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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섬토끼 Jul 03. 2024

애증의 당신에게

애증의 당신이라는 주제를 듣고 당신에게 편지를 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당신이 세상을 떠난 지 벌써 반년이 되었어요. 하지만 그때도 지금도, 나는 당신을 잘 모릅니다.


처음엔 당신에게 별다른 감정이 없었어요. 나에게 애정을 준 기억이 별로 없었거든요. 그러다 엄마에게 냉랭한 모습들(이라고 쓰지만 이유 없이 못되게 굴었던 일들이라고 쓰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군요)을 보며 당신이 점차 싫어졌어요. 저는 당신보다 나의 엄마와 심적으로든, 물적으로든 훨씬 가까우니까요. 제가 결혼을 하고 싶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당신 같은 사람이 내 시어머니가 되면 어쩌냐는 노파심에서였지요. 만약 그렇다면 난 당장 이혼할 거 같았거든요.


당신은 일반적인 할머니는 아니었어요. 손녀를 잘 돌보고 마음을 쓰기보다는 항상 자신이 먼저였던 사람이었으니까요. 우리가 몇 년간 함께 살 때도 당신은 우리를 돌봐준 적이 없어요. 늘 당신의 취미생활이 바빠 우리는 뒷전이었거든요. 그래서 함께 살았음에도 내 앨범에 우리가 함께 찍은 사진은 손에 꼽을 정도예요. 그런 당신이 당신 딸의 아이를 돌보러는 그 먼 서울까지도 잘 갔다는 사실은 내가 자란 후에 알게 되었습니다. 당신에게 나란 존재는 도대체 어떤 존재였을까요?


나는 당신이 작년에 시한부 선고를 받았을 때 충격을 받지는 않았어요. 다만 그 소식에 마음이 아플 아빠가 걱정이었죠. 당신이 호스피스로 이동했을 때는 정말 잠깐 들렀었어요. 마음에서 우러나왔다기보다는 내 죄책감을 덜기 위한 행동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도 나는 내가 쓴 글보다는 꽤 손녀다운 면모를 보이긴 했었거든요. 명절마다 찾아가기, 아주 소량의 용돈 드리기, 가끔 전화하기 같은 거요. 어렸을 땐 편지도 종종 썼었고요.


당신의 장례식은 생각보다 경건하고 조금 슬펐어요. 솔직히 나는 울지 않을 줄 알았거든요. 하지만 마지막 날 장례미사에서 당신의 모습을 보는데 갑자기 울음이 터져 나왔어요. 그 울음을 억누르느라 꺽꺽거리는 소리를 냈죠. 저는 보통 눈물이 나면 그냥 흘리는데 그날은 왜인지 그러면 안 될 것 같았어요. 난 그 눈물을 흘릴 자격이 없는 것 같았거든요. 다른 사촌들만큼 당신을 애틋하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내가 울어도 될까요? 그건 위선이 아닐까요?


어쨌든 당신은 당신이 세상에서 존재하지 않던 날부터 내 마음속에 더 머물게 되었어요. 나는 당신이 가끔 궁금했어요. 당신도 나만큼 젊었을 때가 있었을 텐데 내 기억 속의 당신은 항상 나이 든 여성이었으니까요. 당신을 내 할머니가 아닌 1930년대에 한국에서 태어난 여성이라고 생각하면 아마도 이해하지 못할 일이 없었을지도 몰라요. 제삼자의 눈으로 봤다면 당신을 이해할 수 있었을 텐데, 우리가 가족이어서 당신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게 아직도 의아합니다.


가족과 떨어져 서울에서 어떤 집의 양녀로 지내게 되었을 때는 어떤 기분이었어요? 갑자기 일어난 전쟁 때문에 부산으로 급하게 피난을 가게 되었을 때는요? 그 뒤에 홀로 부산에 남았을 때는 외톨이가 된 느낌이었나요? 이북에서 온 남성과 결혼하게 된 이유도 궁금해요. 당신을 공주처럼 모시던 남편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을 때가 당신은 40대였을 테죠. 나는 그 마음이 어떨지 상상도 안 가요. 아빠나 고모들에게서 당신의 삶을 듣게 될 때면 가끔 당신의 삶이 서럽기도 했어요. 이런 생각을 왜 난 당신이 살아있었을 때는 하지 못했던 걸까요?


이 글을 쓰며 곰곰이 생각해 보니, 당신과 나 사이에도 이미지로 떠오를 만한 추억이 있었어요. 함께 큰 방에 앉아 이북식 만두를 빚던 일이라든가, 이상한 모양으로 만든 송편도 귀엽다고 해주던 일 같은 거요. 내가 가끔 놀러 가면 웃으며 손을 잡고는 아이고 내 새끼‘라고 부르던 일도 떠올랐어요. 애틋한 추억은 나와 외할머니만의 것인 줄 알았는데, 마음 한구석에 당신이 차지하고 있는 공간도 있었네요.


나는 내가 당신에 대한 글을 쓸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어요. 아니, 쓸 생각이 없었어요. 그런데 이렇게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 있네요. 내가 그동안 너무 당신을 미워하기만 했었나 봐요. 지금이라도 내가 사과하면 받아줄 수 있나요? 애증의 당신, 정숙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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