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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일 Jun 01. 2022

#2. 거북목

취미 발레 단상 # 02. 턱 들기

  한참 자세가 안 좋았을 때 왼쪽 허벅지부터 다리가 뒤틀리는 것 같은 통증이 있었다.    

아픔도 대단했지만 그 공포감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정형외과를 찾아 허리 디스크 통증이며 도수 치료를 비롯한 물리치료를 처방받았다. 그렇지만 물리치료란 게 그렇잖나. 어느 정도 통증이 사라지며 응급성이 떨어지면, 이제는 사는 게 바쁜 법이다. 신체적 통증의 기억은 어언 8년 여가 지난 지금 희끄무레하지만, 당시의 공포감은 선명히 남아 있다.


 20대 초반부터 목을 타고 이따금 맥박처럼 뒤통수 언저리를 찌르듯 번지는 두통 아닌 두통을 만성으로 달고 살았다. 식욕 부진은 물론 수면 부족까지 유발하는 빈발한 통증에 오만상을 찌푸리며 신경과를 찾았고, 뒤이은 약국에서 처방전을 조제하며 안쓰럽다는 듯 말했다. '어디가 엄청 많이 아프신가 봐요.'


 결론적으로 위의 모든 것은 고질적이었으나 질환 Disease은 아니었다. 물론 그대로 방치하면 질환으로 이어질 것들이었지만, 적절한 운동과 정확한 스트레칭 등의 자가요법(?)으로 예방 및 완화가 가능한 종류의 불편들이었다.  

 다리 꼬기, 짝다리 등, 명백하게 잘못된 습관들은 금방 찾아냈다. 유연성을 '키우기 위해서'만 한다고 여겼던 스트레칭과, 앉은 자세에서도 수시로 기지개를 하고, 허리를 펴려는 생활 속의 사소한 시도만으로도 다리와 허리 통증은 가셨다. 그 과정에서 사춘기 성장기부터 일상이었던 구부정함이 일정 부분 개선됐고, 자세가 조금은 꼿꼿해지며, 늘 169-70 언저리로 머물렀던 키가 171을 찍었다. 옷 소매가 짧아지기 시작했다. 25세 이후로 키가 큰 줄 알았다.    

 남은 문제는 소위 말하는 '흉쇄유돌근', '승모근'의 긴장성 수축과 이로 인해 야기되는 두통. 수면의 질이 떨어지면 여지없이 관자놀이를 비롯해 얼굴 옆면과 뒷목, 뒤통수 전방위를 파지직- 전기처럼 타고 올라 번지는 통증은, 약발은 떨어져도 아세트 아미노펜을 상비해두는 방법 밖에 없었다.



 




 

 등과 허리를 편다고 생각했는데, 맨바닥에 반듯하게 누웠을 때 내 양 어깨가 바닥에 닿지 않는다는 걸, 그게 라운드 숄더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래서 혼자 발레핏 영상들을 보며 따라 하던 Pre-발린이(?) 시절, '백조 날갯짓'의 팔 돌리기가 끝까지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양팔을 어깨 위로 올리면서는 목을 들 수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의 허탈함은 참 썼다. 또 열심히 서핑하며 돌아다니니 거북목 이야기가 나온다. 그래도 내가 이 정도는 아니다, 알 수 없는 자기 위안을 곱씹으며 틈만 나면 폼롤러로 등을 밀었다. 재미있게도 진통제 수 알로도 다스려지지 않던 두통은 이것만으로도 발생 빈도가 0 가까이 떨어졌다.


 그랬던 것이, 레오타드를 입고 거울 앞에 서니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레오타드의 격렬한 등 파짐이 어색해, 등이 굽으면 옷이 앞으로 쏟아질(?) 것 같은 불안감으로, 강제 등 펴기가 시작됐고, 이제 다 이루었다(?), 의기양양하던 첫 수업. 첫 지적, 그리고 이후로 나를 위한 맞춤이 된 주문은 '턱 들어요!', 짧고 굵은, 그러나 '제대로 된 잔소리'였다. 등을 편다고, 뒷목을 늘이고 턱을 당기면 자세가 바르게 되리라는 나의 얄팍한 꼼수에 철퇴가 떨어졌다. 거북목이 있고, 상대적으로 뒷목 근육이 늘어나 있고, 앞쪽 근육이 짧다, 그러니 앞으로 턱 들라는 이야기를 할 때마다 본인임을 알고, 거울의 자기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라고. 남의 입에서 나오는 팩트는 정말 주옥같아서 머리를 사정없이 때렸다.


