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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록윤 Nov 27. 2023

Reason 1.  와인의 친구라서요!

우리는 당신의 후추친구입니다

진정한 친구는 언제 오나요?

아직 안 왔어. 근데 와. 오십 넘어서.


무당에게 이것저것 물으러 갔다가 시간이 남아서 무얼 물어봐야 하나, 하고 고민하던 차에 머리를 거치지 않고 입이 제멋대로 던진 질문이었다. 예상치도 못한 답변에 눈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아니, 진짜 친구가 아직 안 왔다고? 그럼 지금 있는 내 친구들은 다 가짜라고?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유유상종, 끼리끼리는 국룰이 전혀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리학적으로) 비슷한 에너지끼리 모이면 간섭되지 않고 증폭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끼리끼리 모이는 것이 좋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있다.


내가 던질 질문에서 ‘진정한’ 친구는 어떤 것인지 나도 모른다. 그런데 내 곁에 있는 친구들이 친구가 아니라는 말은 나 또한 누구에게도 친구가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 될 수도 있다. 그 후로 종종 ’ 진정한 친구‘가 무엇인지에 대해 아직도 생각하고 있다.


얼마 전 이쁜 꽃에서 열린 ’ 종교와 술‘ 워크숍의 도입부에서 타이슨이 말했다.


‘유미와 저는 삼십 년 가까이 된 친구예요.’

이후 이어진 이야기들은 놀라웠다.

존중과 사랑, 그리고 아름다움에 관한 이야기들.

이런 이야기들을 함께 나눌 수 있기에 그들이 오랜 기간 동안 서로의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타이슨이 말하길, 옛날 사람들은 포도를 (은유적으로 또는 상징적으로) 땅의 심장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포도의 모양이 심장처럼 역삼각형의 아래가 뾰족한 모양새인 것 같기도 하다.


채집과 수렵생활을 하던 호모 사피엔스들은 언젠가부터 포도를 기르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만년 전, 누군가는 팔천년 전 시작된 일이라고 기록한다. 그 시절엔 방제도 비료를 준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을 테고 재배란 그저 관찰하고 또 관찰하는 수준이었을 테다.


양조 또한 마찬가지.

채집과 수렵 생활을 너머 양조기술을 득한 호모 사피엔스들에게 양조란 땅의 심장을 항아리에 담아두고 그저 시간을 두고 바라보는 일이었을 테다.


이 아름답고 경이로운 산물은 시간을 먹고 와인이 된다. 비와 바람과 햇살의 에너지를 듬뿍 받아 역경을 헤쳐낸 포도들이 아주 향기롭게 변신하는 것이다. 포도가 자라나는 시간과 발효가 되는 시간이 더해진 와인은 시간의 선물이다.


자연물 중에 시간의 산물이 아닌 것이 있을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모든 것의 생산이 빨라졌다.

대량 생산을 하기 위해 또는 유통을 하기 위해 새로운 기계들이 많이 발명되었다. 우리의 생활은 아주 편리해졌고 동시에 빨라졌다.


우리의 시간을 압축하고 당겨주는 일은 그렇지 않은 경우에 비해 더 비싼 값을 지불해야 한다. 예를 들어, 같은 거리를 이동할 때 걷는 것보다는 버스에 더 큰 비용을 지불하고, 버스보다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하면 택시를 이용해서 시간을 보다 단축시킬 수 있다. 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전문가 또는 파트타임을 고용해서 내가 직접적으로 시간을 소진하지 않도록 기꺼이 돈을 지불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식재료를 사는 일은 어떠한가?

여기에 시간을 단축하고 내가 하지 않은 일을 대신해 주는 사람에게 그에 상응하는 가치를 지불한다는 원리를 적용해 보자. 내가 배추를 기르지 않는 대신 배추를 사고, 포도를 기르고 양조하지 않는 대신 와인을 산다. 그런데 이때 이상한 일이 펼쳐진다.


김장철이니 고춧가루를 예로 들어보자.

시장에는 태양초와 기계를 이용한 고추들이 함께 공존하고 있는데 태양초는 무지 비싸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다. 태양초는 아주 오랜시간에 걸쳐 생산되는 고춧가루인데, 앞에서 우리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시간을 돈으로 산다고 했다. 그런데 왜 태양초 같이 시간이 오래 걸려 만들어지는 식재료에 더 많은 돈을 더 지불하는 것일까?


다시 버스와 택시의 예시를 생각해 보자.

우리는 같은 거리를 간다고 할 때 더 오래 걸리는 버스에 분명하게 더 낮은 비용을 지불한다. 그런데 식재료에 있어서 만큼은 시간이 아주 많이 필요한 일들은 오히려 더 비싸다. 우리는 이것의 의미하는 바를 한 번쯤은 생각해봐야 한다.


태양초는 햇볕아래에서 길게는 수 주의 건조과정이 필요하고, 기계로 건조하는 고추는 몇 시간이면 충분히 건조된다. 고춧가루를 생산하는 생산자는 건조기를 구매하는 방식을 통해 돈으로 시간을 살 수 있다.

