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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에포크 Mar 26. 2022

패션 오브 패션

passion of fashion

자식들이 장성하여 집을 떠나게 되면 아들과 딸의 방은 부모님의 소요에 따라 창고가 되거나 취미를 즐기는 방으로 바뀐다. 처음에는 오빠 방이었고, 몇 년 후에는 공무원 시험 공부방, 그리고 이제는 엄마방이 되어버린 곳. 이곳에는 어느 가정집에 흔히 있는 책상이 한쪽 벽면에 붙어있다. 넓은 데스크판이 가운데에 있고 한쪽 사이드에는 세로로 긴 책장이, 한쪽 사이드에는 데스크판을 받쳐줄 폭이 좁은 3단 서랍장이 받치고 있어 알파벳 h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모처럼 집에 내려온 나는 책상 앞에 앉아서 읽을 만한 책이 있는지 찾아보았다. 모조리 성경과 엄마가 공부하는 기독교 신학 책들이 가득했다. 고개를 돌려 데스크판 아래쪽 책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책장 안에 있는 내 대학교 전공책은 세로로, 영어문제집은 가로로, 그 중간에는 초등학교 때 스페인어를 배운다고 산 교재가 대각선으로 놓여있었다. 질서 없이 어질러진 칸에는 '저는 이렇게 효도했어요'라는 이름표가 붙여진 오빠의 초등학생 때의 클리어 파일도 있었다.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하는 엄마 덕분에 어렸을 때 그 시절로 돌아가게 하는 타임머신 책들이 있었다. 주제 없이 제멋대로인 책들을 따라가다 과거의 블랙홀로 빠져들게 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패션잡지였다.


잊고 있었다. 패션에 대한 나의 열정을

중학교 3학년에서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내 꿈 중에 하나는 패션잡지 에디터였다. 그 시절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온스타일 케이블 채널을 자주 봤다. 온스타일은 패션, 뷰티에 대한 방송을 하는 곳이었다. 보그나 엘르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자주 나왔고, 모델이나 연예인들이 화보를 찍는 모습들이 화려하게 비쳤다. 형형 색깔의 패션 아이템들, 모델들, 사진기의 셔터가 내려가는 소리들, 반사판, 조명들은 매일 거울을 보고 살던 중3 여드름 나는 소녀의 마음을 일렁이기에 충분했다. 그중에서도 나를 사로잡은 것은 모델이나 사진작가가 아니라 바로 에디터였다. 에디터는 콘셉트를 정해 화보를 기획하고 스튜디오, 사진사와 미팅을 하고 모델, 의상, 메이크업 관계자들과 컨택하면서 하나의 완성품을 만들었다. 


에디터라는 직업은 매력적이다 못해 묘했다. 이끌렸다. 이런 이끌림은 마치 페레로로쉐를 처음 먹었을 때 느끼는 감정과 같았다. 아몬드와 함께 굳혀진 동그란 초콜릿을 입으로 물었을 때 '바삭'하면서 부서져 그 안에 있는 달콤하고 부드러운 크림 같은 초콜릿을 만나게 되는 맛. 지구를 깨물어 맨틀을 부셔 비로소 핵을 만나게 되는 맛. 고급스럽게 금박으로 포장된 페레로로쉐에 용돈을 모두 바치게 하는, 손이 저절로 이끌리는 맛. 이끌림이란 길을 걷다가도 뒤를 계속 돌아보게 만드는 중력같이 마성의 힘을 가진 것이라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에디터가 되어야 했다. 


 누가 먼저 권유하지 않고 내가 먼저 돼보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보통 내 장래희망들은 "너는 그림을 잘 그리니까 화가나 디자이너가 되면 좋겠네." "공부를 곧 잘하니까 외교관에 관심을 한번 가져봐" 이런 식으로 나의 재능이나 특징을 점 지어보고는 아빠나 과외선생님들이 건네는 말을 듣고 거기에 관심을 가지면서 장래희망은 정해졌었다. 어른들이 인정하는 직업이니 좋은 것일 테니 의심하지 않았고, 명칭도 그럴싸했으니 나도 싫지 않았다. 그러나 에디터는 그 누구도 말해준 적이 없었다. 단연코 이 구역에서 내가 가장 먼저 알았을 것만 같은 직업이었다. 패션계는 내가 사는 작은 동네와는 거리가 멀었고 그 누구도 알지 못했으니 꿈을 건네지도 못했고, 알았다한들 건네고자 하는 이도 아마 없었을 것이다. 나는 패션계랑은 조금 멀었으니까. 아니 많이 멀었으니까. 모범생에 더 어울렸으니까.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공부하고 사고를 치지도 않고 머리를 뽀까뽀까 해버리지도 않았으니까. 