 그러자 일상 속에서 내가 턱을 들어야겠다, 생각했던 적이, 꿈결에서라도 있었나 싶었다. 이건 정말 다른 차원의 몸 쓰기다. 내 몸 구석구석에 각자의 기능을 위해 자리하고 있는 작은 근육들, 인대들이 정말 뻘쭘해지는 순간이었다. 아울러, 동작의 정/오만 알아보면 되었지, 라며 신경 쓰지 않았던, 혹은 흐린 눈(!) 보기만 하며 사실상 그 기능에 무지했던 '거울 속 자기 몸 보기'의 진짜 의미를 곱씹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안다고, 거울을 통해 남의 동작과 내 동작을 맞춰보며 따라갈 게 아니라, 소리로 듣고 머리로 이해하며, 거울 속에서는 남의 몸이 아닌 내 몸의 흐름에 집중해야 한다. 나 보라고 있는 거울이다. 눈만 치켜뜬다고 보이는 게 아니다.


 등 근육 단련을 위해 엎드린 채, 턴아웃-포인으로 하체 근육을 잠그고, 등 힘으로 상체를 들어 올릴 때, 거북목은 위가 아니라 앞으로 나간다. '1cm 더 위로! 발란스~~, 더 위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더, 더!! 턱 드세요! 바닥 말고 거울 보세요, 턱!!' 자비 없는 선생님의 카운트에 일하는 건 등 근육이 아니라 얼굴 혈액 순환이다. 마주 보고 있기 민망할 정도로 달아오르는 거울 속 내 처참한 몰골을 보고 있자면-. 진짜 거북이는 목이 가늘고 귀엽기라도 하지, 이건 등껍질 속에 무기를 감춘 것도 아닌데, 나는 왜 바닥에 붙어서는, 정말이지 나도 머리 들고 싶은데, 거짓이 아닌데, 머리를 못 들어 서러운, 아오, 이 내 몸... 일백 번 고쳐 죽어 넋이라도 있긔없긔...








  양 쪽 눈의 시력 차가 큰 편이다. 0.7과 0.1 사이. 그래서 안경을 안 쓰면 불편은 하지만 대충 흐린 눈으로 다닐 수는 있다. 못 볼 꼴 적지 않은 세상, 굳이 일일이 다 보고 살 이유 없잖아?   

 그러나 일 처리 과정에서 되는 놈은 더 시키고, 안 되는 놈은 버리는, 무자비하기가 이를 데 없으면서 속 터지게 꽉 막힌 악덕 고용주인 뇌는 언제나 일정한 정도의 자극만 채우면 그만이다. 상대적으로 시력 좋은 쪽 눈이 혹사당한다. 때문에 이따금 의식하지 않고 거울을 보거나, 사진에 찍힐 때, 혹은 셀카를 찍으려 하더라도 고개는 늘 한쪽으로 미묘하게 틀어져 있다. 자세를 잡을 때 쓰이는 큰 근육들 사이, 자세를 유지하게 만드는 작은 단위의 근육들은 적응을 위해 많은 조정 끝에 자기들 편한 자리를 잡은 거다. 미세한 표정근, 림프 순환들의 지도가 그에 맞게 재편성된다. 이 폐해를 인지한 이후부터 안경을 성실하게 쓰고 있지만, 너무 긴 시간이 흐른 뒤였다.


  한참 그런 근육들이 자리를 찾기 시작할 때는 대부분 고개를 숙여야 작업과 업무 자세가 당연한 환경이었다. 모니터 앞에서 앞으로 뻗었던 목은 크게 움직여봤자 바로 앞 책상으로 떨어지고, 스마트폰과 아이패드는 아무리 거치대를 높여도 그 높이가 그 높이며, 턱은 들 일이 없다. 누군가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면 언제나 몸을 굽혀야 했다. 엉거주춤함 속에서 허리를 펴면 고개는 숙여야 했다. 오랜 시간 몸에 익은 관성은 인지하기도 쉽지 않았지만, 몸을 편 그 상태가 어색해지는 마당에 '옳은 감각'은 더욱 먼 이야기였다.


