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음사 한편 14호 <쉼>
“요즘 뭐 하고 지내세요? 지금 어디에 있는지 물어봐도 돼요?”
“아, 저 요즘은 쉬고 있어요.”
무업기간이 일 년이 넘었다. 내가 근무하던 업계는 보통 계약직으로만 인력을 뽑았고, 그 덕분에 나는 매년 새 둥지를 찾아 떠나야만 했다. 그렇게 옮겨 다닌 직장이 열 군데. 그래서인지 나는 쉬는 법을 몰랐다. 남들이 말하는 ‘엘리트 코스’를 밟지 않은 나는 쉬는 순간 업계에서 도태될 테니 틈을 줄 수 없었다. 좋은 대학을 나오지 않은 비수도권 출신에게는 조금의 쉼도 용납되지 않는다. 쉬는 순간, 힘들게 올라탄 트레드밀에서 떨어지고 만다. 그러니 닥치는 대로 우걱우걱 씹어 먹는 수밖에.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맛보려고 노력했다. 과하고 급하게 먹은 지식과 경험 때문에 나는 항상 체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어떤 종류의 뿌듯함이 돋아났다. 이상한 일이었다. 몸과 마음이 상해가면서도 그런 감정을 느꼈던 건 분명히 문제가 있는 일이었지만, 그때의 나는 그게 이상한 줄 전혀 몰랐다. 좋아하는 일을 한다면 이 정도는 참아내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다. 쉰다고 하면 늘 불안한 마음이 앞섰다. ‘다 같이 뛰는 데 나만 트랙에서 벗어나 잠시 쉰다면 아마 그들과의 거리는 점점 더 멀어지겠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쉬게 되더라도, 생산적으로 쉬어야겠구나.’ 쉴 때도 최대한 많이 경험할 것, 그것들을 모조리 기록할 것, 사진도 최대한 많이 찍어둘 것. 이렇게 쉬면서도 죄책감을 가지지 않게 하는 장치가 내게는 늘 필요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는 것은 나쁜 것, 게으른 것, 하면 안 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란 건 내 사전에 없었다.
그러던 내가 작년에 일을 그만두었다. 더 이상 트레드밀에서 달리고 싶지 않아서였다. 아니, 달릴 자신이 없었다. 일이 아닌 하고 싶은 것들을 해보기로 했다. 원 없이 책을 읽고 여러 독서 모임에 나가보았다. 외국어 스터디에 참여하기도 했다. 아무도 읽지 않을 글을 쓰고 낙서 같은 그림을 종종 그렸다. 갓생을 사는 사람들이 한다던 미라클 모닝을 짧게나마 실천해 보기도 했고, 아침에 일어나 모닝페이지도 꾸준히 써봤다. 운동도 규칙적으로 다녔다. 관심 있는 주제의 행사도 끊임없이 찾아다녔다. 이 모든 것이 ‘돈을 버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쉼’이라고 여겼지만, 또 쉼이라기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시간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쉰다는 것은 무엇일까? 텅 빈 휴식이라는 건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거지?
나는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남들이 물으면 곧잘 ‘쉬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내가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명상도 해봤고(5분 만에 졸았다), 차도 마셔보고(며칠 하다가 귀찮아져서 포기했다), 요가도 했다(잡생각이 너무 많이 나서 오히려 속이 더 시끄러워졌다). 남들이 비울 때 하는 행동을 따라 해 봤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무작정 걸었다. 계획도 목적지도 없이 그냥 걷다가 다리가 아프면 눈에 보이는 벤치에 앉았다. 종종 자전거를 타고 멀리 가기도 했다. 멈추고 싶을 때는 멈췄다. 동네를 산책하며 새로운 골목길을 찾거나, 남의 집 건물을 구경했다. 햇살이 좋은 날에는 홍제천에 떠다니는 새를 하염없이 보거나, 이름 모를 풀꽃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전혀 생산적인 일이 아님에도 마음이 불편하지 않았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걷다 보니 자연스레 햇빛을 많이 받을 수 있었고 기분이 평소보다 좋아졌다. 핸드폰을 보고 있지 않으니, 자연과 사람을 천천히 관찰할 기회도 생겼다. 자연스레 잡생각이 사라졌고 어지러웠던 마음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 아, 나한테 맞는 쉼은 걷기였구나. 그 이후로 하루에 한 번은 집 밖에 나가 걸었다. 걸으면 걸을수록 실체 없는 조바심이 사라져갔고, 마음에 여유가 생기니 평소보다 더 다양한 것을 보고 느낄 수 있었다. ‘비워야 채울 수 있다는 게 이런 거구나.’
지금도 달력 앱을 켜보면 비어있는 날이 거의 없다. 제 버릇 남 못 준다더니, 여전히 빽빽한 일정을 보면 한창 일할 때보다 더 바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 일정 사이에 ‘걷기’라는 쉼을 넣을 줄 안다. 남들이 보기엔 여전히 ‘쉼’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것도 꽤나 큰 변화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조금씩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늘려갈 예정이다. 급체하지 않기 위해서 천천히 해나가되, 꾸준히 해보려 한다. 언젠가 다시 일을 하게 되더라도 꼭 걷기만큼은 게을리하지 않아야지.
* 민음사 한편 14호 <쉼>에서 독자이벤트로 진행했던 하미나 작가님 글방에 참여하여 작성한 원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