반면, 고춧가루를 구매하는 소비자는 고춧가루가 만들어지는 시간에 비례한 가격을 지불한다. 그것도 기계건조에 비해 태양초에 몇 배나 되는 비용을 기꺼이 지불하고야 만다.


사람들은 먹는 것에서 만큼은 최대한 우리 땅에서 자란 것, 자연적으로 재배한 것에 가치를 더 높게 둔다. 단순히 건강에 좋아서라고 하기엔 설명이 너무 부족하게 느껴진다.


식재료와 술만큼은 시간을 더 오래 두고 최대한 자연적으로 재배되고 오래 보관한 것에 가치를 둔다.

이것은 단순히 시간을 아끼기 위해 돈을 지불하는 것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패턴이다. 이러한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시간의 가치와 조화로움을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주 오랜 기간 태양아래에서 최대한 자연적으로 건조된 태양초의 시간은 시간 그 이상의 것임을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감각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만물은 자기가 가진 그릇이 있다.

익은 고추가 자기가 가진 수분감을 자연스럽게 내어 보내는 일과 인위적인 가열에 의해 본래의 속도에 비해 빠른 속도로 수분을 내어 보내는 일은 상당히 다르다. 자연스러워야 모든 것이 어색하지 않고 조화로운 에너지를 가진다.


농약을 치지 않고 자연적인 방법으로 재배된 채소들과 , 항생제를 먹이지 않은 고기와 그 동물로부터 나온 달걀, 최대한 자연에 가까운 방식으로 만드는 술들은 생각보다 시간이 꽤 많이 걸리고 이러한 일의 대부분은 자연과 시간이 해준다. 이러한 방식에서 인간은 성실하고도 느슨한 자연의 조력자가 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들이 훨씬 맛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안다. (여기에서 ’맛‘은 개개인의 주관적인 취향의 맛이 아니라 자연이 지니고 있는 본연 그대로의 맛을 의미한다.)


시간의 산물들이 제대로 된 시간을 보냈다면 당연히 자기만의 자연적인 캐릭터를 한껏 품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자연스럽고 조화로운 에너지를 단번에 알아챌 수 있다. 인간은 감각의 동물이니까.


올해 김장시기가 당겨졌다고 한다.

작년만 해도 12월 말에도 김장한다는 분들이 종종 있었는데, 올해는 11월부터 절인 배추가 유통되었다고 한다. 지역에 따라 11월 배추는 본래 수확되어야 하는 시기보다 이른 것이므로 본래의 배추가 가져야 하는 맛이 덜 들었을 확률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공급자가 12월 이후에는 더 이상 공급하지 않을 것을 대비하여 절인 배추를 산다.


유통하는 사람들에 의해 소비자들의 선택지가 결정된다. 시장에는 태양초와 기계건조 고추가 공존하고 컨벤셔널 와인과 내추럴 와인이 공존한다. 농사를 짓지 않고 양조를 하지 않는 나는 다양한 선택지가 많아지니 자연스러움과 산업화의 병존이 오히려 반갑다.


하지만 생산자의 입장에서는 늘 딜레마에 빠진다.

최대한 자연적으로 재배한 후추들을 소개하고자 하는 오페퍼 또한 그렇다. 태양초와 내추럴 와인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오페퍼의 후추들은 제각기 다른 향과 맛을 지닌다. 매번 향을 맡을 때마다 놀랍다. 하지만 좋은 후추를 제대로 소개하는 것은 쉽지 않다. 특히나 스페셜티 후추 시장이 전무한 한국에서는 말이다.


오페퍼는 후추 역시도 시간의 산물로 본다. 와인이나 차, 다른 농산물과 다를 것이 없다. 자연에서 온 것들은 모두 본연의 맛과 향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결국 땅의 맛이다.


오페퍼는 사람들이 최대한 많은 선택지를 가져갈 수 있도록 좋은 후추들을 사람들에게 소개를 하고 있다. 나는 이 일을 후추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요리하는 사람들의 선택지를 넓혀주기 위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전 세계의 와인 메이커들과 마르쉐에 출점하시는 농부님들이 그러하듯 새로운 세계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다양성과 시간의 가치를 전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다양성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사고는 꽤 유연해질 수 있고, 유연한 사고를 장착하게 되면 우리는 많은 사람들과 꽤 사이좋게 지낼 수 있다고 믿는다.


오페퍼는 언제나 반복해서 말한다.


‘당신의 페퍼메이트, 오페퍼’

당신의 페퍼메이트라고 자청하는 것은 반대로 오페퍼의 친구가 되어달라는 주문이기도 하다. 초록은 동색이고 유유상종과 끼리끼리는 사이언스니까.


그럼 의미에서 시간의 산물인 와인과 후추는 ‘좋은’ 친구라는 데 한치의 의심도 없다.


*우리가 후추를 좋아하는 939가지 이유*

이 프로젝트는 ‘후추를 좋아해요’라는 말 이면에 어떤 것들이 담겨있는지 관찰해 보기 위한 일지입니다. 콘텐츠의 뿌리들은 그간 오페퍼를 처음 만나신 분들이나 오페퍼를 애정해 주시는 분들께서 전해주신 코멘트에 기인합니다


Your peppermate,

Ö PEP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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