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처음으로 취준생이 되었다.
0.
이전에 지인을 통해 지원을 하게 된 PR회사에 1차 면접을 통과하고, 임원진 면접을 보러 갔다. 말은 임원진 면접이지만 회사 대표님과 대면한다는 건 알고 면접을 갔다. 나름대로 면접을 많이 보았기에 긴장하지 않고 면접 장소로 갔다. 약속 시간보다 15분 일찍 와서 대기하고 10분 늦게 면접을 봤다. 면접은 15분 정도 걸렸다. 결론은 합격이었지만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
오늘 뵌 대표님은 젊으신 분이셨다. 대표님께서 늦으신다고 경영 지원 실장님께서 나에게 회사 자료를 미리 넘겨주셨었는데, 연세가 좀 있으셔서 대표님께서도 나이가 좀 있지 않을까 예상했었다. 그래서 그랬나. 평소보다 더 긴장이 떨어져 있었다. 대표님 사무실에는 겉옷이 2벌 걸려있었고 책장에는 '트렌드 코리아' 책이 있었다. 내가 알기로는 이 회사가 몇 가지 광고 상을 받은 걸로 알고 있었는데 상은 모두 회의실에 있었고 대표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책상은 어지러웠고 표정은 담담했다. 나를 부르시고 나서 내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보시는 것 같았다. 그렇게 1-2분이 지나서야 대표님은 내 앞에 앉으셨다.
1.
"공모전을 좀 하셨네요? 몇 번 하셨던 거 같아요? 수상한 적은?"
"11번 했습니다. 입상은 2번 수상은 1번 했습니다."
"그렇군요. 다니던 학교는 만족스러우셨나요?"
"아니요.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마케팅 수업이 많지 않아 각 한 학기씩 총 세 학교를 다녔습니다. 학교를 돌아다니면서 다양한 마케팅 수업을 들었습니다."
"저희와 일하게 되면 디지털 마케팅에 대해서 일을 하게 될 텐데, 지난 1년 간 일을 하면서 쌓은 본인의 역량과 우리 회사에 어떤 연결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오프라인 프로모션 회사에서 일을 했습니다. 보니깐 회사 소개서에 오프라인 쪽에 대한 소개가 없던데 제가 함께 일을 하게 된다면 좀 더 큰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G사와 앞으로 일을 하게 될 겁니다. 혹시 기억나는 G사의 정책 중에서 베딩을 걸 수 있는 아이디어를 제시해 줄 수 있나요?"
"죄송하지만 기억나는 G사의 정책이 없습니다."
"그러면 S사와의 협업으로 베딩 할 만한 건 뭐가 있을까요? 아이디어를 내보세요"
"물과 관련된 성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볼 것 같습니다. 요새 일본 원자력 발전소 폭발 문제로 물 성분에 대한 의구심이 커진 상황입니다. 그것에 대해 면밀히 살펴보는 걸로 아이디어를 내겠습니다."
"디지털 마케터로서 일하고 그 이후에 어떤 식의 미래를 꿈꾸고 있나요?"
"최종적으로는 브랜딩 컨설턴팅이나 인하우스 브랜드 마케터가 되고 싶습니다."
"그럼 이제 더 말할 것도 없겠네요."
질문은 많지 않았다. 대표님께서는 나의 아이디어를 물으셨고, 난 솔직하게 없으면 없다. 있으면 내가 할 수 있는 방법들을 제시해서 아이디어를 구체화시켰다. 질문이 끝난 후 대표님께서는 내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접고 이렇게 얘기했다.
"페이스북을 많이 안 하시는 것 같습니다. 디지털 콘텐츠 제작자로서 자질이 부족하네요. 지금 이력서와 포트폴리오에 써져 있는 것에 대해서 저는 믿지 않습니다. 지금도 저에게 기업 디지털 마케팅에 대한 정보를 묻는 전화가 와요. 방금 전화를 받은 (면접 중에 전화가 왔다) 분은 우리나라에 200명 있을까 말까 해요. 근데 이런 정보는 누구나 알 수 있죠. 저희 사이트에 가서 잘 되는 건 어떤 건지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어요. 보입니다."
"어떻게 하면 대표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콘텐츠를 보는 눈이 생기나요?"
