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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우히어 Dec 22. 2023

열흘 남은 2023년


2023년이 열흘 남았다. 나는 올 한 해 나름대로 참 바쁘게 살았고, 그 결과 책을 많이 못 읽었고 글도 많이 못 썼다. 그래서일까? 2023년을 돌아보니 뭘 했지?라는 생각이 문득문득 올라온다. 심지어 얼마 전에는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2023년이 나에게는 오지 않았던 거 같다, 발리 한 달 살이를 했던 2022년 여름에 나는 아직 머물러 있는 것 같다고도 했었다.


그래도 올해가 가기 전에 꼭 하려던 것이 있었는데, 물론 아직 시간이 남기는 했지만,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는데, 약 600페이지에 달하는 현재 읽고 있는 책을 마무리하는 것이다. 344페이지부터 읽어야 하는데 남은 열흘 동안 다 끝낼 수 있기를.


페르난두 페소아라는 이름도 생소한 포르투갈 작가의 사후 47년이 흘러서야 출간된 「불안의 책」이라는 책이다. 나는 이 작가를 시집을 통해 먼저 알게 되었고, 그가 쓴 시들이 너무 좋아서 그의 다른 작품들을 검색하다가 이 책을 알게 되었다.


제목만 딱 들어도 어딘지 우울하고 한없이 밑으로 밑으로 내려가게 될 것만 같은데, 실제로 내용이 그렇다. 그래서일까, 한 번에 너무 많은 양을 읽어내지 못하고 있다. 문장 자체가 어려운 것도 있지만, 우울함이 뚝뚝 묻어 나오기 때문에 계속 읽다 보면 내 감정이 너무 처지는 기분이랄까. 하지만 그 우울하고 염세적인 표현들에 또 너무나 깊이 공감이 되어 그 자체로 위로를 받기도 하다 보니 조금씩이라도 계속 읽어나가고는 있다.


보통은 책을 다 읽은 후 공감되는 문장을 정리해 놓는 편인데, 이 책은 다 읽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아 미리 시작을 했다. 아직 344페이지까지 밖에 읽지 않았는데 기록한 문장들만 A4용지 14쪽 분량이다. 그중에서 추리고 추린 문장들이 아래와 같다.   

  



원하진 않았지만 내가 타고난 감수성의 혼란스러운 밑바닥에 있는 것들의 총체가 바로 나라는 존재다.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책」, 44p


나를 조금 깊이 아는 사람들은 나의 이 타고난 감수성의 혼란스러움을 어느 정도는 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온전히 다 알지는 못하며, 사실 나 조차도 아직 다 알지는 못하겠다. 남들보다 조금 더 민감하고 조금 더 잘 느끼고 조금 더 흔들리는 하지만 웬만해서는 그런 티를 잘 안 낸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를 활기차고 씩씩하고 꽤나 유머러스한 사람으로 인식하기도 하지만 가장 밑바닥의 나는 꽤나 어둡고 우울하고 염세적인 사람이다.

 



내 감각이 지나치게 예민한지, 감각의 표현이 너무 예민한지, 아니면 보다 정확히 말해 감각과 감각의 표현 사이에 있는, 표현하려는 나의 욕구에 따라서 오직 표현되기 위해 존재하는 가짜 감정을 만들어내는 지성이 지나치게 예민한지.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책」, 179p


그러다 보니 이 예민한 감각과 감각 사이에서 혼자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경우가 많다. 특히 요즘같이 추운 날 아침마다 운동을 하며 나를 스스로 냉탕에 집어넣었다가 가끔 일 끝나고 집에서 혼자 술 한잔 하다 눈에서 흘러나오는 뜨거운 것으로 나를 온탕에 빠뜨리기도 한다. 그리고 가짜 감정을 만들어내는 지나치게 예민한 지성. 가스라이팅 까지는 아니어도 나는 어느 정도는 내가 원하는 대로 상대방이 나를 생각하게 나를 포장하는 것에 능력이 있는 것 같다. 그러니 좀 과장되게 말하자면 내가 생각하는 대로 상대방의 생각을 이끄는 편이라고 해야 할까. 이런 능력을 조금 더 가치 있는 일에 쓰면 좋으련만 그래서 나름대로 다양한 분야의 일을 해보고는 있지만 아직까지는 그저 개인적인 관계에서나 써먹는 중이다.     




