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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에포크 Mar 08. 2022

부럽다고 솔직히 말하는 게 지는 건 아니라네

쾌지나 칭칭 나네 

"부러움이라는 것은 표현해야 해요" 

유튜브를 보다가 김경일 교수님이 한 동영상에서 말했다. "아이들을 부러움을 표현할 수 있도록 길러야 해요" 나에게는 "부러워" 하면 자연스레 그 옆에 있는 누군가가 "부러우면 지는 거야"라고 답하곤 했다. 

마치 판소리에서 매기고 받는 것처럼. 

부러워. (부러우면 지는 거야) 부러워. (부러우면 지는 거야)(쾌지나 칭칭나네)


우리는 '부러우면 지는 거야"라고 부럽다고 말하는 것이 자발적으로 을이 되는 것처럼 생각이 든다. 부럽지만 자존심은 지켜야 한다는 듯. 부러움을 드러내지 말라고 그렇게 부러우면 지는 거야 라며. 부러울지언정 말로 표현해서 지지는 말자고. 자연스레 그렇게 누군가 가르친 것처럼 터득되어 왔다. 


그러나 부럽다는 감정을 표현함으로써 우리는 내가 뭘 좋아하고 갖고 싶은 것인지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부럽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세상을 살아가려면 내가 뭘 좋아하는지 알아야 한다고.

부자들에게 "와 정말 부럽네요. 어떻게 그렇게 돈을 버셨어요?"라고 말하면 그 부자는 부럽다는 감정 표현을 한 사람에게 어떻게 부자가 될 수 있는지 알려주려 한다고 한다. 물론 여기서 알려주지 않는 사람도 있게 되고, 그로 인해 사람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도 얻게 된다고. 그러나 대부분 '부럽다'라고 솔직하게 표현한 사람에게 박하게 대할 사람은 많이 없다.


흔히 '부러움'과 '질투'를 많이 혼용하고는 한다. 김경일 교수님은 '부럽다'는 것은 '나도 갖고 싶다'라는 마음이고, '질투'는 '네가 잃어버렸으면 좋겠다'라는 마음이라고 한다. 네가 가진 것을 나도 가지고 싶다가 부러운 감정이고, 네가 가진 것을 나처럼 잃어버렸으면 좋겠어가 질투의 마음이라고.


나 또한 '부러움'과 '질투'를 굉장히 혼용했던 것 같다. 부러워하면 지는 거니까 부럽다고 말은 못 하고, 그렇지만 저 아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은 부럽고, 부럽다고 말을 하지 않으려면 쟤가 가지고 있는 게 없어져야 하니 나는 질투를 하고, 질투를 하게 되면 못된 마음이 어느 순간 내 마음에 월세도 내지 않고 자리해버린다. 그리고선 못된 마음에서 못된 말들을 해버리겠지. 내가 질투를 가장 많이 했던 때는 대학생 때였다.


갓 고등학교를 졸업해 비슷해 보이는 여자아이들을 좁디좁은 강의실에 모아놓고 고등학교 마냥 짜인 시간표대로 생활하는 삶이었다. 모든 시간과 공간을 공유했기에 이 여자아이들에게는 작은 것의 변화가 굉장히 크게 느껴진다. 치마를 입으면 "오 치마 입었네? 오늘 어디가?"라는 말이 강의실 문 앞부터 시작되고, 누군가 머리를 하면 머리를 했다고, 누군가 화장을 안 하면 화장을 안 했다고, 다이어트를 하면 다이어트를 한다고, 아메리카노를 못 먹으면 아메리카노도 못 먹는다고, 그렇게 모든 것이 말이 되어 이산화탄소의 형태로 강의실에 뿜어져 나왔다. 말이 떠도는 세상. 모두들 모두에게 관심이 많은 세상. 이런 세상에서는 무리를 형성하여 테를 두르는 것이 안전하다. 무리 안에 섞이면 개인의 노출은 적어지고 무리가 내뿜는 소음은 어느 정도 다른 개인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장벽을 형성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한 무리의 소음은 마치 그 무리의 강함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나도 한 무리의 개인으로 존재했다. 모두 다 무리를 이루었고 각 무리마다 자기들만의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과 선배가 뭐 대수냐?'라는 재수생 언니들 무리. '우리 일진 아니야 친하게 지내자'라는 무리. '나는 과대고 재기 발랄하다'라는 무리 등이 있었다. 내 무리는 다른 기숙사보다 조금 더 시설이 좋은 '해맞이 기숙사'를 쓰는 아이들이 모여있었고 그래서 이름도 '해맞이팸'이 되었다. '해맞이팸'에는 과탑도 있었고, 공부 잘하는 아이도 있고, 못하는 아이도 있고, 팩폭 하는 아이도 있고. 좀 다양하게 있었던 것 같다. 우리는 먹는 취향도 많이 달라서 누구는 한식을 좋아하고, 누구는 패스트푸드를 좋아하고 누군가는 요거트만 좋아했다. 그래서 어쩜 이렇게 다른 아이들이 무리를 형성하게 되었을까 라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이상하다고 여겨졌던 웃음코드에 서로가 웃기 시작하면서 친해져 갔다.  


