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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영 Jun 06. 2024

공을 받고 싶다면, 공을 받을 준비를 해야지

열 개의 문단으로 전하는 짧은 생각 : 열문단 #.100

01 . 

간혹 친구나 후배 혹은 지인으로부터 고민거리를 공유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뾰족한 해답을 줄 수 있는 역량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친한 사이라면 그 고민의 무게 정도는 조금 줄여줄 수도 있을 테니까요, 천천히 이야기를 들으면서 상대가 생각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질문이라면 이따끔씩 슬그머니 끼어들기를 시도해 보기도 하죠. 


02 . 

하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그래그래 네 말이 맞다'라고 해줄 수는 없고, 그렇지 않아도 고민으로 머리가 복잡한 사람에게 '근데 내 생각엔 말야'라며 꼰꼰한 참견을 부릴 수도 없는 일입니다. 하물며 그냥 입을 꾹 닫고 듣기만 하면 '지금 내 말 듣고 있어...?'라는 대답이 날아올게 뻔하니 고민을 들어주는 데는 진정성 만큼이나 요령도 필요한 법이죠. 우리에겐 팩트를 구분하는 것 외에도 상대의 감정을 잘 케어해줘야 할 작은 의무 또한 있는 거니까요. 


03 . 

그렇게 나름의 노력을 하며 이런저런 재롱(?)을 떨어보려 하지만 가끔은 이런 대답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내가 지금 그런 말을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가 없네."

저야말로 그 의미가 무엇인지 백번 공감이 갑니다. 사실 문제를 떠안고 있는 상황이 되면 사람은 심리적인 방어 기제가 높아지기 때문에 평소에는 유연하게 타고 넘을 수 있는 잔잔한 파도와 같은 말들도 예민하고 날카롭게 느껴질 때가 있거든요. 그럴 땐 그 사실이 어떤 뜻인지도 알고, 나아가 그게 직접적으로 나에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 또한 잘 알면서도 선뜻 손을 뻗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정확히는 그럴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는 게 맞는 표현이겠죠. 


04 . 

그러나 이 '마음의 여유'란 것이 생각보다 참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백번 양보해서 지금은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의견이나 마음 쓰임을 온전히 받아들일 작은 여유조차 없는 경우가 있지만 그럴수록 내가 일부러 그런 여유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마음의 여유가 없는데 만들라뇨. 왜 돈이 없어 고민인 사람에게 그럴수록 돈을 벌라고 하시죠!"라는 (말을 실제로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만)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 이건 온전히 내 손해로 돌아오는 일이거든요. 저도 여러 번 겪어본 다음 깨닫게 된 인생의 작은 레슨런 같은 것이기도 했고요. 


05 . 

FC 바르셀로나 출신의 수많은 레전드 중 한 명인 안드레스 이니에스타(Andres Iniesta)는 축구 선수 가운데서도 패스 마스터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패스를 가장 완벽하게 하는 선수로 꼽힙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자서전인 ⟪The Artist⟫에서 이런 말을 전했죠. 

"바르셀로나 시절 저는 패스를 받을 준비가 되어있는 동료와 그렇지 않은 동료를 구분했어요. 그리고 저에게 그런 자세를 보여주지 않는 동료들에게는 가차 없이 말했습니다. '넌 오늘 내 패스 받을 생각하지 마!'라고요. 받는 사람이 준비를 하고 있다면 주는 사람은 훨씬 큰 선택지를 갖게 되죠. 단 한 걸음이라도 먼저 나와있는 선수나 조금이라도 몸을 틀어서 받을 준비를 하는 선수는 제 패스를 100% 활용할 수 있어요. 가끔은 저와 눈을 맞추는 것만으로도 제 패스의 정확도를 높이게 만드는 선수들도 있으니까요."


06 . 

뭐 축구의 로직을 그대로 삶에 끼워 맞추는 것도 한계는 있겠지만 저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을 때도 늘 받을 준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들어보고 나서 좋으면 좀 마음을 움직여 볼게요'라는 태도는 이미 공이 지나간 뒤 다리를 뻗는 것과 다름없고, 앞서 설명한 것처럼 '제가 마음의 여유가 없으니 되도록 제가 필요한 말만 정확하게, 제 앞에 딱 떨어뜨려 놔주세요'라고 하는 것 역시 패스를 해줄 사람의 의지를 꺾는 일이거든요. 그러니 어찌 되었건 내가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라면 나는 그 도움을 받기 위한 준비 동작 정도는 늘 염두에 두고 있는 게 좋습니다. 그래야 나에게 공이 올 기회가 높아지니까요. 


07 . 

조금 더 확장해 보면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고 어떤 콘텐츠 하나를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책을 읽는 과정에서도 저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최대한 열심히 받아보려고 나름의 준비들을 하는 사람이 있나 하면 이건 공감이 안돼서 싫고, 저건 너무 불친절해서 싫고, 그건 또 지금 내 상황과 반하는 거라서 싫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물론 저도 그런 상황이 비일비재하고 말이죠. 그러나 글을 통해 쭈욱 강조해온 것처럼 그건 정말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굴러오는 도움을 흘려보내버리고 마는 거랑 다름이 없는 거죠. 


08 . 

그래서 저는 일단 누군가에게 고민을 상담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제 나름의 준비를 해보고 있습니다. 

첫째는 상대의 말을 꼬아듣지 않는 것이고, 둘째는 내가 가진 불필요한 감정까지 상대에게 전달하지 않는 것이며, 마지막 세 번째는 '오늘은 100% 내 편을 들어줘'라는 스탠스를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야 상대도 제게 정확하고 의미 있는 패스를 해줄 수 있거든요. 세상 바쁘게 사는 와중에 힘들게 짬 내서 내 고민을 들어주러 온 사람에게 친하다는 이유로, 착하다는 이유로 그 사람의 리소스를 멋대로 부려먹을 수는 없는 거니까요. 상대를 위한 작은 준비 운동이라도 마쳐놓아야 하는 거죠. 


09 . 

이렇게 생각을 고쳐먹은 뒤로는 진짜 힘들거나 어려울 때보단 그래도 최악의 상황은 간신히 지나갔을 때 오히려 상대에게 고민을 털어놓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이건 아주아주 주관적인 제 스타일의 문제이니 이런 방법이 맞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다만 저는 이 방식이 제가 저답게 상황을 공유하고 고민을 이야기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공을 받을 준비가 되었을 때, 그런 마음의 여유를 조금이나마 가졌을 때 손을 번쩍 들어 '나에게 패스해 줘'라는 이야기를 꺼내는 거라고나 할까요. 


10 . 

그러니 여러분도 아주 친한 사이일수록 그리고 고민을 자주 공유하는 사이일수록 가끔씩 스스로를 돌아보며 자기 체크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에 공짜가 없듯이 세상에 일방적인 위로나 공감도 없는 거거든요. 특히나 나에게 없는 뭔가를 갈구하거나 요청해야 할 때는 일단 상대가 주고 싶은 생각이 들게끔 행동하고 표현하는 것도 정말 중요합니다. 저는 그게 삶을 살아가는 매너이자 지혜라고 봐요. 그리고 그런 태도를 가져야 누군가 우리에게 공을 달라고 손을 들 때도 우리 나름의 기준으로 패스해 줄 수 있는 거니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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