싫증 나지 않던 것을 포함해서 모든 것에 싫증이 난다. 나의 행복은 나의 고통과 다름없이 고통스럽다... 아무리 내 안으로 깊이 들어가 봐도, 내 꿈속의 모든 길은 근심이라는 빈터에 가 닿는다... 내 인생으로 나를 두들겨 패는 것이 내 인생인 것 같다.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책」, 112-113p


이 부분은 정말이지 텍스트가 나를 두들겨 패는 느낌. 눈으로 문장을 읽는데 내 몸이 아파지는 기분이다. 내 꿈속의 모든 길은 근심... 이라니. 요즘에 조금 덜 한데 한동안 끔찍한 악몽을 꾸다 놀라거나 울다가 새벽에 깨어나는 날들이 있었다. 꿈은 꿈일 뿐이라고 의미 부여할 필요 없다고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털어내버리려고 하지만 그게 쉽지 않아 다시 잠들지 못하고 뜬눈으로 아침을 맞이하는 날들. 그렇게 하루를 시작하는 날이면 정말이지 나를 괴롭히는 것은 나 자신이라는 사실에 사라져 버리고 싶기도 했었다. 행복이 고통이라니.

  



아무것도 나를 만족시키지 않고, 아무것도 나를 위로하지 못하며, 존재했던 것과 존재하지 않았던 모든 것에 다 싫증이 난다. 내 영혼을 갖고 싶지도 않고, 포기하고 싶지도 않다. 나는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원하며, 나에게 없는 것을 포기한다. 나는 아무것도 될 수 없고, 어떤 것도 될 수 없다. 나는 나에게 없는 것과 내가 원하지 않는 것 사이에 놓인 다리다.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책」, 298p


나에게 없는 것과 내가 원하지 않는 것 사이. 그러면 나에게 있는 것과 내가 원하는 것도 분명 있기는 할 테지. 사실 나도 안다. 나는 평범한 기준에서 보자면 가진 게 많은 사람이란 걸.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을 물론 다 이루고 살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희생하고 참고 기다리고 이런 성향은 아니라 어느 정도는 내가 원하는 것을 하며 살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내 영혼을 아껴주지는 못한다. 나 역시 나에게 없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 사이에 있기 때문인 걸까? 뭐가 그리 싫증이 나는 걸까? 사실 나는 안다. 삶 자체가 싫증 나는 것이라는 걸.

 



인생에 대한 이론을 세우지 않는다. 인생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모르겠고 궁금하지도 않다. 내가 보기에 인생은 대체로 고단하고 슬프며, 그 중간중간에 달콤한 꿈들이 들어 있다. 다른 이들의 인생이 어떤지는 모른다.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가?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책」, 322p


기본적으로 타인에게 큰 관심이 없다. 말 그대로 타인의 인생이 나와 무슨 상관일까 싶은 것이다. 이러한 마음은 가족에게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도 최소한의 도리는 하니까 겉으로야 딱히 문제없어 보이지만 그건 정말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 보이지 않는 부분의 실체는 가끔 나도 무서울 정도이다. 그런 생각들이 꿈속에서 나를 괴롭히는 부분인 것 같기도 하다. 인생은 그저 흘러가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바람의 방향으로 흘러만 가는 구름이나 강물, 풀잎들을 보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바닥이 발을 딱 붙이고 사는 삶을 지향하면서도, 마음 저 깊숙한 곳에서는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를 부러워한다. 그래서 ‘어딘가에 소속되면 평범해진다.’ 이런 문장에 자꾸 눈이 가고, 현재 소속된 곳에서 내 자리를 찾으면 되는데 또 그 자리를 스스로 박차고 나오려 한다.    




오늘 저녁에 회식이 있어 이따가 밤에 택시를 부르는 게 빠를까 대리를 부르는 게 빠를까 고민하다 정안되면 정대리(남편) 찬스를 쓰면 될 것 같아서 차를 두고 나왔다. 미사에서 상암까지 멀어도 차로 가면 50분이면 충분한데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고 얼마나 걸릴지 몰라 2시간 전에 나왔다.


하필 이렇게 추운 날. 원래 타려던 버스 말고 다른 게 먼저 오길래 잠깐 고민하고 올라타버렸다. 모든 길은 다 통하니까. 우선 서울로 나가면 대중교통으로 어디든 못 가랴.


그래, 일단 시작을 하면 어디든 가 닿겠지. 마음먹었으면 먹은 대로 말을 내뱉었으면 내뱉은 대로 그 마음과 그 말이 이끄는 대로 2024년으로 넘어가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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