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열문단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도영 May 30. 2024

외운다는 것의 즐거움

열 개의 문단으로 전하는 짧은 생각 : 열문단 #.99

01 . 

글을 써서 생각을 공유하거나, 어쩌다 주어지는 기회로 강의나 북토크를 할 일이 있다 보니 타인으로부터 특정한 질문을 받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요, 그럴 때 자주 반복되는 공통 질문 중 하나가 '근데 어떻게 그런 말들을 다 기억하고 계세요?'라는 겁니다. 제가 쓰는 글에는 남들이 사소하게 해준 이야기들도 많이 담겨 있고 또 북토크나 강의를 할 때도 어디서 들은 얘기, 누군가 매체에 등장해서 한 얘기 등을 자주 인용하기도 하거든요.


02 . 

대단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고 일단 기록하고 메모하는 걸 좋아한다는 게 첫 번째 이유인 것 같습니다. 좋았던 이야기가 있으면 되도록 그 자리에서 기록하려고 노력하고, 가급적 원문 그대로 옮기려 노력하거든요. 메시지만 통해도 무방하다는 사람들이 있지만 저는 그 사람이 말하는 화법과 감정 같은 것도 잘 느껴지기를 바라기에 이왕이면 있는 그대로를 받아 적고자 꽤나 공을 들이는 편입니다.


03 . 

다만 기록하기가 쉽지 않은 순간들도 생각보다 많습니다. 상대방이 어렵게 말했다기보다는 그 상황 자체에서 뭔가 받아쓰는 행위를 하는 것이 실례가 되는 순간이 그렇죠. 특히 상대의 말에 집중해야 하거나 같이 공감하고 동조해야 하는 순간에 마치 기자에 빙의된 듯 종이에 글을 쓰거나 핸드폰을 타이핑하면 받아 적는 것만큼 놓치는 것도 많은 법이고요. 그래서 저는 늘 '아.. 받아 적고 싶다.. 근데 받아 적으면 또 안될 거 같아..' 같은 딜레마에 빠지곤 합니다.


04 . 

이런 과정 속에서 생긴 버릇이 바로 짧게나마라도 그 순간의 이야기를 통째로 외우려 노력하는 겁니다. 머리가 좋은 편이 아니기에 그마저 100% 결과물로 변환되지 않지만 그래도 대화를 하는 도중 놓치고 싶지 않은 말이 나오면 '아 저 말 꼭 기억해야지'라는 의지를 가지고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어 보는 편이거든요. 

하지만 이어지는 대화를 따라가야 하기에 무작정 외우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죠. 때문에 잠깐 틈이 생기거나 혹은 대화가 끝난 뒤 돌아오는 길에 그 대화의 순간을 복기하면서 단 한두 문장이더라도 원문 그대로를 외워보려고 노력하는 습관이 생긴 겁니다.


05 . 

그런데 이렇게 외우는 버릇이 몸에 붙자 생각보다 따라오는 장점이 많더라고요.

우선 그냥 흘러들었거나 어딘가에 써두기만 했으면 그 맛을 온전히 느끼지 못했을 말들이었을 텐데 잊지 않으려고 애쓰다 보니 그 문장들을 몇 번이고 곱씹게 된다는 거였습니다. 때문에 화자 스스로도 발견하지 못한 재미있는 뉘앙스를 발견하거나 독특한 문장 구조를 되새기게 될 때가 참 많습니다. 제 경우엔 화자의 말을 인용한 글이 책에 담겨야 할 때는 꼭 상대방의 동의를 구하는 과정을 거치는데 그때마다 제게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들도 간혹 놀랠 때가 있습니다. '근데 이걸 어떻게 기억했어?'라는 게 첫 번째 놀람 포인트고, '오, 내가 이렇게 말했었구나. 나도 까먹고 있었는데!'가 두 번째 놀람 포인트죠.


06 . 

또 하나의 장점은 내가 외우고 있는 문장에서 조금만 변주를 준 문장을 만나도 그 디테일이 온몸으로 전해진다는 데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외우고 있는 시 한 구절, 내가 기억하고 있는 유행곡 가사가 있다고 쳐보죠. 근데 그와 유사한 듯 다르고, 같은 뜻을 전할듯하다 다른 이야기를 하는 문장을 만나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요? 아마 그 즉시 '어? 내가 아는 그 문장인가? 아닌데? 분명 이 부분이 다른데?'라며 디테일한 부분에 집중하게 될 겁니다.

이처럼 일상 속의 대화나 문장들도 작은 노력을 들여 조금씩 외워놓다 보면 남들은 놓치기 쉬운 또 다른 디테일들에 포커스를 맞출 수 있는 거죠.


07 . 

저는 이른바 '암기'라고 불리는 외움의 미학이 점점 퇴색되어가는 시대 분위기가 조금 아쉽기도 합니다. 사실 요즘은 손가락만 몇 차례 움직여도 원하는 건 모두 얻을 수 있고, 아니 정확히는 'OO아~'라며 인공지능 비서만 호출해도 웬만한 건 다 알려주는 시대니까 굳이 뭔가를 외워야 하는 니즈가 점점 사라지는 것은 분명한데요, 그렇기 때문에 외우는 것 자체가 쓸모없는 행위로 치부되거나 미련한 노력처럼 비춰지는 것은 조금 다르게 구분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외운다는 게 꼭 특정한 정보를 다시 꺼낼 때만 활용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08 . 

더불어 외우는 것보다 이해하고 공감하는 게 훨씬 중요하다는 풍조가 외움의 즐거움을 반감시키는 것도 일정 부분은 맞는 것 같아요. 물론 그 본래의 뜻은 '무작정 외우기만 할 게 아니라 진짜 의미를 발견하고 내 나름의 시각으로 받아들여라'는 것이겠지만 저는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고 보거든요. 뭔가를 외워두다 보면 시간이 흐른 다음 의외의 포인트에서 색다른 의미를 찾게 되기도 하고 다른 문장들과 섞이며 또 하나의 콘텐츠가 생산될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일단 외워둔 뭔가가 있어야 그게 소스로 작용할 수 있고요.


09 . 

그래서 저는 요즘엔 누군가가 '근데 그걸 어떻게 기억하고 계세요?'라고 하면 그냥 당당하게 '외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아니 그런 걸 왜 외우세요?'라고 묻는 질문에도 '그냥 외워두고 싶어서요'라고 대답하죠. 물론 신기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훨씬 많지만 그중에는 '그래서 늘 끊임없이 뭔가를 쓰실 수 있나봐요'라고 기분 좋은 칭찬을 해주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설사 립 서비스라고 해도 저는 그게 또 이렇게 글을 쓰는데 좋은 원동력이 되어주는 것 같고요.


10 . 

타인에게 뭔가를 적극 추천하는 걸 좀 꺼려 하는 성격이긴 하지만 그래도 다년간 제가 해본 것 중에 꽤 괜찮다고 생각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외움'의 노력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마음에 드는 문장이건 즐겨 보시는 콘텐츠 속에서 발견된 특정한 대사건 간에 기억하고 싶은 건 한 번 외워보는 것은 어떨까도 싶네요. 감탄하고, 이해하고, 공감하고, 즐기기만 했던 것들이 어느 순간 내 것이 되어 마치 머리에 새긴 것처럼 또렷해지는 그 경험은 외외로 일상 속 행복감을 주는 요소이기도 하니까요.

매거진의 이전글 문제도, 대상도 떼어내주자 ('설득' 이야기 ③)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