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처음으로 취준생이 되었다.
0.
하룻밤만이었다. 아주 힘들게, 정말 꾸역꾸역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다시 만들고, 아침 8시에 메일을 보냈다. 지인에게 추천받은 채용 건이라 없는 시간에서도 나름의 최선을 다했다. 이전에 내가 좋아하는 회사에 보내기 위해 자필 포트폴리오를 만든 이후로 처음이다. 그러고 보니 그때는 발품 들여서 사진 촬영하고, 공 들여서 디자인하고 호들갑을 떨었었다. 초심자의 노력은 정말 가상했다.
때는 2014년. 애정 하는 W사의 마케팅 인턴 공고를 보고 나는 흥분했다. 앞서 간단히 얘기했지만 꽤나 열심히 준비를 해서 서류를 보냈던 기억이 난다. 굳이 모든 파일을 손을 그림을 그려 웹툰 형식으로 포트폴리오를 만들었으니, 비전공자에게는 험난한 여정이었다. 결과는 탈락이었지만, 그때 가졌던 애사심은 직원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 후 시간이 흘러서 우연한 기회로 그 회사의 마케팅실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이벤트 당첨품을 받는 간단한 것이었지만, 집이 가깝다는 핑계로 회사에 직접 방문했다. 덕분에 마케팅 담당자 분도 볼 수 있었고, 그 회사의 분위기도 느낄 수 있었다. 당시에는 사회 경험도 없었기에 꼭 그 회사가 아니더라도 회사라는 곳을 경험해 볼 수 있었다. 그래서 그 회사는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작업 공간이 되었고, 가장 가고 싶은 회사가 되었다.
01.
그렇게 또 시간이 흘러 직장을 잡았고, 1년 정도 일을 하기도 했고, 또 그만두기도 하면서 생애 처음으로 취준생이 되었다. 막상 일을 그만둘 때에는 일을 바로 시작할 생각이 없었다. 의지가 부족했고, 넉넉히 시간을 두고 배우고 싶은 게 많았다. 디자인, UI와 UX, 프로그래밍, 영상 편집 기술까지 체크 리스트를 만들 정도였다. 그런데 우연인지 운명인지 내가 가고 싶었던 회사가 공고를 냈다. 내가 원하던 포지션. 하지만 경력직 적어도 3년의 경력이 있어야 했다. 부족한 스펙.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고, 나는 휴학을 한 번도 하지 않고 일을 시작했다. 3년의 경력직이 되려면 대학교를 다니지 말았어야 가능했다. 능력이 부족한 것도 인정하고 있던 상태였다. 아쉬움도 기대도 없었다.
그런 마음에서 우연히 그 회사 대표님이 오시는 강연을 들으러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예전에 만났던 마케팅 담당자님을 만났다. 구직 상태임을 말씀드렸고, 채용에 올라와 있던 공고에 지원할 것을 추천받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마케팅 이사님과의 면접까지 성사되었다. 이사님. 나는 단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던 직책이었다. 나는 그런 분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더 감사하게도 면접을 보던 당시 '내가 생각하는 마케팅'에 대한 좋은 피드백을 주셨다. 좀 더 설명하자면, '본인이 생각하는 마케팅에 대해서 설명해 줄 수 있나?'라는 질문이었다. 나는 '저는 좋은 가치를 전달할 수 있는 것을 마케팅이라고 생각한다' 고 답했다. 하지만 그것은 직업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기자에 가까웠다. 마케팅 퍼포먼스를 낸다기보다는 보여주는 행위 자체에만 집중했었던 생각이었다.
이사님께서는 발견과 전달 그 이상으로 피드백의 중요성을 언급해주셨다.
결국 사용자와 무언가를 주고받는다는 것이 마케팅이 아닐런지... 조심스러운 조언이었다. 결코 나의 생각이 잘못된 것이 아닌, 그렇다고 본인의 생각이 진리는 아니라는 듯이, 나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 하셨다. 면접은 끝났고, 나는 그 자리에 채용되지 못했다. 솔직히 기대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을 많이 했지만, 기대는 될 수밖에 없었다. 결과가 나왔을 때 후회와 원망도 있었지만 이사님의 탈락 통보에는 배려심이 있었다. 덕분에 힘든 감정을 사라지게 할 수는 없었지만 덮을 수는 있었다.
02.
일은 사람과 하는 것이고, 좋은 사람과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크나 큰 축복이다. 내가 그 회사에서 일을 할 수는 없어도 그런 사람을 알게 되었기에 나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다. 지금도 그 회사는 내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회사이다. 누군가 그 회사에 내가 원하는 자리를 추천해준다면 다시 한번 최선을 다해 보리라. 하지만 그 날 이후로 나는 한 가지의 이상만을 두지 않기로 했다. 마치 타인에게 내 행복의 기준을 세우는 것과 같이 참 딱한 일이 될 수 있더라. 이제 난 여러 가지 회사들을 보고 있다. 모든 게 100%는 아니지만, 모든 건 또 변수가 많다. 내가 생각했던 이상적인 회사도 이상이 아닐 수도 있다. 반대로 내가 아니라고 생각한 회사도 직접 겪어보면 더 좋을 수도 있다. 변수를 남겨두는 것. 나는 좀 더 여유로워졌고, 내 행복의 기준을 나로 바꿀 수 있어졌다.
03.
다시 현재로 돌아오자.
면접을 보고 왔다. 지인의 추천으로 이력서를 넣은 곳에서 연락이 왔다. 오전 11시까지 회사 3층으로. 오래간만에 슈트를 입고 면접을 보러 갔다. 이전 회사도 근무 복장이 자유로웠기에 슈트를 입은 적이 거의 없었다. 예상은 했지만 면접을 보러 간 곳도 슈트를 입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시간은 15분 먼저. 일찍 도착했지만 면접관 분들은 예상 시간보다 5분 더 늦게 오셨다. 간단한 인사와 함께 시작된 면접. 면접관은 두 분이셨다. 한 분은 내 지인과 함께 일했던 사이. 나머지 한 분은 그분의 상사셨다. 두 분은 나의 간략한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보고 많지 않은 질문을 하셨다.
이전에 일했던 회사는 오프라인 쪽이 강한데 온라인 쪽에서 일하시는 것도 괜찮은지? 원하는 연봉은 있는지? 거주지는 어딘지? 우리 회사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다크서클이 있다는 말도 들었고, 두 분 다 쿨하고 자유로운 성향인 것 같았다. 예의가 없는 건 아니었다. 충분히 갖출 건 다 갖추고 격식이 있던 면접이었다. 특히 지인과 함께 일했다는 분은 확실히 지인이 좋아할 만한 스타일이었다. 그분은 본인의 상사보다 쿨함이 과하지 않았다. 본인을 다 보여준다기보다는 내가 하는 말에 더 집중했었다. 면접은 10분도 안 걸렸다. 빠르게 면접이 끝나고 두 분은 합격 의사를 밝혔다. 조만간 대표님 면접이 있다는 언지와 함께 좀 더 적극적으로 영상 컨텐츠 제작에 대한 의지를 보일 것을 조언해주셨다. 그 후 짧게 인사를 드리고 발걸음을 돌렸다. 슈트는 너무 얇았다. 바람이 차고 기침이 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