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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일 Aug 08. 2022

# 03. 연습과 연장

종이 이야기 #3


연장 탓, 도구 탓은 중요하다.

특히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에게는 그보다 절박한  없다. 세상은 갈수록 좋아지고, 갖은 도구들을 영접할 길은 국내외 사방으로 뚫려 있는 마당에, 우리가 기술이 없지 의지가 없나, 그리는 방법을 몰라서 그렇지 사는 방법을 모르나,  되면 되게 만들어줄 도구를 들이면 된다. 궁극의 연장이야말로 취미 생활의 시작이고 마침이며 알파요 오메가다.


 4년 전, 2개월 화실 생활 동안 뒤의 1개월은 오매불망했던 수채화를 그렸다.

미술 학원 비슷한 곳이라곤 초등학교 시절, 단지  소그룹 과외에서 5 스케치북에 주구장창 그렸던 연필 데생, 같은 스케치북에 외울 정도로 그려야 했던 빨간 사과, 녹색 사과가 전부였던 내게 '사이즈는 괜찮으니까 ! 반드시! '와트만 '  오세요'라는 화실의 요구는 난감했다. Whatman paper 실험실에서나 접할  있었던 일반인 취미자는, 인근 문구점을 돌며 '와트만 ' 찾았다. '와트만 ' 모르는 사람들에게 '수채화 전용지' 설명하고, 수채화 '전용지'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말문이 히는 우여곡절 끝에 손에  당시  스케치북은 파브리아노 워터칼라. 셀룰로오스(펄프) 100% 수채 패드다. 옛날에는 와트만 지라고 통용되던 수채화 전용지는 -코튼으로 만들어진 종이인지라, 결과적으로 나는 정반대의 종이를 가져간 셈이었다.


무지의 결과는 처참했다. 아무리 물을 발라도 물감이 겉돌았다. 성인 취미를 하다 울 뻔 했다.

결국 그 두 배 넘는 가격에 사이즈는 절반인 캔손 아르쉬 중목을 각혈하는 심정으로 재구매하고, 셀룰로오스 스케치북과 코튼 수채 패드의 넘을 수 없는 사차원 벽을 실감하며 장렬한 화실 수채화는 막을 내렸다.


 고통스러운 기억과 이후의 시행착오, 계속되는 삽질을 통해, 수채화에서 가장 중요한 도구는 무엇이냐 질문받는다면 주저 없이 말한다. 종이가 절반이고, 붓이 나머지 절반이라고. 연습이야말로 연장이 중요하다.


 보통 수채화 입문용으로는 순수 셀룰로오스 100%를 사용하고, 앞서 말한 파브리아노 워터칼라, 캔손 몽발이 대표주자다. 이들 종이는 일반적으로 종이를 만드는, 목재 추출 합성 펄프를 화학적으로 제조/공정해서 만들어진다는데, 수채화 전용지로써 발색과 색감 보존력이 우수하고, 간단한 수채화 기법들 모두 가능하다.

 다만 이 종이의 가장 큰 결점은 물 쓰기에 있다. 물 샐 틈 없이 사각의 세포벽에 단단히 둘러싸인 생물 교과서 속의 딱 그 현미경 세포 사진처럼, 셀룰로오스 종이들은 물의 번지기, 번짐에 따른 자연스럽고도 우연한 색의 그라데이션 표현이 어렵다. 뿐만 아니라 어디까지나 내가 겪어본 재료로써의 셀롤로오스 수채화지들은 종이 조직력과 안료 친화력도 코튼 지와 달라, 어두운 색들의 깊고 그윽한 발색에 한계가 있다.


전투력 상승에 최적화된 캔손 몽발 (셀룰로오스 100%)


 물보다는 색을 달리해가며 그리는 그림에 적합하고, 희석에 따른 발색보다는 혼색, 조색을 통한 색감 조절을 잘해야 한다. 저렴한 가격대로 인한 부담 없는 접근성 탓에 입문용, 초보자가 간단한 수채화를 그릴 때 좋은 종이라는 소개 문구가 공식처럼 붙지만 개인적인 생각은 다르다.

 정확한 붓질, 색감 훈련이 되지 않은 손으로 그리는 셀룰로오스 종이 그림은 숨을 곳이 없다. 연습용으로 최적이라는 결론은 같지만, 이 종이 위에서는 테크닉이 절실한 만큼, 기본기가 여지없이 드러난다. 한 번의 붓질과 잘못된 혼색으로 망하기도 정말 잘 망하고, 그걸 수습하겠다고 뭉개다 정말 끝간 데 없이 처절하게 망하는 그 과정의 혹독함이란... 모처럼 홀가분하게 붓을 잡았다 비루한 실력과 조각보처럼 누더기가 된 종이 속 인물에 정통으로 얻어맞기에 이만큼 좋은 종이가 없다.

 그래서 연습이 필요할 , 연습을 해야겠다 싶을  심기일전하며 집어 드는 도구는  위의 캔손 몽발이다. 부족한 내 기교를 도와주지 않는 이 종이는 전투력을 키우게 해준다.


산도스 워터포드 세인트 큐버츠밀 구버전. 현재 뉴 버전이 나왔고, 뉴 버전은 전통적인 와트만 지 제조 기법을 적용했다고 한다.


 순면(코튼) 지는 문자 그대로 순면에서 추출한 섬유로 만들어진 고급 종이다.

가장 큰 특징은, 흔히 면 100% 흰 티를 상상하면 좋다. 땀/물 흡수가 빨라 흠뻑 젖고, 커피 얼룩이 잘 지워지지 않는달까? 그게 일상복에서는 치명적이지만, 사실 수채화에서는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강점이다. 종이에 스며드는 물의 양에 따라 색의 다양한 온도를 표현할 수 있고, 안료가 잘 달라붙어 어두운 색들의 발색이 선명하고 깊다.  


물의 흐름에 따른 색의 희석이 가능하다 보니, 하나의 색으로도 다채로운 인상을 내기가 좋아서, 은은한 색감의 물맛 많이 나는 수채화를 좋아한다면 아/묻/따 코튼, 아무리 저가인 재생 코튼이라 하더라도 무조건 면 100% 종이를 쓸 수밖에 없다.


습작 # 1. 왼쪽은 몽발, 오른쪽은 산도스 워터포드 세인트 큐버츠밀. 모두 자작 캐릭터.


 셀롤로오스 종이 삽질을 하면서, 나는 물을 많이 쓰는 그림을 좋아하고, 희석에 따라 미묘하게 표정이 달라지는 물감들의 그 섬세한 인상을 즐긴다는 자기 발견(?)을 이루었지만, 어차피 그것도 다 제대로 된 색 표현과 붓 테크닉이 있어야 뭐라도 되겠고, 남은 셀룰로오스 종이도, 그릴 애들(?)도 많으니, 전투력 만렙을 찍어볼까, 붓을 빼들었다. 갈 길이 멀지만 다음 한 장은 조금이라도 더 나아진 그림이 나오겠거니.








사용 물감: 홀베인, 미젤로 골드, 르네상스 (Brown madder).

사용한 붓: 왼쪽은 이사베이 몹. 오른쪽은 헤렌드 R5200 둥근 붓 6호와 12호.


포스팅의 모든 그림은 직접 그린 것으로, 무단 도용/링크를 금지하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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