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개의 문단으로 전하는 짧은 생각 : 열문단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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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하다 보면 이른바 '위험 신호'라는 것을 감지하게 됩니다. 그 신호들은 아주 다양한 형태로 다가오게 되는데 '내가 일을 잘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체크부터 '함께 일하는 동료들과 결을 잘 맞추고 있는지', '내 성장과 조직의 성장 모두를 챙기고 있는지', '비록 일터이긴 하지만 일 외적인 부분에서 부족함을 보이고 있지는 않은지' 등 다양한 부분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죠. 그래서 일이 손에 익고 어느 정도 연차가 쌓이고 나면 오히려 이런 위험 신호들에 조금 더 민감해지려는 노력이 나의 성장을 잘 챙기는 주요한 밑거름이 된다고도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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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첫 문단만 읽고서 '아니, 세상에 이런 것까지 하나하나 어떻게 신경 쓰고 사나... 주어진 일만 잘 해내기도 벅찬데...'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글을 쓰고 있는 저 역시도 매 순간 저 위험신호들을 감지하며 산다는 건 분명 거짓말일 테니 말이죠.
하지만 제가 글을 쓰는 이유 중 하나는 '제가 이런 노력까지 하고 있습니다'를 알리거나 자랑하기 위함이 아닌, 저 스스로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지점들을 더 선명하게 기억하기 위함이니 일종의 작은 선언이라고 봐주시면 좋겠네요. (요약하자면 이런 글은 곧 저에게 해주는 셀프 일침과도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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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에서도 제가 가장 위험하게 생각하는 신호 중 하나는 '누군가 더 이상 나를 설득하려 하지 않을 때'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다행히도 (아니면... 제가 감지하지 못한 것일지도 모르지만ㅠㅠ) 아직까지 누군가 저를 설득하려 하지 않는 듯한 낌새는 채지 못했지만, 간혹 제3자들의 상황 속에서 이런 모습들이 발견될 때가 있습니다. 한때는 같이 치열하게 토론도 하고, 때로는 과열된 토론이 작은 속상함들로 이어질 정도로 애증의 관계를 유지하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차갑게 식어버리는 장면을 목격하기 때문이죠. 그리고 이는 둘 사이의 관계가 나빠졌다고 단정 짓기 보다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설득하는 걸 포기했다고 보는 게 더 정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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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면적인 이유만 보자면 단순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역시 누군가를 설득하다 포기하게 되는 때는 아마도 상대방이 더 이상 내 말을 듣지 않으려 한다는 걸 감지하는 순간이기 때문일 테니까요. 그럴 땐 '지금 이 사람을 설득하기 위해 애써봤자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라거나 '내가 아무리 설득하기 위해 좋은 근거를 찾아 들이밀어봤자 저 사람은 애초에 들을 생각이 없다'는 마음이 생기기 마련이죠. 그럼 우리는 마치 그 사람을 설득하는 행위가 허공에 화살을 쏘는 것처럼 허무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상대의 마음을 돌리고, 새로운 관점을 심어주려는 행동을 멈추게 되고 말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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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때론 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 이유도 있습니다. 여기선 제가 최근에 겪은 한 후배의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합니다. 제가 아는 후배는 커뮤니케이션에도 꽤 능하고 누군가를 이유 없이 싫어하지도 않는 모나지 않은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무엇보다 자기가 하는 일에 큰 애정을 가지고 있어서 주어진 일은 물론이고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나은 결과물을 만들려고 고민하는 타입이죠. 맞습니다. 어찌 보면 회사 생활에 있어 가장 모범적이고 이상적인 애티튜드를 가진 친구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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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언젠가부터 이 친구에게 꽤 큰 고민이 하나 생겼나 봅니다. 어느 날 저를 불러 조심스레 이런 하소연을 하더라고요.
"여태껏 남을 설득하려는 노력을 적게 하는 편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남들이 불편해하는데 굳이 제 생각을 주입하고자 내 맘대로 설득하는 타입도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올해 상반기 동안은 정말 힘든 경험을 했어요. 세상에서 가장 설득하기 힘든 사람은 '일관성이 없는 사람'이구나 하는 걸 깨달은 거죠. 제가 설득할 땐 알겠다고 해놓고선 결국 본인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있고, 그걸 가지고 다시 설득을 하려 하면 그땐 또 '그게 그거였다'고 얘길 하더라고요. 이게 반복되니까 아예 설득과 논쟁의 과정이 성립되지 않는 거죠. 모든 상황을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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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을 듣고 저 역시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저도 그런 경험이 있었던 것 같았거든요. 짧은 시간 기억을 더듬어 봐도 진짜 설득이 힘든 사람은 나와 대립각을 세우는 사람이 아니라 앞에서는 설득당하는 듯한 스탠스를 취하다가 결국 합의되지 않은 방향으로 일을 처리하고, 그게 문제시되면 다시 애매한 스탠스를 보이거나 자기식의 해석을 덧붙이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요약하면 그들은 타인과 설득을 주고받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자기 자신을 끝없이 설득하며 그 순간 하고싶은 대로 결정하는 사람에 불과했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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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한동안은 제 주위 사람들을 한번 유심히 관찰해 봤습니다. 혹시 그런 경우가 눈에 띄나 싶어서였죠. 아니나 다를까 주변 동료들이 특정한 누군가를 대할 때 그런 우려를 표하는 경우가 종종 있더라고요. '어차피 그 분께는 제 의견을 얘기해 봤자 나중에 가서 또 다른 식으로 해석하실 거 같아요'라며 설득에 에너지를 쏟지 않거나 '제가 이야기하기보단 OO 님이 대신 말씀해 주시는 게 더 영향력이 있을 거 같아요'라며 직접 할 수 있는 수준의 컴도 상위 조직장끼리의 컴으로 만들어버리는 경우도 목격되었으니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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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저는 적어도 누군가와 협업을 해야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들이 나를 설득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해 줄 때를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봅니다. 저와 제 주변 사람들의 경험으로만 비춰봐도 가장 위험한 신호는 '이제 누구도 나를 적극적으로 설득하려 들지 않을 때'인 것 같거든요. 본인은 마치 스스로가 잘하기 때문에 내 의견에 다들 동조해 준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을 확률이 큽니다. 이미 편협한 시각과 아집으로 자신만의 답을 내린 채 타인의 설득에는 일단 피하고 보자는 식의 행동을 하고 있을 수도 있는 거니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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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이 지치는 와중에도 '저 근데...' 라며 조심스럽게라도 자신의 의견을 솔직하게 피력해 주는 동료들이 그래서 더 고마운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단 저에게 자신의 생각을 가감 없이 이야기해준다는 점, 그리고 제가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진심으로 제 의사를 궁금해한다는 점만 고려해도 누군가 나를 설득하려 한다는 건 나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는 것과 마찬가지거든요. 그러니 한 번쯤은 냉정하게 나를 돌아봐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내 주위의 사람들은 나를 얼마나, 자주, 어떻게 설득하려 애쓰고 있는가에 대해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