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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일 Jun 08. 2022

#3. 다이어트

취미 발레 단상 # 03. 무게감

  성인 취미 발레를 시작하면, 다이어트도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무릇 배운 자라 할 수 있을 터. 올 것이 온 기분으로 시작하는 세 번째 몸에 대한 단상, '다이어트'다.








 성인 발레를 시작한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입을 모아 물었다. 그건 유연해야 하는데, 과연 그 나이에 그게 가능하냐. 나도 그게 의심스러웠으나 수업을 한 번만 들어봐도 깨닫게 된다. 모두가 절망하는 공통의 주제는 유연성보단 근력임을. 중력을 거슬러 다리와 팔, 몸을 위로 들어 올리는 건 근력의 작용이다.   

 스트레칭은 이 근육들, 인대와 관절들의 잠을 깨우는 작용이고, 이들의 예열이 끝나면 동작-테크닉을 시작할 단계가 된다. 그래야 동작 중간에 다치지 않고, 수업 중 쥐가 나는 사태를 막을 수 있으며, 수업 이후의 ‘비정상적’ 근육통을 방지할 수 있다. 몇몇 스트레칭은 유연성보다는 근육의 불균형 탓일 때도 있고, 특히 다리 찢기의 경우는 허벅지 내/외전근의 불균형 때문에, 스스로의 관절이 벌어질 수 있는 각도에도 못 미칠 때가 있다. 굳어버린 관절은 어쩔 수 없다지만, 있는 근육 늘리는 건 할 수 있겠다 생각해, 스트레칭에 성실히 임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굳이 거울을 보지 않아도 몸으로 느껴지는 관절들의 둔함. 그냥 레오타드만 입고 서 있을 때는 보이지 않았는데, 다리를 들어 올리고, 팔을 멀리까지 뻗으니 느껴지는 불청객. 그 손님, 내 눈에만 보여요, 나만 볼 수 있어요 노랫말이 절로 떠오르는, 마치 펜 하나를 주문했더니 물건은 보이지 않을 만큼 빙빙 두른 '뽁뽁이' 같은 군살들이다. 동작을 둔하게 하고, 관절을 사이에 두고 서로 붙은 자리에 따라 각자의 방향으로 마찰하느라 바쁜 근조직들 사이에서 못 살겠다 난리인 이 월급 루팡 같은 군살들이 호흡을 잡고 늘어진다.

    

호흡이 처지면서 이 몸이 거추장스럽다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물리적 무게감은 당연했다.

그랑 플리에 때 좀 더 상체를 가볍게 올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올림픽 역기 들기 하듯 이리 비장하게 일어나서야 되겠냔 말이다. 알라스콩을 할 때도, 탄듀 나갈 때도, 팔다리가 좀 더 민첩해야 할 것 같은데, 하다 못해 매트에서 앞으로 다리를 뻗고 앉아도, 좀 더 매트 바닥을 깊게 누르면서 몸을 세워야 할 것 같은데 왜 내 몸은 말랑말랑한 정체불명의 유체 위를 부양하는 것 같을까, 이 부력의 유래는 어딘가, 뽁뽁이는 터뜨리는 쾌감이라도 있지, 내 튼실한 뼈는 파손 주의가 붙은 유리도 아니거늘, 이 터지지도, 터져 나갈 곳도 없는 천연 완충재에 왜 이렇게 애지중지 싸여 있냔 말이다. 수술 경험이 있는 복부 사정은 더 심각하다. 근막의 회복 과정에서 겹겹이 들어찬, 이거야말로 완충재 본연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 이 군살들의 쓸데없이 성실한 존재를 이 순간 이렇게 넘치게 누릴 줄이야.


 동작의 절대적인 질이 떨어짐을, 제 구실 못하는 팔다리를 70분 내내 피할 길 없이 '감당한' 좌절감은 정말 깊었다. 거기에는 '그래도 나 정도면...'의 얄팍한 자기 만족도 섞여 있었기에 더욱 쓰렸다.   