나는 마음속에만 간직하던 에디터의 꿈을 선언하기로 했다. 이건 운명적인 직업이니 나중에 말하는 것보다 빨리 말해서 반대하는 이의 충격을 덜 받게 하는 게 나았다. "나 에디터가 되고 싶어. 패션잡지 에디터."라고 말했을 때, 엄마는 "잡지? 에디터가 뭐야?"라고 물었고, 옆에서 듣고 있던 오빠는 "패션? 네가? 너 저기 뱅뱅 같은 데서 옷 파는 사람 될걸?" 이렇게 비웃었다. 한 살 차이 남매 사이란 진지한 말을 하면 이때다 싶어 놀리고 비난하고 조롱하는 게 일상이었다. 그 조롱 때문에 나는 차오르는 꿈을 선언하는 동시에 져물어가는 현실을 상상하고 말았다. 내가 '뱅뱅' 같은 프랜차이즈 옷집에서 하루 종일 서서 손님들에게 억지웃음으로 옷을 파는 모습을 말이다. 다리가 아파도 쉬지 못한 채, 표정 없이 냉담한 손님들을 맞이하는 모습. 이곳에 발을 딛게 된 설렘의 순간을 후회하는 모습. 그러나 나 방금 선언했는데. "뭐래"라고 애써 오빠의 말을 무시했다. 방금 전에 되고 싶은 것이 생겼다고 말했는데. 고작 오빠의 말에 내 선언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그건 서로에게 질 수 없는 남매간의 자존심이었다. 


나는 패션잡지를 사기 위해 동네서점으로 갔다. 눈이 부신 형광등이 다닥다닥 켜져 있는 서점에는 수학 문제집만 가득했지 '보그'는 없었다. '엘르'도 없었고 '코즈모폴리턴'도 없었다. 미용실에 꽂혀있을 만한 '여성중앙' 잡지들만 비닐랩에 쌓여있었다. 나는 이 작은 동네를 또 한 번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 할 수 없이 인터넷 서점에서 최신호 패션잡지를 장바구니에 넣었다. 미리 엄마의 공인인증서를 넣어둔 덕에 어려움 없이 비밀번호를 치고 결제를 했다. 며칠 후 집에 도착한 패션잡지들은 영롱했다. 반짝거리는 표지에 이름 모를 모델 언니가 화려한 화장을 하고 세상 멋지게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난 소중한 잡지를 한 장도 그냥 넘기지 않았다. 광고에도 뭔가가 숨겨진 패션 트렌드가 있을까 하여 화장품 브랜드들조차 꼼꼼히 보았고, 난해한 옷들도 '패션은 이런 거구나'라며 나의 무지함을 깨닫게 해주는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잡지에 기재된 텍스트들을 읽기는 쉽지 않았다.


'미국 아티스트 로리 시몬스와 컬래버레이션한 피터 옌슨은 쉬르레알리슴에서 영감을 받아 팬시 하지만 모던한 룩을 선보였다.', '기괴하고도 신비한 아트워크와 미니멀한 옷은 환상적인 조합을 자랑했다.', '80년대 펑크 무드를 절정으로 끌어올렸던 마크 제이콥스는 가와쿠보식의 로맨스에 오마주를 바쳤고, 조셉 알투자라는 21세기 알프스 걸을 런웨이에 올렸다. 그런가 하면 힙스터들의 우상 알렉산더 왕은 아메리칸 스포티 무드를 스트리트 룩에 접목했고, 프로엔자 슐러는 스케이트, 윈드 서핑에서 영감을 얻은 스타일 리사 한 다운타운 룩을 뽑아냈다.'    - 2010년 S/S 서울컬렉션에 대한 잡지 내용들

