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10주년
너네는 여행이 뭐라고 생각해?
나의 예상과는 다르게 각자 여행에 대해 생각하는 바가 참 다양했다.
제주에 사는 친구는 서울에 살 때는 몰랐는데 제주에 와서 보니 여행이 별 거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꼭 어디 특별한 곳을 가야만 여행이 아니고 가족들과 맛있는 것을 먹고 좋은 경치를 보면 그곳이 여행지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아마도 서울에서보다 상대적으로 여유 있는 소위 말하는 저녁이 있는 시간을 보내다 보니 생각이 바뀐 것 같았다.
그의 아내는 예전에는 여행을 가면 하나라도 더 구경하려고 애를 썼는데 이제는 가능한 오래 머물며 그곳에 스며드는 것이 진정한 여행인 것 같다며 그래서 지금 자기들은 제주도에 여행을 와있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서울에서 나와 비슷한 생활을 하고 있는 다른 친구는 여행은 떠나기 직전까지가 가장 기쁘다고 했다. 여행을 계획하고 그곳의 명소를 찾아보고 맛집을 알아볼 때가 가장 설레지 막상 어느 곳을 가든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하다 싶고 서울에서만 살아온 자신은 한강 야경과 남산 타워가 제일 예뻐 보인다고 했다.
그의 아내는 자신에게 여행은 맛집 탐방이라고 했다. 어디를 가든 그 지역에서만 먹어볼 수 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 자신에게는 가장 큰 기쁨이라고 했다.
제주에 사는 친구가 다시 나에게 물었다.
네가 생각하는 여행은 뭔데?
“쉬는 것. 솔직히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행을 하는 것 아니야? 그런데 여행 가서 이것도 해야 하고 저기도 가야 하고 이러면 좀 피곤해.”
“그래도 살면서 여행을 자주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곳에서 꼭 가봐야 하는 곳은 경험해봐야 하는 것 아닐까?”
아내가 말했다.
그래도 좀 적당히 했으면 좋겠다 이거지.
당신이 생각하는 적당함이 뭔데?
분위기가 약간 싸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역시 여행 이야기를 괜히 꺼냈구나 싶었다. 내가 꺼냈으니 내가 수습해야겠다 싶었지만 어떤 화제로 전환을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다행히 내가 입을 열기 전에 아까 여행은 맛집 탐방이라던 친구 아내가 이번 제주 여행에서 나의 아내가 추천한 맛집이 모두 만족스러웠다며 아내의 정보력을 칭찬했고, 자연스레 분위기는 여자들끼리 서로 적당히 추켜세우는 것으로 흘러갔다.
그 이야기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나는 여행에 있어서만큼은 아내와는 조율이 불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서로 다른 여행 방식에 대한 조율이 없어도 사는데 큰 문제가 없는 일상을 유지하기로 마음먹었다.
제주 여행 이후로 시간은 또 흘러 드디어 결혼 10주년이 올해로 다가왔다.
결혼기념일은 7월 초, 지금은 4월. 해외여행은 보통 3개월 전에는 예약을 해야 하니 지금 아내가 이것저것 알아보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7살과 4살짜리 두 아이를 데리고 아내와 함께 하는 해외여행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파온다. 아내는 일정을 빈틈없이 짜는 것 못지않게 짐도 정말 완벽하게 챙긴다. 덕분에 여행 가서 필요한 것이 없어 현지에서 비싼 돈을 주고 사거나 냄새나는 양말을 하루 더 신거나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에 비를 맞을 일은 없었지만 그런 만큼 남들에 비해 짐이 많은 편이다. 더구나 아이가 생기고 나서는 아이의 짐까지 추가되면서 작년에 제주도 갈 때 김포공항에서 만난 친구가 해외여행 가냐고 물어봤을 정도였다. 제주도 갈 때 해외여행 갈 정도로 짐을 싸면 진짜 해외여행 갈 때는 이민 가냐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짐을 쌀 것이 분명하다.
