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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우히어 Nov 25. 2023

인생 같은 등산

이번엔 친구와 함께


아무도 없는 산봉우리에 오르면 특권을 누린다는 느낌이 든다. 자신의 키로 인해 우리는 산 정상보다 높아진다. 적어도 그 장소에서는 자연에서 가장 높은 곳이 우리의 두 발아래에 있다. 위치 덕분에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세상의 왕이다. 주변 모든 것이 우리보다 낮은 데 있고, 인생은 경사진 비탈길 혹은 높이 올라 정점에 이른 우리 앞에 놓인 낮은 평원이다.
[불안의 책], 102p, 페르난두 페소아              



금요일부터 추워진다는 소식에 목요일에 등산을 다녀왔다.     

 

이번에는 동행할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최근에 산을 거의 가본 적이 없다고 하여 나보다 걸음이 느릴 것 같아, 그 친구와 속도를 어느 정도는 맞추기 위해 수요일 밤에 생굴을 시켜 소주 2병을 먹다가 새벽 3시에 잠이 들었었다.      


그 바람에 자기 전에 알람 맞추는 것을 깜박하여 평일에 7:10에 일어나야 하는 루틴을 깨고, 8:50까지 꿀잠을 자는 사태가 벌어졌다. 딸은 학교에 지각하게 되었고, 나도 친구와의 약속에 조금 늦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아무튼 동행한 친구는 내 기준으로는 솔직히 말해서 좀 심하게 걸음이 느렸다. 어차피 이번 산행은 나도 운동보다는 친목이 목적이었기에 마음을 비우고 천천히 쉬엄쉬엄 올라갔다. 가다가 중간에 더 일찍 올라갔다 내려오던 다른 친구와 잠깐 인사도 나누고 쉼터에서 친구가 준비해 온 샌드위치도 먹고 정자에서 고양이들도 구경하느라 약 3시간여 만에 정상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마저도 친구는 힘들다고 결국 정상에 오르는 것은 포기해 버렸다.      



최근에 몇 차례 나 홀로 등산을 해보았는데, 나 홀로 등산의 가장 아쉬운 점은 내려왔을 때, 쓸쓸히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점이었다. 등산하면 떠오르는 파전에 막걸리까지는 아니더라도 시원한 아아라도 한잔 하며 검단산을 1시간 안에 올라가 버린 나의 민첩함에 대해 수다를 좀 떨어주고 싶었는데 그럴 친구가 없다는 점.   

   

하지만 이번 산행에서는 그 부분이 채워지기는 했다. 친구와 함께 내려와 왕비성이라는 중국집에서 굴짬뽕을 한 그릇씩 먹고 바로 옆에 있는 카페웨더라는 곳에 가서 아아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으니까.   

   


이제 다음번에는 운동도 되고 친목도 도모할 수 있는 산행이 가능하기를 기대해 봐도 되려나.


아무튼 페르난두 페소아는 산 정상에 오르면 특권을 누린다는 느낌이 든다고 했지만, 내가 산을 가끔씩 오르내리는 이유는 그런 것 때문은 아닌 것 같다.      


보통 인생길을 오르막, 내리막에 비유하는 경우가 많은데, 나에게 등산은 어딘지 인생을 압축해 놓은 느낌이랄까. 실제 인생에서는 긴 시간 동안 겪게 될 오르내림을 등산하는 2~3시간 동안 한 방에 겪게 되니까, 그 시간 동안에 어떤 식으로든 나를 돌아보고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 힘들었던 일들을 털어내고 그래서 더 가벼워진 몸과 마음으로 평지(일상)로 다시 돌아오는 나만의 의식이랄까.       


올라갈 때는 바위나 계단의 높낮이나 발을 디디는 면적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한 발 한 발 발밑을 잘 살피며 가야 하다 보니 경치를 감상하기 힘들지만, 내려올 때는 이미 올라왔던 길이기도 하고 시선의 방향이 발걸음의 방향과 같기 때문에 올라갈 때는 미처 즐기지 못했던 경치를 눈에 담게 된다.     



검단산의 경우 경치가 아주 좋은 산은 아니지만, 내가 좋아하는 경치가 있다. 이름은 모르겠지만 위로 쭉쭉 뻗은 나무들이 하늘을 가릴 정도로 빽빽이 들어찬 곳이다. 그곳에 다다르면 키가 큰 나무들 아래 선 내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저절로 느끼게 된다. 평소에 좀 거만한(?) 캐릭터인 내가 스스로를 눌러주기 위해 산을 찾는 것일 수도 있겠다.      


갑자기 깨닫거니와 나는 세상에서 혼자다. 영혼의 지붕 위에 올라가서 이 모든 것을 본다. 나는 이 세상에서 혼자다. 본다는 것은 멀리 있다는 것이다. 분명하게 본다는 것은 멈추는 것이다. 분석한다는 것은 외부인이 되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스치지도 않고 지나간다. 내 주위에는 공기뿐이다. 나는 어찌나 철저히 혼자인지 나와 내 옷 사이의 거리마저 느낄 수 있다.
[불안의 책], 116p, 페르난두 페소아     


뭐 굳이 따지고 들지 않아도 그냥 산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맑은 공기가 내 주위를 감싸는 것이 느껴지면 그래, 이 맛에 산에 오지 싶다.      


이번 산행은 천천히 올라가서 그런지 다음 날 종아리나 허벅지가 땅기는 증상도 거의 없었다. 그래서 이제 다음번에는 보다 높고 험한 산에 도전을 해보려 한다. 양평에 있는 용문산이 1,000m 정도라고 하니 좀 따뜻한 이번 겨울 어느 날 나 홀로든 누군가와 함께든 올라가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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