 없는 초보의 플리에는 울고 싶을 만큼 괴로웠다. 턴아웃 자세로 스쿼트를 한다고 생각하면 쉽다. 누운 골반으로부터 출발한 척추는 특히 요추가 말려 있어 제대로 힘을 내기가 쉽지 않은데, 이 상태로 상체를 세우려니 죽을 맛일 터. 반작용으로 갈비뼈가 나오고 몸통이 제대로 굵어진다. 내밀고 싶어 내민 갈비뼈가 아닌데 넣으라니, 이쯤 되면 싸우자는 건가 심기가 불편해지는 거다. 애꿎은 숨을 참고 갈비뼈를 모아 흉강을 조이니, 부족한 호흡 때문에 다리가 후덜거린다. 그런데 음악은 끝나지를 않아, 버티기는 해야겠고, 결국 내 이럴 줄 알았다며, 언제나 준비되어 있는 허벅지 바깥 근육이 또다시 등판해 몸통을 떠받친다. 허벅지 내전근 운동을 백날 하면 뭐할까, 짧은 햄스트링만 햄스터마냥 통통해지고 정작 스트레치 Stretch 될 일이 없다. 중요한 것은 다음 동작을 위한 호흡이 바닥났기 때문에 근 피로도가 종아리에 땅땅하게 뭉쳐, 포인 포지션에서 자꾸 쥐가 날 것 같은 공포에 시달린다는 것. 다음 날이면 종아리와 허벅지 통증에 어기적거린다는 거다.
나비 자세는 골반 세우는 감각을 찾기 좋은 자세다. 개인 스트레칭을 시작하면 무조건 편한 각도로 턴아웃 다리를 구부리고, 바닥에 엉덩이 뼈의 가장 뾰족한 부분이 닿는 몸'판'의 각도부터 찾는다. 다리를 구부리는 이유는, 아직 완전히 이완되지 않은 햄스트링 이슈를 제쳐두기 위함이다.
다 함께 전신 거울 앞에 앉아 매트 위에서 스트레칭을 진행하면 각자의 몸 상태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인간은 어쩔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이고, 경쟁 환경에서 나고 자란 현대인들 또한 어쩔 수 없는 관계적 인종인지라, 이따금 옆 사람, 앞사람의 스트레칭을 훔쳐보며 풀이 죽기도 하고, 힘이 솟기도 한다. 혹여 핸즈온 Hands-on 낙점으로 음악이 끝났는데도 자세 지적으로 같은 동작을 반복해야 할 때는 여러모로 진땀 나는 순간이다.
골반을 세워야 코어가 잡히는 것을 느낀 이후부터, 대충 흉내만 냈던 스트레칭 자세들, 잔꾀를 썼던 몇몇 동작들은 완전히 바닥부터 다시 시작됐다. 그제야 짧은 햄스트링이 제대로 자극을 받으며, 현재의 내 관절이 가능한 딱 그만큼만 다리가 벌어지고, 딱 그 정도만 몸이 숙여진다. 스트레칭은 많이, 강하게 하는 것보다 정확하게 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에 생각보다 집중력이 필요하다. 남을 보면서는 내 몸의 신호들을 제대로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 거울 속에서 나만 우뚝 서 있는 순간을 꿋꿋하게 견디는 사소한 훈련이 시작된 셈이다. 좀 더 꼿꼿하기 위해선 반드시 거쳐야 하는 여러 고달픈 장면들, 어중간한 구부정함을 꿋꿋이 지탱하고 있는 것은 멘탈의 코어 훈련에 더할 나위 없다.
어려서부터 남의 시선, 특히 남의 반응을 살피고 예측하며 그에 맞게끔 앞질러 행동하곤 했던 그 오랜 관성은 마치 틀어진 골반과도 같았어서-. 남이 어떻게 보든, 내가 어떻게 보이든, 중립을 찾아 중심을 내 안으로 옮겨 와 나 자신에게 집중하는 그 당연한 '원리'가 어느덧 희끄무레했는데 말이다. 일주일 168시간의 약 1.2%에 불과한 발레 수업을 통해 내면의 코어 찾기, 내적 축의 정렬도 함께 진행되고 있다. 160도 넘게 다리를 벌려 앞으로 몸을 넘기는 대다수의 어린 사람들 속에서 이제 겨우 120도가 된 다리로 바운스Bounce 를 꾸준히 할 수 있는 담력과 내 호흡에 몰입할 수 있는 집중력이야말로 뭘 하든 자신을 잃지 않는 진정한 코어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꿋꿋하게 서투른 자신을 향해 크게 웃어버리며 넘길 수 있는 그 여유가 절실했던 내게는, 바닥과 수평을 맞춰가며 개선되는 골반 경사도보다 더 값진 성과다.
4개월 차로 접어들면, 마지막 10분의 그랑 점프 행진들이 두려워 도망쳤던 발레반 수업을 다시 두드려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