 이따금 유난히 못 버텨 비루한 몸뚱이로 매트 위를 오뚝이처럼 오갈 때면, 안 되는 몸이 원망스럽고, 민망함 속에 우울감이 깃들 때도 있다. 모종의 자책감이 든다. 나름 생존을 위해 적응하고 타협하는 몸을 방치해뒀던 무심함을 향한 타박도 재잘거린다. 이토록 어색한 각도의 목 움직임은 척추를 비롯해 전신에 많은 피로를 낳는다. 그걸 보상하기 위해 자기들끼리 비틀고 뒤틀며 타협점을 찾은 결과가 내 목인 셈이다. 하지만 사는 게 다 그렇지, 어떻게 그런 걸 일일이 신경 쓰며 일 하나? 사실 악덕 고용주는 나 자신이고, 뇌는 주인 심기 안 거스르려 노력한 집사쯤 될까. 내가 처음 목의 통증을 감지한 것, 목을 타고 오르는 머리의 통증을 감지한 것이 20대 초반이었음을 감안하면, 강산이 바뀌는 것보다 내 몸이 바뀌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리는 셈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터벅터벅 걷던 귀갓길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말하자면, 이 목의 자세에는 역사가 있는 거다.    

그것도 그냥저냥 나태하게 방치한 시간이 아니라, 노력의 흔적, 분투의 발자취, 생업 혹은 생활의 깊은 순간들이 몸에 남아 있다. 직업병은 그래서 때론 숙연하지만 애잔하다. 노동에는 그것이 육체든 정신이든 값이 따르기 마련이고, 그 '알짜 값'은 몸에 남는다.

 이 굽은 자세가 자랑스러울 건 아니지만 부끄러울 것도 아니다. 숨겨야 할 것은 더더욱 아니다. 소비 자본주의에서나 돈 들여 털어버리고 끊어버려야 할 짐짝처럼 치부해버리고 비하의 대상으로 삼지만, 사실 인간의 몸이 환경에 맞서며 갖추게 되는 여러 특징들은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은 진화의 의외성과 맥이 닿을지도 모른다. 신생아가 혼자 힘으로는 가누지도 못할 만큼의 머리 크기는 호모 사피엔스의 값이다.


 비록 글줄에서는 이따금 말맛을 더한답시고 몸뚱이라느니 비루하다느니, 앓는 소리를 하지만, 내 몸, 이 몸이 헤쳐온 과정은 존중받을 만하다. 그건 어떤 시간을 어떻게 지나왔는지 기억하는 나만이 보여줄 수 있는 존중이다. 스스로의 몸을 존중하는 사람, 그래서 스스로를 대하는 자세가 정중한 사람은, 남들로부터도 쉽게 침범당하지 않는다. 틀어지지 않는 몸이란, 머리부터 발 끝까지 정렬이 가지런한 몸이다. 척추를 바로 세우는 것도 힘이 필요하다. 머리부터 목과 어깨, 허리와 골반에 이르기까지 버티는 힘이 탄탄하면, 한쪽 다리를 들어 옆구리에 붙여도 무너지지 않는다. 우리 몸은 그럴 수 있게 태어났다.


 들어 올릴 수 있는 상체 높이가 개선되고, 발란스에서 어깨를 조금 더 내리는 게 가능해졌으며, 여전히 얼굴은 불이 날 것처럼 달아올라도, 호흡의 가빠짐은 한결 가벼워졌다. 발레 시작 이후, 마음 놓고 퍼져 있던 미세 근육들도 제자리 찾기에 뒤늦게 불이 붙었지만 아무래도 시간은 오래 걸릴 모양이지만-. 발레 수업 두 어번 만에 갸름해진 턱선을 만났다.   

 둥실하게 늘어지던, 림프 순환이 원활하지 않아 물 찬 주머니처럼 처졌던 턱의 부기가 빠진 것이다. 막히고 꼬였던 순환이 원활해지니 안색도 맑아지고, 턱을 들기 시작하며 표정의 그늘이 사라졌다. 목을 위로 세우니 어깨가 옆으로 뻗지 않고는, 이완되지 않고는, 승모근이 버틸 재간이 없다. 조금씩 굽은 어깨도 움찔거리며, 약 6개월이 걸린다는 라운드 숄더 펼침의 시동을 걸고 있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말린 어깨 밑으로 늘어진 이 팔뚝도 제 할 일을 찾아가겠지.    

 하늘을 향해, 편안히 몸을 펼칠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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