당최 무슨 말일까. 영어도 한국말도 아닌 단어들이 조사와 결합되어 있으나, 이게 과연 문장이라 할 수 있나. 나는 이런 패션계 용어를 이해하지 못했다. 패션잡지들은 한국말처럼 한글로 써놓았지만 외래어 표기법을 따른 한글이었을 뿐. 아방가르드, 팬시, 모던 이런 단어들은 사전을 찾아봐도 와닿지 않았다. 나는 그림과 단어를 매칭 하듯, 이게 모던, 이게 스포티. 유치원에서 아이들이 낱말카드를 가지고 단어를 배우는 것처럼 그림을 보며 익혀갔다. 그러나 다시 또 '모던'이 나왔을 때, 아까 보았던 것과 지금 이것도 같은 '모던'인가 헷갈리기 시작했다. 어떤 패션쇼를 보고 할 말이 없을 때 '모던'이라고 표현하는 건가. 조금 세련되었다 싶으면 '모던'인 건가.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 용어들은 생소한 것이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예전 수학 과외 선생님이 어려운 수학용어가 나올 때 해주었던 말을 떠올렸다. "어려운 게 아니다. 생소할 뿐이다." 


나는 잡지에 나와있는 여러 패션들 중에 마음에 드는 것들을 스크랩해서 스크랩북을 만들기 시작했다. 소중한 잡지를 자르는 것이 아까워서 고르고 골라 정말로 마음에 드는 패션만 잘라다가 파일에 넣었다. 구두를 좋아했었던 나는 많은 모델들의 신발만 오려서 파일에 끼워 넣었는데 덕분에 잡지에 있는 모델들은 발이 댕강 잘린 형태로 아방가르 rrr드 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패션에 대한 내 열정은 고등학교를 진학하면서도 지속되었고, 그 시절 아이스테이션이라는 pmp 기계에 '가십걸' 시리즈를 몽땅 다운로드하면서 더욱더 패셔너블한 삶을 살고 싶다는 욕망에 불이 붙었다. 그렇게 어쩌면 정말 내가 패션 에디터가 되는 건 아닐까라는 희망과, 오빠 말처럼 패션잡지 에디터 한다고 설치다가 결국 옷가게 주인이 되는 것은 아닐까라는 비관과, 화려함만 보고 관심 가졌다가 없어질 꿈은 아닐까라는 걱정들을 잘근잘근 한 조각씩 씹어 먹고 있을 때였다.


"나는 에디터가 될 거야. 보그 같은 패션잡지 에디터 말이야!"라고 친구 H가 말했다. 그건 선언 같았다. 어? 나는 처음에 잘못 들었나 싶었다. 에디터가 되고자 하는 아이는 우리가 사는 작은 지방도시에는 많지 않았다. 그런데 H가 자신 있게 소리 내어 말한 것이다. 보통 같으면 '나도 에디터가 되고 싶은데!' 라며 맞장구치면서 말했을 테지만, 나는 그 순간 입 밖으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저 아이가 많은 아이들 앞에서 에디터가 되고 싶다고 말한 순간, 내 꿈이 빼앗긴 것 같았다."이거 내가 찜했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찜한 것을 탐하는 건 친구사이에 도리가 아니었다. 그건 정말 열일곱 살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나중에 내가 에디터가 되고 싶다고 하면 친구의 꿈을 따라 하는 아이가 될 것이 뻔했다. 고등학생은 충분히 그럴만한 시기였다. 결국 나는 먼저 말하지 못했고, 선두를 빼앗겼고, 으레 모든 계주 달리기가 그렇듯 유리한 고지를 점하지 못했기에 내 꿈은 뒤로 밀려났다.


자랑스럽게 선두를 점한 내 친구는 화장품이며 옷이며 패션잡지에 나오는 말들을 자기가 하는 말인 것처럼 우리들에게 재잘거렸다. 그만큼 그 아이도 패션에 관심이 많았고 나처럼 분명 강하게 이끌린 것처럼 보였다. 같은 꿈이 가진 두 명의 여자아이. 나는 자연스럽게 친구와 나를 비교하게 되었다. H는 이미 말투나 제스처부터 섹스 앤 더 시티 그 자체였다. 짓궂은 남자아이들이 외모를 가지고 놀려대면 똑같이 웃으면서 당당하게 반격했고, 그런 모습에 남자아이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더욱더 장난을 쳤지만 그렇다고 책상에 엎드려서 울만한 H가 아니었다. "하하하하" 하고 큰소리로 웃어넘기거나, 너무 심할 때는 "어휴, 무시해 무시해"라고 들은 체도 안 했다. 장난의 주도권은 단연코 H에게 있었다. H는 혼자서도 잘 있을 수 있었고, 모든 친구들과도 잘 어울렸다. 우리 반을 넘어서 옆반 아이들과도 먼저 스스럼없이 친해지는 장학반 인싸였고 공부도 잘해서 성적도 놓치지 않았다. 


