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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우히어 Jul 22. 2024

161021-06

터프 머더



유치원 학예발표회 날, 엄마도 아빠도 없었지만 그래서 오히려 그는 마음 편하게 무대를 누볐다. 그런데 그 모습을 아빠가 보고 있었다는 걸 나중에 알았을 때,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철렁 내려앉음과 동시에 코끝이 가려워지고 눈이 희미해지는 이상한 감정을 처음 느꼈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그날도 수업이 끝나고 운동장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방과 후 모여들어 그의 춤을 구경하던 아이들은 하나 둘 학원으로 집으로 돌아가고 넓은 운동장에 혼자만 있다고 생각하던 그때. 담임  선생님이 그를 불렀다. 그리고 봉투를 하나 전해주었다. 그 안에는 학예발표회 때 자신의 사진과 편지 한 장이 들어있었다.


“영욱아~이 사진을 찍어 놓고 5년이 흘렀구나. 직접 전해주지 못하는 아빠를 용서해 다오. 사진 속의 니 모습에서 그리고 지금 너의 모습에서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어 기분이 좋구나. 네가 조금 더 크면 이해할 수 있을 너에게 하고픈 말들이 많다. 앞으로도 한 가지만 명심하거라. 함께 있지 않다고 해서 너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5년 만에 아들에게 보내는 첫 편지치고는 너무 짧았다. 하지만 그에게 와닿은 내용만큼은 그 어떤 구구절절한 편지보다 길었다. ‘지금 너의 모습’이라는 부분에서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아빠는 보이지 않았고, 그는 굳이 찾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쉽게 그에게 모습을 보이지 않을 거란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대신 편지를 읽고 또 읽고 사진을 보고 또 보았다. 그렇게 해가 질 때까지 운동장 한 구석에서 그는 난생처음 느껴보는 감정을 홀로 감내했다.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어 기분이 좋구나.’ 그날 이후, 그에게 춤은 자유로움의 상징이 되었다. 누군가 넌 왜 춤을 추니? 넌 춤이 왜 좋아? 하고 물으면 “춤을 추고 있으면 자유를 느낄 수 있어.”라고 마치 자동응답기에 녹음된 내용처럼 똑같이 말하곤 했다.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이 끝나가던 어느 날, 봄에 있을 비교적 큰 규모의 대회를 위해 하루 종일 연습을 마치고 레옹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던 때였다.


“난 이번 대회 못 나갈 것 같아. 아까 캡틴 형한테는 얘기했어.”


레옹의 부모님이 반대하시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그 말을 들으니 가슴속으로 휑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리고 연습실 나오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야.”

"야, 우리 오랜만에 운동장에서 춤출까?"


3개월 전 레옹과 함께 비보이팀에 들어오게 되면서는 줄곧 연습실에서 춤을 춰왔다. 음악 사운드도 좋고 모래도 날리지 않고 춥지도 않은 연습실은 춤을 추기에 좋았다. 하지만 운동장에서 출 때만큼 자유로움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눈이 얼어 딱딱하고 미끄러운 운동장에서 더워서인지 추워서인지 볼과 귀가 시벌개질 때까지 그들은 춤을 췄다.


“크레이지영, 너는 언제부터 춤을 추기 시작한 거야? 니 인생의 첫 춤은 언제야?”


“내 인생의 첫 춤? 첫 키스도 아니고 첫 춤이라……. 그때는 그게 춤인 줄 몰랐는데 돌이켜보면 그게 처음이었던 것 같아. 아빠가 사준 바퀴 달린 신발을 신고 마이클 잭슨처럼 뒤로 쓱 가봤던 거. 그냥 한번 해봤는데 생각보다 너무 재밌더라고. 그때부터 내 몸을 움직여서 어떤 동작을 만들어 내는 것에 재미를 느꼈던 것 같아. 그리고 그런 동작을 할 때 내가 자유롭다는 생각을 했고. 누군가 나를 보면 자유로워 보였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고.”


“그럼 아빠 덕분에 춤을 시작하게 된 거네.”


“그런가? 너는? 니 인생의 첫 춤은 언제야?”


“나는……스텝업이라는 영화 알아? 6학년 겨울방학 때 그 영화를 우연히 봤는데, 그냥 너무 멋졌어. 그래서 방학 내내 엄마 몰래 인터넷으로 춤영상 찾아보고 학원도 알아보고 하다가 중학교 들어왔는데 댄스동아리가 있더라고. 그래서 무작정 지원한 거지. 너 알지 처음에 나 완전 엉망이었던 거. 정말 열정만 꽉 찼던.”


그러고 보니 레옹은 인간승리라고 할 만큼 처음에는 아예 몸치 수준이었다. 나중에 형들에게 들어보니 레옹은 춤 실력 때문이 아니라 성적 때문에 뽑힌 것이었단다. 댄스동아리는 노는 동아리라는 인식을 깨기 위해 지원자 중 성적이 가장 좋았던 레옹을 일부러 뽑은 것이었다.


“크레이지영, 춤은 나 대신 니가 계속 춰줘. 내 인생에 춤은 중학교 시절 3년으로 끝내야 할 것 같아. 너도 알잖아. 나는 사실 노력 형이지 타고난 소질이 있는 건 아닌 거. 춤은 정말 너 같은 사람들이 계속 춰야 멋진 거 같아. 짜여진 맞춰진 연습한 춤이 아닌 몸이 느끼는 것을 바로바로 표현하는 너 같은 놈.”


그는 왠지 당장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어색해질 것만 같았다. 3년을 추억할 만한 것이 뭐라도 없을까 가방을 뒤적이다 안쪽 지퍼 안에 사진을 발견했다.


“이거 너 가져.”


“이게 누구야? 너야? 아 아빠가 사줬다는 바퀴 달린 신발이 이거구나? 유치원 때네?”


“응. 이 몸이 춤을 추기 시작한 시절의 사진이니까 니가 간직해 줘.”


“하나밖에 없는 거 아니야?”


“맞아. 그런데 나는 워낙 많이 봐서 내 눈에 박혔어. 저 모습이.”


그렇게 그 사진은 레옹이 간직하게 되었다. 눈에 박힐 정도로 많이 봐서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마음만 먹으면 그 사진 속 자신의 모습을 정확하게 그려낼 수 있었지만 사진을 줘버리고 나니 어느새 어린 시절과 아빠를 생각하는 시간도 줄어들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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