 첫 수업 이후 식욕이 떨어졌다. '먹으면 안 되겠다'가 아니라, '이래 놓고 밥이 들어가니?'에 가까웠다. 좌절감에 비하면, 캐미솔 레오타드에서 적나라하게 확인되는 팔뚝의 두께는 애들 장난 같았다. 내가 몸을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에는 Function, 즉 기능성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는 것도 이때 알았다.

 옳다구나 스마트 워치를 구입해 자가 관리에 돌입했다. 인바디의 모든 수치는 정상 범위였지만, 식사량을 조절하고 줄어 든 식단의 질을 따지며 때 늦은 체내 구조 조정에 들어갔다. 








 사실 이제껏 살면서 목적으로써의 다이어트를 해본 적이 없다.  

굳이 겉모습을 논하자면 표준 체형을 벗어나 본 적이 없어, 몸에 대한 어떤 변화의 동기 부여를 진지하게 가져본 적이 없다. 이따금 체력을 키워야겠단 생각에 집 앞 피트니스를 잠깐 다녀본 적이 있었을 뿐이다. 이마저도 작정한 운동이라기보단 기분 전환을 위한 오락의 일환이었다.    

 위가 예민한 편이라 맵고 짠 음식, 자극적이거나 기름진 음식은 기피하고, 배달 음식 또한 힐링보단 스트레스 유발 요인이다. 배가 불러 나른한 느낌 자체를 좋아하지 않고, 높은 기초 대사량, 야식과 군것질, 간식에 인색한 부모님 밑에서 인생의 대부분을 현미 잡곡을 주식 삼아 형성된 식습관과 맞물려, 특별한 일이 없으면 호리호리한 체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채, '그래도 나 정도면...'이나 외우면서 살 수 있었다. 얼마나 갔을진 알 수 없겠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겉보기의 문제에서 그런 것이며, 좀 더 세분화하자면 사실 내용은 짚어볼 것이 많다.    

특히 먹는 것과 관련해 위의 건설적인 식습관은 주로 단백질 섭취에 관한 문제다. 탄수화물의 경우는 이야기가 달라져서, 밀가루를 논하지 않고는 인생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닐 '빵순이'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과거형인 이유는, 하도 먹어서 이젠 무슨 빵을 먹어도 그 맛이 그 맛 같은 밀태기(?)에 들어선 지 근 10년이 되어가는 탓이다. 물론 까눌레나 바스크 치즈 케이크 같은 존재는 여전히 영혼의 일용할 양식이지만, 탄수화물을 향한 애착은 많이 시들해졌다. 그랬음에도 그 이름도 숭악한 '셀룰라이트', 그리고 장차 정년을 바라며 자리를 물색하는 여타 무명의 크고 작은 몸 곳곳의 지방들은 그 시절의 애물단지다.


 체중으로써의 무게는 생물학적 나이, 혈액형과 더불어 병원에서의 의학 처치를 결정하기 위한 지표 정도로 여긴다. 그건 의사들을 위한 정보지 내게 그렇게까지 중요한 이슈는 아니다.

 하지만 타고난 신체 기능성 - 운동 능력 - 을 떨어뜨려 동작을 무겁고 둔감하게 만드는 무게는 오롯이 내가 품어야  불편이며 어딘가 속상하다. 노화가 반드시 퇴화는 아닌데 이건 퇴화의 기분이다. 








 결국 다이어트는 ‘먹기’라는 원초적 생존 욕구 그 자체를 의식의 식탁에 올려 지지고 볶는 일이다. 식습관을 뜯어 고치는 일은 단순 욕구로써의 먹기를 뛰어 넘는 문제 제기다. 다이어트 성패는 사실 결심의 굳기보다 깊이가 큰 듯 하다. 생활 속에서 깊게 체감한 문제 의식과 동기 부여가, 단발적이고 억지스러운 충격 요법보다 오래 가는 탓이다. 