점점 H랑 나를 비교해가면서 에디터를 한다면 나보다 H가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장품이나 옷에 관심이 많고, 그것을 시도 때도 없이 재잘거리며 뽐내는 아이. 그런 당당함이 에디터와 잘 맞아 보였다. 뭔가 나는 좀 부끄러웠다. 에디터가 되고 싶다는 내 마음이 부끄러워졌다. 오빠가 "네가? 패션을 한다고?"라는 조롱이 자꾸 생각났다. 나랑 어울리지 않다는 생각을 할수록 에디터가 되어 일하는 모습이 상상되지 않았다. 억지로 상상하면 할수록 이질감이 느껴졌다.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은 느낌이었다. 엄마 화장대에서 립스틱을 몰래 바르는 아이. 열심히 꾸몄으나 촌스러운 아이. 내가 느꼈던 이끌림이란 그저 나와 전혀 다른 세계에서 느끼는 호기심이 아녔을까. 흔들거리는 다리를 걸으면서 두근거리는 마음을 사랑이라 착각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가지 못할 세계에 대한 잠시 반짝이는 동경 같은 건 아녔을까. 


고등학교 2학년이 되면서 점점 에디터가 달갑지 않아 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에디터라는 옷을 입은 질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리 손을 뻗어 휘휘 저어봐도 만져지지 않았다. 실체가 없으니 무게도 없었다. 패션에 대한 열정은 금덩이 같은 수능의 압박감을 이기지 못했다. 이길 여력이 없었다. 이길 재능이 없었다. 국영수를 공부하는 시간을 쪼개 패션잡지를 본다 해도 어려운 패션용어들은 익숙해지지 않았고 새싹같이 자그마 난 재능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꿈틀거렸던 에디터라는 꿈을 놓아주기로 했다. 내 것이 아녔으므로. 어쩌면 H에게 꿈이 빼앗겼다는 생각이 들었던 순간, 차라리 꿈을 빼앗기고 싶었던 것일지도, 이때다 라며 자연스레 그 꿈을 놓아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애초에 알고 있었다. 내가 패션에 크게 재능이 없다는 것을. 그저 나도 저 세계를 한번 탐해보고 싶은 마음이었다는 것을. 한 번쯤 닿아보고자 하는 욕망이었음을. 곧 사라져 버릴 꿈이었다는 것을. 그렇게 나는 대통령 후보가 사퇴하며 다른 후보에게 힘을 몰아주는 것처럼, H에게 에디터라는 꿈을 넘겼다. 2년 넘게 설렜던 꿈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슬프지는 않았다. 간절하지 않아서였을까. 감당할 수 없었어서였을까. 슬프지도 원망스럽지도 미안하지도 않았다. 뭐랄까. 그저 에어컨을 처음 틀 때 나오는 뜨거운 바람처럼 조금의 아쉬움이 야자를 마치고 돌아가는 밤바람에 느껴졌을 뿐이었다.


서른이 된 지금, 우리들 중에 에디터가 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꽤 오래전에 H를 만났다. 수도권 쪽으로 대학생활을 하는 고등학교 친구들과는 이십 대 초반만 해도 자주 만났었고 그중에 H가 있었다. 성남에 살던 H의 집에 가서 복숭아 맛 앱솔루트를 살얼음이 들어있는 잔에 채워 먹고 마시던 때, 그때도 H는 에디터의 꿈을 버리지 않았었다. 트렌드를 접하는 걸 좋아했고 여전히 쿨했고 웃겼다. "나쁜 남자를 좋아하는 게 아니야, 센스 있는 남자를 좋아하는 거지"라고 남자 사람 친구들에게 훈계를 했던 H는 갑자기 센스 있는 호주 남자 친구를 만나 우리의 부러움을 한껏 받으며 호주로 이민을 갔다. 그리고 몇 년 전에 호주에서 그 남자 친구와 결혼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H는 가끔씩 글래머러스한 모습으로 비키니를 입고 섹시하게 찍은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린다. H는 여전히 H스러웠다. 그녀의 인스타그램과 내 인스타그램을 비교해보면 여전히 고등학생 때 비교했던 그녀와 내 모습처럼, 인스타그램도 어쩜 그리 대조적인지. 피식하고 콧구멍으로 웃음이 난다. 


꿈은 먼저 찜했다고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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