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투병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게 된 이유
내가 대학교 3학년이었을 때, 아빠가 폐암 4기를 선고받았다.
그로부터 4년 6개월 뒤, 크리스마스 다음 날 아빠는 숨을 멈췄다.
내가 27살 때의 일이었다.
저 세 문장으로는 내가 겪어 온 시간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
20대 중반, 모두가 미래를 향해 나아갈 때 아빠의 식사를 챙기기 위해 집으로 돌아가는 나의 모습은 어딘지 슬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아빠와 함께 장어를 구워 먹으며 술 한잔 기울이는 시간이 제일 재밌었다. 아빠는 뛰어난 리스너이자 ‘라떼는 말이야~’를 점잖게 시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유학과 대학원을 포기하고 급하게 취업전선에 뛰어든 나는 현실 앞에서 꿈을 포기한 비운의 주인공 같아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오히려 회사를 다니면서 본격적으로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북디자이너 사용법> 같은 내 이야기를 찾게 된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지독하면서도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언제부턴가 내 안에는 내가 겪은 이야기를 작품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로 가득 찼다.
동시에 의문도 들었다.
내가 겪은 이야기가 작품이 될 가치가 있나?
어떤 상실은 작품이 되어 사람들에게 닿고
어떤 상실은 혼자 읊조리다 잊히는 걸까.
그러니까 어떤 종류의 상실이 작품이 되는 걸까.
혹은 상실을 대하는 어떤 시선이 작품으로 남을만할까.
내가 쓰고자 하는 것은 사실 자연스럽게 보내야 하는 종류의 상실인데,
애써 움켜쥐고 부릅떠 지켜봄으로써 자신을 더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지 않을까?
이 이야기가 당신에게 어떻게 가 닿을지 모르겠다.
단순한 불행 서사, 극복 서사로만 읽히지 않길.
차라리 레퍼런스가 되면 좋을 것 같다.
23살의 나는 아빠를 잃게 되면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참고할 사례가 없어서
내내 내게 닥친 비극을 숨기고 다녔었다.
확실한 건,
나는 세상에서 얼마나 불행한 사람일까 순위를 매기는 일 보다
내가 무엇을 잃었는지 셈하는 일보다는
이 만화를 그리는 편이 좀 더 재밌다는 것이다.
무엇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해보겠습니다.
야근만 안 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