대학교 2학년, 과의 특성상 학교 캠퍼스를 벗어나 대학병원 옆에 있는 강의실로 수업을 들으러 가면서 기숙사에서 나와 자취를 시작했다. 나를 포함해 3명이 쓰리룸을 구해 강의실 근처에 집을 구했다. 친한 친구와 같이 룸메이트가 되는 것은 처음이었다. 대학교 1학년 기숙사 때 룸메이트가 맞지 않아 고생했던 나는 이제 재밌는 생활을 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부모님들이 보내주시는 반찬으로 밥을 같이 먹고, 친구들이 우리 집으로 놀러 오기도 하면서 즐거운 자취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렇지만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다 보니 친구의 삶을 더 가까이서 관찰할 수도 있었고, 같이 지내다 보니 몇 가지 트러블들도 있었으며, 그걸 조율하는 과정이 힘들기도 했다. 그리고 나에게는 없지만 친구는 가진 것들이 더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중 내 친구 B는 소위 말하는 엄친딸이었다. 공부도 잘했고, 의대를 다니는 남자 친구도 있고, 얼굴도 예뻤고, 성격도 좋고 사교성도 좋았다. 똑소리 나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허당끼가 있어서 벽이 있다고 느껴지는 아이도 아니었다. 그때 당시 나는 늦게 온 사춘기로 전공이 적성에 맞지 않아 힘들게 자아정체성을 찾아가고 있었는데, 그렇다 보니 잠을 잘 못 잤고 소리에 예민해졌으며, 알 수 없는 열등감과 이기심이 똘똘 내 몸에 똬리를 틀고 감고 있었다. 이렇게 장황하게 내 상황을 설명한 건 하나의 변명이며, 나는 지금 B를 질투했다는 것을 뱅뱅 돌려 말하고 있을 뿐이다.


약간의 불면증을 가지고 있던 나는 B가 데이트를 하고 늦은 밤에 번호키를 눌러 들어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애써 잠에 들려고 하면 그 번호키 소리가 잠을 깨워버렸고, 친구가 집에 들어오지 않으면 '조금 이따가 번호키 소리가 내 잠을 깨우겠지'라는 생각에 또 잠을 자지 못했다. 한번 예민해진 오감은 더듬이를 만들어 계속 예민해졌고 결국 예민 덩어리 포켓몬으로 진화했다. 나는 B에게 12시 전에 들어와 달라고 말했고, B는 어느 정도 내 의견을 들어주었으나, 왜 내가 내 집에 들어오는데 제한을 받아야 하는 것인가라는 의문을 품었다. 그렇게 조금씩의 의견 차이가 있다 보니 나는 못된 마음이 스멀스멀 들기도 했다. 그래도 나는 B를 좋아했다. B를 질투하는 마음이 있었으나 B를 정말 좋은 친구로 생각했고, 나는 이 양가감정이 나를 괴롭힐 때마다 그 감정의 원인을 찾기 위해 논리적인 방법으로 내 마음을 파고들어 갔으나 찾을 수 없었다. '질투'한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테다. 나는 그래서 내 방에 들어와 오랫동안 생각을 했고 일기를 자주 썼다. 결국 나는 양가감정을 다스리는 방법을 찾았다.


B에게 알 수 없는 질투심, 못된 마음이 들 때마다
그 마음에 이름을 붙이기로 했다. 

보라색 고양이. 나는 보라색 고양이가 찾아왔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조용한 발걸음으로 한걸음 한걸음 걸어오는 고양이처럼. 내 마음에 스며들어오는 못된 질투심을 '보라색 고양이'라 명명하고 그것을 인정하는 과정을 겪기로 했다. B가 또 늦게 들어와서 화장실에서 샤워를 하는 소리가 내 방에 들릴 때면 나는 가부좌를 하고 눈을 감은 채 '보라색 고양이가 온 거야'라고 마음속으로 말했다. 곧 있으면 지나갈 거야.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시인의 말처럼 나는 못된 마음에 '보라색 고양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나서부터는 그렇게 괴롭지 않아 졌다. 내 부러움과 질투심을 인정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고, 예민 덩어리도 다음 단계의 포켓몬으로 진화하지 않았다. 이름이란 생각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름을 붙이고 나서야 나는 못된 마음의 실체를 직면할 수 있게 되었고, 직면한 후에야 그것을 놓아주는 법을 알아갈 수 있었다. 나는 마음 편히 내 친구 B를 계속 좋아할 수 있게 되었고, 점차 '보라색 고양이'가 찾아오는 빈도가 적어졌다. 그렇게 내 욕망과 내 친구를 분리시킬 수 있게 되었다. 


"B야, 너는 어쩜 예쁜데 공부도 잘하고 연애도 잘하고 성격도 좋을 수 있니. 부럽다 정말. 나는 네가 부러워."


부럽다고 표현하는 것이 지는 것이 아닌데, 우리는 매번 진다고 생각해서 솔직하게 부럽다고 말을 못 한다. 말을 못 하게 되면 마음 안에서 질투심이 뿌리를 내리고 새싹을 피운다. 그 마음을 알고 나서 뿌리를 송두리째 뽑아버리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모든 것을 비꼬아버리는 시기심까지 생겨버리면 정말 답이 없다. 그래서 그렇게 되기 전에 '부럽다'라고 자신 있게 부끄러워하지 않고 표현할 수 있는 마음을 길러야 한다. 솔직함은 이런 곳에 써야 한다. 다른 사람의 치부를 솔직하다는 이유로 지적할 때 쓰는 게 아니라. 부러우면 솔직하게 부럽다고 말할 때 써야 한다. 부러워. 나는 네가 부러워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정말 멋있는 사람. 


"B야, 지금도 잘 살고 있어서 정말 보기좋아. 항상 내가 부러워할 수 있도록 행복하게 잘 살았으면 좋겠어(멋있게_찡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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