"이거 보세요. (페이스북을 보여주며) 제가 오늘 하루에 본 페이지들이에요. 클라이언트 페이지도 있지만, 대부분 참고 차 봅니다. 하루에 1분이면 챙겨봐야 할 페이지들의 콘텐츠 2-3개는 봅니다. 30분이면 적어도 10개의 페이지에서 20-30개의 콘텐츠를 볼 수 있죠. 중간에 다른 일도 한다고 치고 1시간이면 30개, 1 달이면 90개 1년이면 적어도 1080개의 콘텐츠를 볼 수 있습니다. 대행사에서 디지털 마케팅에 대해서 근무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어진 일만 하죠. 상위 0.1%는 이 시간을 투자해서 1080가지의 방법을 활용합니다. 이 차이는 확연히 보입니다. 일한 지 6개월 후면 이 사람과 계속 같이 일할 사람인지 아닌 지 알 수 있죠. 그게 아닌 사람은 1년이 지나도 쳐다도 보지 않습니다. 당신은 아직 자질이 부족합니다. 하지만 제가 신뢰하는 분께서 추천해주셨기에 일단은 합격입니다. 추후에 연봉 협상과 몇 가지를 조율하고 나서 같이 일할 지를 결정하면 될 것 같습니다. 제가 손님이 기다려서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2.
대표님의 손님은 정말 대표실을 나가자마자 바로 계셨다. 바로 옆 정수기 옆에서 커피를 타고 계셨고, 내가 나오자마자 인사를 하고 들어가셨다. 사무 여직원분께서는 밖으로 안내해주셨고 그렇게 임원진 면접은 끝이 났다. 면접은 사실 강연 같았다. 몇 가지 탐색 차 물어보신 것 외에는 나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모두 다 담진 못했지만 대부분 일 즉 업에 대한 근본적인 이야기를 전해주셨다. 대표님은 머리 속에 생각이 많아 보였다. 내 한 마디를 들을 때마다 열 마디가 생각나실 분이셨다. 아무튼 면접이 끝나고 든 생각은 3가지였다.
첫째로, 대표는 역시 대표였다. 잠시 잊고 있었는데, 대표라는 직업은 쉼이 없다. 꼭 쉼이 없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쉼이 있기는 힘들다.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쉼이 없는데 오늘 만난 대표님도 꼭 그와 같았다. 나에게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분은 쉼이 없었다. 빠른 말투와 눈으로 여기저기를 살피셨다. 어딘가에 쫓기는 모습이었다.
두 번째로, 대표는 갑을 관계를 이해하고 적용한다. 그분은 나를 철저한 을로 파악을 했다. 경력 1년의 오프라인 프로모션을 다닌 4년제 대학 졸업자. 그리고 디지털 마케팅을 하는 본인의 회사에 지원한 지원자. 근무를 하게 된다면 내가 급여를 주게 될 직원이자, 내가 땋온 프로젝트를 맡아서 진행할 실무자. 그리고 그런 위치에서 나에게 이야기를 했고, 나에게 조언했다.
마지막으로, 대표는 철저히 정량적이었다. 나에게 했었던 조언들은 대부분 본인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였다. 내가 질문을 했던 것은 순수한 내 호기심이었을 뿐, 그분은 내 질문 전에도 이미 몇 분동 안 본인의 이야기를 전달했다. 잘난 척이 아니라 순전히 그간 겪어왔던 경험 중 논리적으로 이 상황에 맞는 이야기를 했다. 그 상황에서 한 조언들은 나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이 아니라, 단지 이 상황에서의 -1을 +1로 만들어서 0으로 만드는 그런 논리에서 나온 말들이었다.
3.
퇴사 후에 내가 만났던 대표님들은 대부분 호의적이었다.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셨었고, 좋은 인사를 많이 해주셨었다. 순간 나는 방심했다. 보고 배울 게 많다고는 했지만 정작 집에 와서 다시 곱씹은 적이 없었다. 역시 배움은 익히는 게 중요하다. 요새 나는 긴장이 없었고 '일'이라는 것을 아주 쉽게 착각했다. 오늘 면접을 보고 나서 정말 정신이 바짝 들었다. 포트폴리오의 문제점도 보였고, 어떻게 바꿔야 할 지도 보였다. 오늘의 면접은 이 회사에 입사를 하는가 마는가의 문제가 아니었다. 외부에서만 배움을 찾으려고 했던 건 실수였다. 확실히 품을 들이고 노력하는 것 자체가 귀찮았던 것 같다. 결국 동기부여가 되어 스스로 하는 공부가 가장 효과적이다. 오늘에서라도 다시 깨닫게 되어서 다행이다. 사실 오늘 면접 후 대표님의 성향을 보고 입사를 할지 결정을 하려고 했으나, 오히려 나 자신에 대한 부족함을 깨달으며 의도치 않은 고민을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