짐을 많이 싸서 큰 캐리어를 가지고 공항에 가는 것이 힘든 것이 아니라 아내는 완벽한 여행을 위해 여행 당일 아침까지 필요한 일상용품들을 며칠 전부터 못쓰게 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가장 불편한 것은 신발이다. 집에서 잠깐 담배를 피우러 나갈 때나 쓰레기를 버리러 갈 때 나는 한겨울에도 슬리퍼를 신고 나간다. 그 신발이 제일 편하기 때문이다. 물론 아내가 여행 갈 때도 항상 그 슬리퍼를 챙겨 오기 때문에 여행지에도 편하지만 문제는 그 슬리퍼를 여행 가기 최소 2일 전부터 비닐에 싸서 캐리어 안에 넣어놓는다는 것이다. 그걸 꺼내려고 하면 그렇게 되면 다른 짐들도 다시 뺏다 넣어야 한다며 그냥 다른 신발을 신고 나가라고 한다. 슬리퍼는 그거 하나뿐이고 신발이라고는 구두 아니면 운동화뿐인 나는 운동화를 신어야 하는데 맨발에 운동화를 신고 잠깐 나가는 것이 참 어색할 뿐만 아니라 엘리베이터에서 주민이라도 만날 때면 내 발만 쳐다보는 것 같아 고개를 들 수가 없을 지경이다.
또 다른 것은 면도기다. 평소에 주로 전기면도기를 이용하는데 아내는 그마저도 최소 여행 가기 전날에는 캐리어에 넣어버려 여행 가는 날은 꼭 일회용 면도기로 면도를 하게 만든다. 익숙지 않은 일회용 면도기로 면도를 하다 살짝이지만 베일 때마다 여행 가는 날 아침 기분이 확 상하곤 했다. 얘기를 안 해 본 것은 아니지만 아내는 아내대로 여행 가기 전 날 모든 짐을 완벽하게 싸서 캐리어를 현관에 내어 놓아야 편하게 잠을 잘 수가 있다고 했다. 여행 가는 날 아침에 넣어야 할 것을 빼놓으면 왠지 그것을 빠뜨리게 될 것 같아 걱정되어 잠이 안 든다고 했다.
유럽 일주일이면 집에 있는 모든 캐리어를 동원해 짐을 쌀텐데 생각하면 할수록 결혼 10주년 기념 두 아이를 데리고 해외여행은 무리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때 마침 아내에게 문자가 왔다.
[비행기 표 인당 38만 원. 이것저것 추가해도 100만 원 정도면 가능할 것 같아. 그리고 회사 동료가 알려줬는데 에어비앤비라는 사이트 통해서 바르셀로나에 수영장 딸린 2층집 하루에 17만 원이면 가능할 듯. 6일 정도면 그것도 100만 원 남짓. 합쳐서 200이고 가서 쓰는 비용도 최대한 줄여볼게. 그럼 충분히 가능한 수준인 것 같은데 어때? 비행기 표 하루라도 일찍 예약해야 더 싸니까 빨리 알려줘.]
[비행기 표 애들도 다 돈 받잖아. 그럼 그것만 거의 200이지.]
[아 내가 말 안 했나? 엄마가 결혼 10주년이라고 우리 둘이 다녀오래. 애들 봐주기로 했어^^]
아내가 아무리 우겨도 어떻게든 애들 핑계를 대며 해외여행만은 특히, 유럽여행만은 피하려고 했었다. 평소에는 다리가 아픈 엄마에게 아이들을 맡기지 않는 아내인데, 결혼 10주년 해외여행을 위해 그동안 엄마에게 부탁을 하지 않았던 것인가 싶을 정도로 아내는 여행을 위한 의지가 확고해 보였다.
딸이 부탁을 안 해서이기도 했겠지만 첫째가 태어나고 나서 한 번도 아이를 봐준 적이 없었는데 왜 갑자기 이번에 봐준다고 하는 것인지 장모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그래도 잠깐 생각해 봤다. 신혼여행 이후 단 둘이 여행 간 적이 없으니 정말 이번 기회에 한번 가볼까? 하지만 이내 하와이에서의 극기 훈련 같은 일정이 떠오르며 그때는 아내와의 첫 여행이라 정말 멋모르고 함께 했지만 그동안 10년을 함께 살면서 여행할 때마다 아내에게 질려온 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사귈 때 여행을 꼭 가봐야 한다고 했구나 싶다. 친한 친구도 여행을 함께 해봐야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된다고 하는구나 싶다.
결혼 10주년 기념 둘만의 유럽여행은 분명히 이별여행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한 번 더 단호하게 마음먹는다. 아내와 단둘이 여행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 The en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