 나의 경우, 어딘가에 집중하고 있지 않을  - , 취미, 여타 흥미를 당기는 온갖 작업 - 먹고 싶은 생각이 연이어 찾아오는데, 배를 채우기 위함이 아닌 탓에 기준도 엄격하다. 이를 테면 어디의 무엇, 거기의 그것, 극단적으로는 이러저러한 맛에 매달린다정서적, 심리적 허기로써의 먹기 아무리 고차원적 정신 작용에 따른 결과라도, 몸에 남는 군살에는 에누리가 없다. 사채급 이자율의 군살 적립에 진심이 되는 순간들이다.


 그렇지만 사실 군살보다 무서운  습관이다.        

 그 같은 먹기가, 먹기를 통한 충족감과 환기 옵션 아닌 습관, 유일한 창구가 되어버리는 게, 그래서 다른 걸로는 대체할 수 없을 때 문제가 된다. 정작 그 자신은 뇌가 없어 생각할 수 없는 뇌는 적당한 동전만 넣으면 돌아가는 자판기 같아서, 사실 다이어트의 절반 이상은 식습관의 개선임에도 운동을 함께 수행하는 이유에는, 운동이 자극하는 뇌의 보상 회로로 식단의 상실감을 잊는 게 아닐까, 앉은자리에서 게으르게 추측해본다. 


 어쨌거나 마른 논바닥의 단비 같은 그 시도는 초기 반응이 빨리 왔다.    

 스트레칭의 한계에서 근육이 버텨낼 수 있는 시간이 늘자, 운동 효과가 높아지면서 관절들의 운동 범위가 한결 유연해졌다. 흉내가 아닌, 정확한 근육을 쓰면서 따라가는 발레 기본 동작은 칼로리 소모가 커서, 수업 마지막의 스몰 점프가 끝나갈 때는 정말 바닥을 기고 싶은 심정이 된다. 바로 그게 지금 내 체력, 내 몸의 바닥인 셈이다. 두 번째 결제 때 들은 '이제 발레하는 체력이 조금 됐다'는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다이어트 때문에 저녁 메뉴 선정을 고민할 때, 맞은 편의 옛 친구로부터 타박을 받았더랬다. 오로지 미용 목적으로써의 몸매 관리로만 대하는 그 악의 없는 관습에 할 수 있는 말은 많지 않았지만, 아마 성인 발레를 하면서, 다이어트를 감행하는 그 마음들은 비슷하지 않을까. 물론 레오타드 입은 모습을 전신 거울로 봤을 때 뿌듯하면 좋겠지만, 의외로 발레 수업 때의 시각적 여운은 오래가지 않는다. 다 굳은 몸, 어쩌면 몸을 드러내는 옷 자체가 도전일지 모를 나이에 학원 문을 두드려 민망한 무용복을 입고, 그보다 더 민망한 자세들을, 앞선 민망함은 애교였구나 싶은 수준으로 사람들 앞에서 수행하는 자신을 마주하는 강단 그 이면에는, 무섭도록 조용히 도사리고 있는 야망들, 목표들이 있으리라. 동작 그 자체에서 전해지는 카타르시스가 있다. 거기에 어떻게 손 끝이라도 닿아보려니, 이 뽁뽁이들이 지나치게 두꺼울 뿐이다.


 달라지는 몸의 감각들, 쓰임들을 체험하면서,  작고 내밀한, 그러나 순도 높은 성취를 배경으로 일상의 다른 힘들, 의욕들, 아이디어들이 꼬리를 물며, 군살처럼 늘어졌던 시간들의 느슨함이 가지런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이따금 사는 걸 너무 핍진하게 만드는 감정의 군살들도 빠지겠지.     

유리 멘탈도 아니면서, 파손 주의를 우려하며 겹겹이 두른 이 쪽의 뽁뽁이들도 몇 겹일 터.

온갖 다양한 개인들이 갖가지 꼴로 부대끼며 만들어 내는 그 파란만장한 사연들, 사건들, 그래서 이따금 한참이 지났어도 어제 일처럼 마음을 갉아먹는 기억들 사이사이를 날렵한 스텝의 그랑 제떼로 훌쩍-, 넘어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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